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51

2018.08.15

문화계 논쟁

“유홍준 책 ‘추사 김정희’ 위작투성이”

강우방 “표지에 쓴 ‘山崇海深’부터 위작 … 그림도 위작 많아”

  • 입력2018-08-14 11: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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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원로 미술사학자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이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글을 ‘주간동아’에 보내왔다. 올해 4월 출간된 유 교수의 ‘추사 김정희’가 추사의 작품이 아닌 글씨와 그림을 대거 추사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판단하긴 어렵다. 하지만 독자들이 베스트셀러 작가인 유 교수의 책을 읽은 뒤 균형감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아래 강 원장의 원고를 싣는다. 유 교수가 반론을 제시할 경우 ‘주간동아’에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유홍준 교수가 2002년 펴낸 ‘완당 평전’이 오류가 너무 많아 폐기하고 올해 ‘추사 김정희’를 새로 출간했다. 추사 평전을 펴내는 데 심혈을 기울여온 그의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걸출한 서예가 추사에 대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풀어쓴 점은 인정할 만하다.

    “표제작부터가 위작”

    ‘추사 김정희’ 표지글씨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현판 가로글씨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游天戱海)’ 중 첫 4자를 세로로 편집한 것이다. [자료 제공 · 창비]

    ‘추사 김정희’ 표지글씨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현판 가로글씨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游天戱海)’ 중 첫 4자를 세로로 편집한 것이다. [자료 제공 · 창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위작(僞作)을 대거 실어 진작(眞作)으로 둔갑시킨 점은 용납할 수 없다. 조형예술작품의 진위 여부는 한국 문화의 미래가 걸린 문제라 필자는 이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엄격하다. 위작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은 위서(僞書)로 역사를 엮는 것과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책을 본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표제작으로 쓰인 ‘산숭해심(山崇海深)’부터가 위작이기 때문이다. 추사 작품으로 공인된 적 없는 작품으로 글씨가 졸렬하기도 하거니와, 자획 구성이 엉성하고 뻣뻣하다. 

    ‘山’자는 획들이 휙휙 지나가 산의 웅자를 보여주지 못한다. ‘崇’자도 뫼 산(山)을 옆으로 눕힌 변형이 억지스럽고, 모든 획이 반대로 향해 서로 떨어져 흩어져 있다. ‘海’자는 획들이 힘없이 휙휙 날리고, ‘母’자도 구성미가 엉성하다. ‘深’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보고 있으면 불쾌하기까지 하다. 결구가 전혀 균형 잡혀 있지 않고 조잡하다. 



    책 87쪽에 이 글씨를 진품으로 본 전거가 나온다. 추사가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사숙한 옹방강(翁方綱)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고 별도의 종이에 써서 첨부했다고 알려진 4구 16자의 세로글씨 가운데 맨 마지막에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추사 연구의 대가인 일본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隣)의 사진자료라 하는데 아마도 이 글씨를 보고 진품이라 신뢰한 것 같다. 옹방강의 편지는 진품으로 보이나 그 뒤에 붙은 글씨가 추사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졸렬하다. 

    책 표지에 쓰인 세로글씨는 원래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游天戱海)’ 8자 현판글씨인데, 가로글씨를 세로글씨로 바꿔 표지글씨로 삼았다. 서예의 기본 원리를 모르고 사료만 쫓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추사의 글씨는 휙휙 지나치는 획이 없다. 이는 붓글씨의 기본이기도 하다. 그리고 원래 횡으로 쓴 위작인데, 책 표지에는 종으로 다시 편집했다. 이렇게 편집해서는 안 된다. 글씨의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횡으로 쓰면 흐름이 있는 법인데 종으로 바꾸면 그 흐름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 자체가 위작이니 이 역시 허망한 짓이 되고 말 터다. 


