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5

2015.04.27

야구 ‘빈볼’의 두 얼굴

팀을 하나로 묶는 기폭제…시비 격해지면 경기 흐름 바꿔 패인될 수도

  • 이경호 스포츠동아 기자 rushlkh@naver.com

    입력2015-04-27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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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빈볼’의 두 얼굴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는 4월 12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의 맞대결 도중 빈볼 시비로 감정이 틀어졌다. 5회 롯데 황재균(오른쪽)이 이날 경기 두 번째로 몸에 맞는 공을 기록하는 순간 벤치클리어링이 빚어졌다.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타격을 ‘두려움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야구기자 레너드 코페트도 야구의 바이블로 꼽히는 명저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타격은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빠르고 단단한 공이 주는 공포와 맞서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멋들어지게 가죽 벨트를 차고 단정하게 모자를 쓰고 하는 야구는 언뜻 보면 매우 점잖은 스포츠로 보인다. 그러나 그 어떤 구기종목보다 격렬한 요소가 그라운드 곳곳에 숨어 있다. 먼저 공이 아닌 사람이 득점을 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난다. 자칫 선수 생명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서로를 보호하려 애쓴다. 특히 공과 배트는 상황에 따라 큰 흉기가 될 수 있다. 시속 150km로 날아오는 공에 얼굴이나 머리를 맞으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 있고, 심지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운동이다. 구기종목 가운데 야구는 어린이가 사용하는 공이 어른이 시용하는 공과 다른 유일한 종목이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강도가 약한 공을 쓴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다.

    야구의 불문율과 빈볼

    그러나 그렇게 위험한 공을 표적처럼 타자 몸을 향해 던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대부분 양 팀 선수가 모두 그라운드로 달려 나와 서로 격투를 벌이는 벤치클리어링으로 이어지는 ‘빈볼’이다. 빈볼에서 빈은 영어로 콩(bean), 즉 사람 머리를 뜻하는 은어로 빈볼은 투수가 타자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머리를 향해 빈볼을 던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베테랑 투수일수록 타자에게 가장 덜 치명적인 엉덩이나 허벅지로 빈볼을 던진다.

    4월 12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한화와 롯데 선수들이 정면 출동했다. 이날 롯데 황재균은 두 차례나 몸에 공을 맞았다. 두 번째 사구는 연속해서 몸 쪽으로 공이 날아온 뒤 3구째 나왔다. 한화 투수 이동걸은 포수 사인을 본 후 망설이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사실 양 팀 주장 한화 김태균과 롯데 최준석은 이틀 전 경기가 끝난 후 그라운드 한가운데서 만나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동기생인 두 주장은 편안하게 말을 나누다 조금은 거친 표정으로 돌아섰다. 점수가 얼마까지 벌어졌을 때 도루를 자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알려졌다. 황재균은 4월 12일 7점 차로 앞선 상황에서 도루를 했다. 그러나 경기 초반이었다. 10점 차도 뒤집을 수 있는 스포츠가 야구이기에 과연 점수 차가 어느 정도일 때 도루를 하는 것이 상대를 자극하는 행위인지에 대한 이해가 충돌했다고 해석된다.

    야구는 불문율로 가득한 스포츠다. 경기 자체가 시간 제약이 없기 때문에 불문율은 더 다양해졌다. 아마추어 야구처럼 콜드게임이 없어 한쪽이 일방적으로 점수를 올릴 경우 상대편은 처참하게 끌려간다. 그래서 점수 차가 매우 크게 나면 지고 있는 쪽에서 빈볼을 던져 ‘우리가 졌다. 그만 점수를 올리자’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도루 역시 같은 의미다. 사인을 훔쳤을 때, 홈런을 치고 과도한 세리머니로 상대를 자극했을 때도 빈볼이 날아오곤 한다.

    야구 ‘빈볼’의 두 얼굴

    4월 14일 kt 위즈와 두산 베어스 경기가 열린 수원kt위즈파크 관객석에 팬들이 가득 찬 모습.

    롯데와 한화의 벤치클리어링은 40대 사령탑 이종운 롯데 감독이 70대 노장인 김성근 한화 감독에게 “야구로 승부하자”는 직설적인 발언을 날려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 구단의 한 코치는 “현역 시절 2루에 나가 타자에게 포수 사인을 알려줬다. 곧장 상대 팀 눈빛이 험악해지더라. ‘다음 타석에 나가면 하나 날아오겠구나’ 했는데 예상대로였다. 투수가 한참 후배라 초구에 맞으면 그냥 조금 노려보다 1루로 가려고 했는데 이 바보가 그걸 못 맞혀서 3번이나 몸 쪽으로 가까이 붙였다. 어쩔 수 없이 마운드로 뛰어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더는 사인을 훔치지 말라’는 경고 의미로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의도가 빤히 드러남과 동시에 팀 전체의 사기를 생각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빈볼은 큰 위험성을 갖고 있지만 그라운드에서 양 팀 선수들이 소통하는 마지막 카드다. 그러나 주고받는 과정에서 서로 납득이 안 되거나 정도가 심할 경우 그라운드에서 큰 충돌로 이어진다. 벤치클리어링에 대해 일부 팬은 ‘야구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몸싸움을 하는 모습이 눈꼴사납다’고 싫어하지만 반대로 이색적인 볼거리로 여기는 팬도 많다. 팀에 주는 긍정적 효과도 예상보다 크다. 메이저리그는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면 그다음 날 선발투수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뛰어나와 격투를 벌여야 한다. 선후배 관계로 얽힌 국내 프로야구의 경우 말싸움이나 드잡이 정도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미국에선 종종 감독까지 참전하는 격한 격투로 이어진다.

    한국 프로야구의 경우도 벤치클리어링 강도가 크면 클수록 팀의 화학적 결합이 강해진다. 한 선수는 “한판 벌이고 더그아웃에 돌아올 때면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뿌듯함, 그리고 뜨거운 동료애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투수의 경우 ‘내가 빈볼을 던져도 동료들이 나를 상대 선수들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흥분과 냉정 사이

    롯데와 한화의 이번 설전은 누가 빈볼을 지시했는지가 핵심이었다. 일부에서 김성근 감독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김 감독은 “감독을 하면서 빈볼을 던지라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감독이 직접 빈볼을 지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고참 선수가 결의하거나 코치가 암묵적으로 허락해 이뤄진다. 특히 팀원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야수들이 격분했는데 투수가 빈볼로 이를 보복하지 않아 팀 내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누가 빈볼을 지시했는지는 외부에 절대 흘러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빈볼을 던졌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없다. 빈볼의 진실, 빈볼의 인정 모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불문율 가운데 하나다.

    빈볼과 벤치클리어링은 팀을 하나로 묶기도 하지만, 도를 넘어서는 순간 큰 어려움과 마주하게 된다. 2008년 SK 윤길현은 KIA 최경환에게 빈볼성 투구를 던진 뒤 욕설을 해 한동안 팬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2007년 두산 김동주는 SK와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공에 맞은 뒤 자제력을 잃고 흥분했고, 이후 팀 분위기가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하면서 내리 4연패에 빠져 우승컵을 내줬다. 평소 깨끗한 매너로 유명한 삼성 이승엽은 2003년 LG와 빈볼 시비에 이은 벤치클리어링에서 투수 서승화와 격투를 벌였다. 이승엽은 다음 맞대결에서 서승화에게 3점 홈런을 날리며 실력으로 깨끗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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