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58

2018.10.05

김작가의 음담악담

한국 인디밴드 페스티벌의 한 절정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을 추억하며

  • 입력2018-10-09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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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0월 2일 오후 한양대 종합운동장과 노천극장에서 이원으로 열린 도시락 & 쌈지사운드페스티벌 ‘생긴대로 살자’ 중 럭스의 보컬 원종희 (왼쪽)가 열창하고 있다. [뉴시스]

    2005년 10월 2일 오후 한양대 종합운동장과 노천극장에서 이원으로 열린 도시락 & 쌈지사운드페스티벌 ‘생긴대로 살자’ 중 럭스의 보컬 원종희 (왼쪽)가 열창하고 있다. [뉴시스]

    1999년, 세기말이었다. 세상은 21세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전국에 초고속 인터넷이 깔리면서 PC통신 시대는 명실공히 저물어갔다. 동네마다 생긴 PC방은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를 즐기려는 젊은이로 그득했다. 냅스터와 소리바다가 등장하기 직전이던 그해, 음반시장은 정점을 찍었다. 아이돌을 비롯한 주류 음악계에 대한 반발감이 최고조이던 홍대 앞에도 시장의 호황은 영향을 끼쳤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 밴드라도 어느 정도 입소문만 타면 3000장을 기본으로 팔 수 있었다. 

    주류 음악에서 록은 사양길이었지만 홍대 앞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록 팬이 모여들었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델리스파이스가 이미 방송을 타고 전국적 지명도를 구축한 때였고 레이니썬, 앤 등 부산 밴드가 음반을 내며 서울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특정 밴드가 특정 클럽에서만 공연하는 하우스 밴드 체제는 무너져갔고, 이 공백을 여러 인디 레이블이 등장하며 주도권을 바꾸기 시작했다.

    음반이 많이 발매되면 확장성 또한 증가한다. 굳이 홍대 앞 라이브클럽에 가지 않더라도 전국 어디서나 ‘핫뮤직’ ‘서브’ 등의 잡지에서 본 밴드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의미다. 홍대 앞에 국한되던 이 ‘취향의 공동체’는 그 세기말 무렵, 느슨하게나마 전국적 공동체로 확대될 수 있었다.

    천국과 지옥이 교차한 1999년

    이 공동체에게 1999년은 지옥과 천국을 널뛰는 시소와 같았다. 그해 여름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이 열렸고, 가을에는 쌈지사운드페스티벌(쌈싸페)이 개최됐다. 지금이야 주말마다 어디선가 페스티벌이 열리지만,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의 개최 소식은 마치 이 땅에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딥 퍼플, 드림 시어터, 프로디지,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처럼 록의 과거와 현재를 대표하는 밴드들이 이틀에 걸쳐 한국을 찾다니! 거기에 국내 라인업도 정확히 1990년대 밴드였다. 

    록의 신이 저주라도 내렸을까. 7월 마지막 주 토요일, 하루 종일 폭우가 내렸고 바닥은 뻘밭이 됐다. 바닥에 푹푹 발이 빠지니 좀비처럼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무대 스케줄은 지연과 취소를 반복했고, 첫날 헤드라이너였던 딥 퍼플의 공연을 끝으로 결국 밤사이 그다음 날 일정이 몽땅 취소됐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 발을 딛자마자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개통한 것이었다. 1999년, 록의 여름은 8월을 맞이하지 못한 채 7월로 끝났다. 



    한 서린 탄식이 잦아들 무렵, 또 하나의 페스티벌 소식이 들려왔다. 쌈싸페. 중견 패션잡화업체였던 쌈지가 큰판을 벌였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개최된 첫 번째 쌈싸페를 앞두고 당시 천호균 쌈지 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실험적이고 독특한 음악세계를 추구하는 신예 음악가를 발굴하고 대중에게 다양하면서도 신선한 음악을 선사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죠.” 

    실험과 독특, 다양과 신선이란 단어는 홍대 앞 인디 음악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 취지에 충실해서였을까. 이전의 록페스티벌과 쌈싸페는 완전히 달랐다. 넥스트, 시나위, 부활 등 대중적 인지도가 큰 밴드는 완전히 제외됐다. 입장료는 무료였다. 경기장을 제외하면 그 무렵 가장 큰 야외 행사장이던 연세대 노천극장에 ‘무명 음악인’들만으로 채우는 모험이 성공할 수 있을까. 

    크라잉넛, 델리스파이스, 닥터코어911, 원더버드, 힙포켓 등 총 7팀이 ‘무림고수’로, 그리고 넬, 코어매거진 등 8팀이 ‘숨은 고수’로 무대에 올랐다. 10월 23일 토요일이던 그날 홍대 앞 라이브클럽의 관객 수는 평균보다 적었다. 다들 연세대 노천극장으로 몰려간 것이다. 공짜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장소에서 그렇게 ‘인기 많은’ 밴드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첫 기회이기도 했다.

    추풍무색의 뜨거운 무대

    노브레인(왼쪽)과 그들의 2011년 콘서트 장면. [동아DB]

    노브레인(왼쪽)과 그들의 2011년 콘서트 장면. [동아DB]

    1회가 일종의 파일럿이었다면 2회는 본방의 시작이었다. 16팀에서 총 22팀으로 참가팀이 대폭 늘었다. 관객도 크게 증가했다. 객석은 낮부터 술렁거렸다. 떼창과 슬램이 난무했다. 곳곳에서 보디서핑을 타는 물결이 출렁였다. 펑크와 모던 록, 뉴 메탈 등등 어떤 장르가 등장해도 열기가 식지 않았다. 10월 7일, 땀에 흠뻑 젖은 옷은 선선한 가을바람에도 마를 틈이 없었다. 코코어의 이우성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무대에서 객석으로 몸을 날렸다. 안타깝게도 펜스 사이를 넘지 못하고 바닥에 꼬꾸라졌지만. 

    마지막 무대는 디아블로의 몫이었다. 하지만 실질적 하이라이트는 그 직전에 섰던 노브레인이었다. 공전절후의 명반 ‘청년폭도 맹진가’로 펑크를 펑크 이상으로 끌어올렸던 직후의 무대였다. 함께 움직이던 펑크족들 수십 명이 마지막 곡에 함께 올라와 무대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영광의 날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연세대 측과 갈등(민원)으로 2001년을 마지막으로 노천극장을 떠난 이후 쌈싸페는 매년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을 떠돌아다니며 방랑자 생활을 해야 했다. 장소가 고정되지 않으면 운영도 안정되기 힘드니, 늘 시간은 지연되기 마련이었고 홍보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2006년 시작된 펜타포트 록페스티벌은 이제 한국 록페스티벌의 주인공이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이벤트였다. 그럼에도 쌈싸페는 ‘토종 페스티벌’의 대표주자로 매년 가을을 장식했다. 2007년 시작된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이 가을의 새로운 대표주자 자리에 올랐음에도, 어디선가에서 열리곤 했다. 2010년 쌈지가 최종 부도 처리되면서 쌈싸페는 ‘숨고르기’라는 타이틀을 달고 홍대 앞 브이홀에서 자그맣게 개최됐다. 마지막으로 쌈싸페가 열린 곳은 2015년 경기 남양주체육문화센터였다. 초창기 홍대 인디의 전성기에 날개를 달아준 이벤트가 그렇게 최후의 숨을 쉬었다. 이미 저문 해 아래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겠다며 다리를 움직인 어떤 페스티벌의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달이 빛나고 태양이 뜨겁던 세기말과 세기 초의 기운을 에너지 삼아 나아갈 수 있던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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