    소치연구회 소장의 ‘초의에게 주는 글’. 강우방 원장은 이 역시 위작으로 지목했다. [자료 제공 · 창비]

    소치연구회 소장의 ‘초의에게 주는 글’. 강우방 원장은 이 역시 위작으로 지목했다. [자료 제공 · 창비]

    첫 장에 등장하는 ‘초의에게 주는 글’ 역시 가는 획에 힘이 없고 미풍에도 흩날릴 것 같다. 단박에 위작이다. 편지는 해서나 행서로 쓰지, 예서로 쓰는 법이 없다. 옛 서체라도 율동감이 있어야 하는데 획들이 너무 가늘고 뻣뻣하다. 이를 두고 유 교수는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어지러운 듯하나 묘하게도 변함의 울림이 일어나 오히려 멋스럽다”고 썼다. 이런 억지 주장은 도처에 있다.

    유홍준의 안목은 믿을 만한가

    유홍준 교수의 ‘추사 김정희’ 표지.

    유홍준 교수의 ‘추사 김정희’ 표지.

    이 글씨에서 무엇을 느끼라는 것인가. 글씨의 요체는 생명감과 율동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다 없지 않은가. 도대체 편지를 예서로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획의 굵고 가늚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닌데, 이 글씨에는 그런 조화가 전혀 없다. 그런 점은 한 글자에서도 아무렇게나 이뤄지고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이런 부조화한 글씨는 처음 본다. 

    낙관에선 더욱 심하다. 파임이 날림이고, 마지막 글씨는 너무 가늘어 획이랄 것도 없다. 예서에선 나는 듯한 비백(飛白·속도감 있게 쓰다 보니 빗자루로 쓴 것처럼 듬성한 서체)의 효과를 절대 내지 않는데 이 글에는 속이 빈, 나는 획이 곳곳에 있다. 붓글씨를 올바로 배우면 금방 알 수 있다. 책장을 넘길수록 위작이 자주 눈에 띄어 점점 절망에 빠져들었다. 

    탄식하며 위작의 수를 대충 세어보니 절반이 넘는다. 어떻게 이리 필획이 서지 않고 지저분하며 구성이 허망한 글씨들을 칭찬할 수 있는가. 나쁜 글씨일수록 격찬하고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안목은 타고나는 것이다. 물론 노력으로 나아질 수 있지만, 한계가 있다. 더구나 유 교수는 타고나는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노력도 안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출간할 때마다 위작이 절반 이상 실려 책 전체가 위서가 돼버리고 미술사학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런데 스스로 안목이 있다고 자부해 ‘안목(眼目) :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이란 책까지 출간했다. 작품 감별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남다른 안목을 지녔다고 자랑하다니, 이는 자신을 속이고 대중을 속이는 짓이다. 그가 한국미술의 가치를 널리 알린 공로가 있다 하나 알리려면 올바로 알려야하지 않는가.

    ‘명선’의 아픔 벌써 잊었나

    ‘백석신군비’ 비문을 집자한 ‘명선’(왼쪽)과 간송미술관 소장의 ‘명선’. [자료 제공 · ‘차의 세계’]

    ‘백석신군비’ 비문을 집자한 ‘명선’(왼쪽)과 간송미술관 소장의 ‘명선’. [자료 제공 · ‘차의 세계’]

    14년 전 필자가 이미 위작임을 밝힌 ‘명선(茗禪)’ 역시 다시 실렸다. 이 작품을 포함해 간송미술관 소장의 추사 글씨 8점이 문화재청에 보물 지정을 신청했는데, ‘침계(梣溪)’ ‘대팽고회(大烹高會)’ ‘차호호공(且呼好共)’ 3점만 지정되고 5점은 탈락했다. 특히 ‘명선’과 ‘계산무진(谿山無盡)’은 진위 논란이 불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이것이 올해 2월 20일 일이었으며, 그 충격이 지금도 파장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데 4월 출간된 ‘추사 김정희’에 탈락한 작품이 모두 실렸다. 

    필자는 2004년 ‘명선’을 포함해 간송미술관 소장의 추사 글씨 70%가 위작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자 2006년 정민 한양대 교수가 추사 제자의 문집에 실린 걸명시(乞茗詩)에서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지어준 호가 명선이라는 내용을 근거로 추사 글씨가 맞다고 반박했다. 초의선사에게 명선이란 호를 지어줬다고 엉터리 글씨까지 진품이 될 수 있을까. 

