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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가인의 구구절절

“네가 내 이름을 달리 불러줬을 때 나는 너의 꽃이 되고 싶었다”

히라야나기 아쓰코 감독의 ‘오 루시!’

“네가 내 이름을 달리 불러줬을 때 나는 너의 꽃이 되고 싶었다”

[사진제공 · ㈜엣나인필름]

[사진제공 · ㈜엣나인필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영어 실력이 정점을 찍었을 때는 20대 초반에 영어회화학원 강사를 짝사랑한 6개월 동안이었다. 언어의 한계에도 소통의 욕구가 폭발하며 저절로 동기부여가 됐고, 영어 대화가 즐거웠다. 상이한 언어를 쓰는 나는 때론 다른 사람이 된 느낌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짝사랑하던 강사가 학원을 떠났고 이후 학원을 그만두면서 내 영어 실력도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오 루시!’는 영어회화학원 강사에게 반한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다(이하 스포일러 포함). 세츠코(데라지마 시노부 분)는 40대 미혼으로 뚱한 성격의 직장인이다. 세츠코의 일상은 지루하고 외롭지만 좀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출근길 자신을 성추행한 남성이 철로로 투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도 회사에 출근해 무표정한 얼굴로 상사에게 차와 간식을 내준다. 

조카의 권유로 일대일 영어회화학원에 등록한 그는 잘생기고 친절한 강사 존(조시 하트넷 분)을 만난다. 존은 세츠코에게 루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두 사람은 강렬한 미국식 인사(허그)를 나눈다. 그렇게 루시가 된 세츠코는 그 한 차례 허그에 그만 존에게 마음을 뺏긴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세츠코의 변화다. 무표정한 세츠코는 루시로 불리며 금발 가발을 쓴 후 다른 사람처럼 표정이 변한다. 루시가 된 세츠코는 다소 무모한 일탈도 감행한다. 알고 보니 존은 학원을 소개해준 20대 조카의 남자친구였고, 조카와 존은 급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난다. 세츠코는 조카를 찾아 나선 언니를 따라 휴가를 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존과 재회하는 데 성공한다. 

일본에서 40여 년간 살아온 세츠코가 유난히 감정을 누르는 ‘모험을 싫어하는’ 여성이라면, 루시는 부담스러울 만치 욕망을 표출한다. 특히 세츠코가 미국에 간 후의 내용은 너도나도 욕망의 민낯을 까발려 민망할 정도다. 존이 10대 딸을 가진 유부남이며 이 때문에 조카와 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세츠코는 존에게 집착하고 관계는 진흙탕이 된다. 끝내 존에게 거부당하는 세츠코의 모습은 우습고도 슬프다. 

이 영화로 처음 장편 데뷔를 한 히라야나기 아쓰코 감독은 제작자 노트에서 고교 시절 일본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공립학교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면서 느꼈던 경험을 영화에 반영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식 나’와 ‘일본식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다 둘 중 어느 것도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 주제를 영화에서 탐구했다”고 했다. 

영화는 동시에 현대인이 가진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세츠코는 회사로 복귀하지만 원치 않는 부서에 발령이 나고 사표를 던진다. 하지만 그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이는 없다. 세츠코는 잡동사니가 가득 쌓인 골방에서 자살 기도를 하기에 이른다. 다행히도 결말은 잔인하지 않다. 포옹은 그를 미친 욕망의 불구덩이로 집어넣기도 했지만, 동시에 죽을 만큼의 외로움에서 구원하기도 한다. 데라지마 시노부 등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공감을 이끌어냈다. 비록 영화를 본 후 씁쓸함은 크지만.




주간동아 2018.07.11 1146호 (p74~74)

  • | 동아일보 기자 comedy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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