주간동아 1162

2018.11.02

정민아의 시네똑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그만, 추악한 세상과 이별을

권경원 감독의 ‘1991, 봄’

  • 입력2018-11-05 11: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진 제공 · ㈜해밀픽쳐스]

    [사진 제공 · ㈜해밀픽쳐스]

    1991년 봄은 몹시도 추웠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소련이라는 거대한 왕국이 해체됐으며 냉전이 종식된 때였다.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을 통해 1990년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들어냈고, 개혁 분위기는 일시에 뒤집혔다. 민주화운동권은 수세에 몰렸고, 많은 한국인이 1987년 승리는 대체 어디로 가버렸느냐며 한탄했다. 

    김완선과 강수지의 상큼함, 김광석과 김현식의 슬픔·울분이 청춘으로부터 사랑받던 시대, 화려하고 컬러풀한 대중문화의 시대였지만 대학가와 노동계는 움츠러들고 있었다. ‘사랑이 뭐길래’와 ‘일밤-이경규의 몰래카메라’를 보며 TV 앞에서 낄낄댔지만, ‘개구리 소년 사건’과 ‘이형호 군 유괴사건’으로 사회는 흉흉했다.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1980년대 식 거리시위는 다시 확산 일로에 있었다. 1991년 봄 11명의 청춘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혁명의 꿈을 안고 있었지만 퇴행해가는 사회에서 울분에 찬 청춘들이 스러졌다. 

    그리고 그날, 1991년 5월 8일. 김기설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 서강대에서 분신했다. 검찰은 김기설의 친구인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이 유서를 대필했다고 발표했다. 27세이던 강기훈은 그렇게 동지의 죽음을 부추긴 악질 운동권으로 낙인찍혔다. 

    24년이 흐른 2015년 봄. 51세의 강기훈은 최종 무죄 판결을 받는다. 악질 운동권이 국가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이라더니, 그는 말기 암환자가 되고 말았다. 권경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1991, 봄’은 1991년에서부터 2017년까지 26년의 세월을 오가며 대체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영화는 유서 대필, 자살 방조라는 충격적이고도 어처구니없는 이 허망한 사건 이후 한 인간의 현재를 조명한다. 



    그때 그 사건을 만들어낸 검사와 판사, 강기훈을 도운 동료와 변호인이 26년의 시차를 두고 화면에 등장한다. 박근혜 정권의 일등공신이라던 김기춘은 당시 검찰총장이었다. 그가 잡아넣었던 많은 간첩은 최근 줄줄이 무죄 판결을 받았고, 그는 현재 감옥에 있다. 김기설과 함께 생활했고 강기훈의 무죄 증거를 내놓았던 당시 동료들은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또 다른 무고한 죽음 앞에서 1991년을 떠올린다. 

    [사진 제공 · ㈜해밀픽쳐스]

    [사진 제공 · ㈜해밀픽쳐스]

    강기훈은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됐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세계여행을 떠나고, 사진을 찍고, 음악을 연주한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사슬에 묶인 삶이었고, 친구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원하지 않은 타이틀을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할 때 그는 죽음과 대면한다. 그의 슬픔과 분노를 상쇄해주는 것은 오직 예술뿐. 그 시절 농성장에서도 끝없이 바흐 이야기만 풀어놓던 그는 이제 기타를 들고 묵묵히 연주한다. 그의 기타 소리에서 슬픔, 분노, 희망 등 그 어떤 단어를 떠올리기도 미안해진다. 

    암세포와 여섯 줄의 기타로 덩그러니 남은 삶 앞에서 강기훈의 얼굴은 한없이 평화롭다. ‘강기타’라는 별명으로 ‘한없이 시시하고 사소한 삶’을 추구한다는 그의 기타 소리가 흐르면, 그 시절의 아픔을 예술과 놀이로 승화한 처연한 아름다움에 먹먹해지는 가슴이 갈 길을 잃고 만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