    명선의 발문을 보면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筆意)를 따른다’고 돼 있다. 마침 ‘차의 세계’ 2007년 9월호가 ‘백석신군비’를 중국 허베이성 천불동 한비당(漢碑堂)에서 찾아냈다며 ‘명선’이 진품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해당 잡지는 비석 글씨 가운데 ‘茗’ ‘禪’ 두 글자를 집자(集字)해 추사 글씨와 비교하기 쉽게 보여줬다. 

    필자는 그 둘을 비교해봤다. 비석 글씨는 파임이 분명하고 획에 굴곡이 있으며 끝의 삐침이 뚜렷했다. 획의 처음과 끝이 중요한데, 간송미술관 소장의 ‘명선’은 모두 어중간하다. 획이 뻣뻣하고 생명감이 없으며 구성이 허해 짜임새가 없다. 두 글씨의 구(口)자만 비교해도 ‘백석신군비’에선 왼쪽 세로내림이 한결같이 곡선으로 휘어 있고 오른쪽 세로내림은 힘차면서 뚜렷하지만, ‘명선’에선 왼쪽 세로내림이 모두 직선이고 오른쪽 세로내림은 힘없이 희미하다. 

    추사는 유독 한(漢)나라 예서(隸書)를 좋아해 임서(臨書·원서를 옆에 두고 그대로 따라 쓰는 것)를 즐겨 했는데, 이렇게 전혀 다르게 써놓고 필의를 따랐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아일보’를 통해 두 서체 차이를 분명히 밝히면서 “붓글씨를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두 글씨의 차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데 정작 서체는 비교, 검토하지도 않고 백석신군비가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로 똑같다고 강변한다”고 답한 바 있다. 올해 2월 문화재청 심사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보물 지정에서 제외한 것이다.

    괴(怪)가 추사체의 완성이라고?

    ‘계산무진(谿山無盡)’은 2월 문화재청 보물 심사에서 ‘진위 논란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한 글씨다. [자료 제공 · 창비]

    ‘계산무진(谿山無盡)’은 2월 문화재청 보물 심사에서 ‘진위 논란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한 글씨다. [자료 제공 · 창비]

    유 교수는 추사 글씨가 ‘괴(怪)’하다는 평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괴를 추사체의 완성이라 했고, 추사도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추사 자신이 “보는 사람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것은 그들에게 달린 것이외다.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요”(‘완당전집’ 권5, ‘어떤 이에게’)라고 말한 것도 이를 부추긴 듯하다. 

    하지만 추사가 말한 괴하다는 개념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어떤 글씨를 놓고 괴하다고 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저 괴하다는 것만 믿고 되지도 못한 글씨들이 추사체로 둔갑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유 교수 저술의 문제는 그런 마구잡이 위작 양산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추사 김정희’에는 정체불명의 글씨는 물론, 그림까지 추사의 작품으로 둔갑해 대거 등장한다. 학계의 엄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작품들이 졸지에 추사의 대표작으로 둔갑해 대중에게 각인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추사 그림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欄圖)’ 두 점을 제외한 난초그림이나 산수화는 거의 다 위작이다. 추사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 우선 그림으로서 기본이 안 돼 있고 엉성하며 필획에 힘이 하나도 없다. 추사는 기운생동(氣韻生動) 하나로 모든 것을 파괴하고 희생시킨 서예가라 그림도 그 필획의 기운생동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유홍준 교수가 진품으로 본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강우방 원장은 추사 서화의 특징인 기운생동을 느낄 수 없다며 위작으로 판정했다. [자료 제공 · 창비]

    유홍준 교수가 진품으로 본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강우방 원장은 추사 서화의 특징인 기운생동을 느낄 수 없다며 위작으로 판정했다. [자료 제공 · 창비]

    예를 들어 책에서 추사의 유일한 인물도라고 소개한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를 보면 전체적으로 획이 날림이라 너무 가볍다. 나뭇잎의 표현이 난잡하고 억지가 많아 법도에 조금도 맞지 않는다. 나무 네 그루가 유난히 길게 뻗어 오르며 모두 평행을 이룬 것은 졸렬한 구도다. 바위들의 획이 너무 가볍고, 태점(胎占·동양화에서 산이나 바위, 땅의 묘사나 나무줄기에 난 이끼를 나타낼 때 쓰는 작은 점)도 졸렬해 그림 전체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선비도 키가 너무 커 허전하다. 


    유홍준 교수가 제주 유배 시절 추사가 살던 ‘귤중옥’을 그렸을 개연성이 높다고 본 ‘추수백운도(秋樹白雲圖)’. 강우방 원장은 구도에 질서가 없고 획이 날림이라 분명한 위작이라고 봤다. [자료 제공 · 창비]

    유홍준 교수가 제주 유배 시절 추사가 살던 ‘귤중옥’을 그렸을 개연성이 높다고 본 ‘추수백운도(秋樹白雲圖)’. 강우방 원장은 구도에 질서가 없고 획이 날림이라 분명한 위작이라고 봤다. [자료 제공 · 창비]

    문인화라는 것은 서화(書畵)의 세계에서 함께 가는 것이므로 이 위작 그림으로 위작 글씨가 더욱 늘어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짜임새 없는 그림을 추사가 그렸을 리 만무하다. 유 교수는 새로 발굴한 작품을 다수 추가했다고 하는데, 이 모두가 분명한 위작이다.

    ‘완당 바람’의 본뜻부터 알아야

    강우방 원장이 ‘세한도’와 더불어 진품으로 높게 평가한 ‘불이선란도(不二禪欄圖)’. [자료 제공 · 창비]

    강우방 원장이 ‘세한도’와 더불어 진품으로 높게 평가한 ‘불이선란도(不二禪欄圖)’. [자료 제공 · 창비]

    그의 명작 ‘불이선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전체가 파격적이다. 선(禪)은 혁명적 불교 사상으로, 그림도 그런 정신에 입각해 그렸을 것이 분명하다. 한문 글씨는 보통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데 이 작품의 한문은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또 글씨를 자세히 살펴보면 파격적으로 변형시켰다.  

    추사의 많은 위작이 모두 이 작품에서 비롯됐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안목이 부족한 사람의 눈에 이 작품이야말로 괴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자를 변형해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다. 그림이건 글씨건 법도를 지키지 않은 획이 없다. 괴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기세(氣勢)가 하늘을 찌르는 것이다. 자유의 세계요, 무애의 세계다. ‘유마경’에서 문수보살이 마지막으로 유마거사에게 “불이(不二)란 무엇인가” 묻자 유마거사는 침묵한다. 그때 문수보살은 그 침묵에 감탄해 “오직 유마거사만이 그 뜻을 아는구나”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이런 고도의 추상적 세계를 다룬 작품이 ‘불이선란도’다. 

    유 교수는 ‘완당 바람’조차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 ‘완당 바람’이란 말을 처음 쓴 분은 국제정치학자이자 회화사의 대가인 동주 이용희(1917~97) 선생이었다. 조선 말기 풍속화와 진경산수 같은 한국적 예술이 흥기하려 할 때, 완당의 출현으로 중국을 모델로 삼은 복고풍이 다시 이는 바람에 우리 민족예술의 불꽃을 꺼버렸다는 부정적 의미였다. 

    유 교수는 이를 잘못 이해해 완당 바람이 우리 문단과 예단에 불어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결국 추사로 인해 다시 중국을 사대하게 된 셈이니 불행한 일이었고, 동주 선생은 바로 그 현상을 말한 것이었다. 

    ‘완당 평전’은 학계의 뭇매를 맞았다. 필자 역시 그 책에 실린 추사 작품 절반 이상이 위작이라고 지적했다. 이후 절치부심(切齒腐心)해 16년 만에 낸 책이 바로 ‘추사 김정희’다. 유 교수는 명예회복을 위해 추사라는 산을 다시 넘었다고 하나, 새로운 위작이 추가됐으니 미안하지만 다시 산을 넘으려다 추락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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