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9

2015.03.16

과거 청산해야 “국제사회 일원”

7년 만에 방일, 메르켈의 작심 발언…반성 촉구 외면한 일본 언론

  • 박형준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입력2015-03-16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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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청산해야 “국제사회 일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운데)가 3월 9일 오전 일본 도쿄 주오구 아사히신문사 5층 편집국을 방문해 이날 발행된 독일 특집 지면을 살펴보며 간부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다.

    키 165cm, 나이 60세. 하늘색 상의를 입은 여성이 검정 메르세데스 벤츠 차량에서 내렸다. 까치발로 그의 도착을 기다리던 일본 시민들과 ‘아사히신문’ 임직원들은 일제히 “와~” 하고 함성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기자는 카메라를 꺼내 들었으나 찍을 수 없었다. 테러 우려가 있어 사진 촬영을 금지했다. ‘유럽의 여왕’ 방문을 박수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7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그는 3월 9일 오전 도쿄 주오구에 있는 아사히신문 본사를 방문했다. 1박 2일이란 짧은 일정 속에 왜 굳이 신문사까지 방문했을까. 그것도 5층 편집국까지 올라가 기자들과 환담을 나눌 만큼 정성을 쏟으면서 말이다.

    아사히신문 방문에 담긴 메시지

    메르켈 총리의 이번 방일은 올해 G7(선진 7개국) 정상회의 의장국인 독일을 대표해 참가국들을 순회하는 것이었다.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우크라이나 사태 대처방안 등이 독일-일본 간 공식 의제였다.

    독일은 또한 중국에 치우쳤던 아시아 외교에서 일본에도 무게감을 실어 균형을 잡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 취임 후 지금까지 ‘셔틀외교’ 형식으로 중국을 7차례 방문했다. 일본은 이번이 3번째다. 중국은 독일의 아시아 최대 무역 상대국이고, 독일 역시 중국의 유럽 최대 무역 상대국이다. 하지만 최근 중·일 갈등이 불거지면서 아시아 외교 다변화 필요성이 제기되자 이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일본을 방문한 것이다.



    언론의 최대 관심사는 메르켈 총리가 이번 방일 기간 ‘과거사 반성’이란 화두를 던질지 여부였다. 올해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인 데다 독일과 일본 모두 패전국이다. 전후 독일은 주변국에 적극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해왔다. 메르켈 총리 자신도 “독일이 시작한 전쟁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했다. 희생자들 앞에 무릎 꿇어 사죄한다”(200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70주년 기념식에서)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과거사를 반성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외치며 정반대 길을 걷고 있다.

    일본 매체들은 예외 없이 사전에 메르켈 총리의 인터뷰와 강연을 요청했는데, 독일 정부는 아사히신문을 파트너 미디어로 택했다. 아사히신문의 한 간부는 “메르켈 총리가 우리를 선택한 것 자체가 과거사 반성 촉구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아사히신문은 일관되게 과거사를 부정하는 아베 신조 총리를 비판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요시다 세이지(제2차 세계대전 때 제주에서 다수의 여성을 강제로 연행해 군 위안부로 삼았다고 증언한 인물) 관련 기사를 취소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우익집단이 집요하게 ‘날조 신문’이라며 아사히신문을 공격해 불매운동을 벌였고 테러 협박까지 했다. 메르켈 총리는 아사히신문 방문을 통해 아베 총리와 일본 우익에게 ‘무언(無言)의 경고장’을 던진 셈이다.

    과거 청산해야 “국제사회 일원”

    3월 9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끝내고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회견에서 메르켈 총리는 “과거 총괄(정리)은 화해를 위한 전제”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 당국자와 정치 전문가는 대부분 메르켈 총리가 과거사 문제를 아예 언급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7년 만의 방문인 데다 아시아 균형 외교가 목적이라면 아베 총리와 얼굴을 붉혀선 곤란하기 때문.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방문 첫날인 3월 9일 아사히신문사 내에 있는 ‘하마리큐 아사히홀’에서 강연하며 “세계는 독일 때문에 나치스 시대라는 비참한 상황을 겪었지만 이후 국제사회는 독일을 받아들였다. 이는 독일이 과거와 제대로 마주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는 “과거 총괄(정리)은 (전쟁 가해국과 피해국 사이) 화해를 위한 전제”라고 말했다. 또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과오를 정리할 수 있었기에 훗날 유럽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며 “독일에서는 나치가 저지른 무서운 죄악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도 덧붙였다. ‘일본’이라는 단어는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칼끝이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급기야 메르켈 총리는 3월 10일 제1야당인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 대표와 만나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까지 꺼냈다. 그는 “동아시아 상황을 생각할 때 한일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이틀 연속 일본에 대해 과거사 청산을 촉구한 것이다.

    아베 총리의 화답은?

    일본 미디어의 독일 특파원으로 이번에 메르켈 총리를 따라 일본에 취재를 온 A기자는 “깜짝 놀랐다. 메르켈 총리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과거사 문제를 꺼낼지는 몰랐다. 일본 정부를 우회적으로 압박했다”고 말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온라인은 3월 9일 ‘도쿄의 메르켈, 정중하게 일침 가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우향우’ 성향을 바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은 3월 10일 기자들에게 “일본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상황에서 전후 처리에 임했는지, 어느 국가가 주변국인지 등의 경위가 달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독일은 독일, 일본은 일본이란 뉘앙스로 아베 총리의 마음을 대변했을 것이다.

    일본 언론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했다. 메르켈 총리의 발언을 상세히 보도한 곳은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 등 일부에 불과했다. ‘요미우리신문’과 NHK 등 대부분 언론은 독일과 일본의 협력 사항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도할 뿐 메르켈 총리의 과거사 발언을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작게 취급했다.

    또 한 가지 눈길이 가는 대목은 메르켈 총리의 방일 기간 공교롭게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1월 타계)이 여러 차례 언급됐다는 점이다. 메르켈 총리가 3월 9일 아사히신문사 강연에서 언급했고, 와타나베 마사타카 아사히신문 사장도 강연 인사말에서 그를 인용했다. 심지어 같은 날 메르켈 총리를 만난 일왕도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에 대해 애도를 표시했다.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1985년 서독 의회에서 “과거에 대해 눈을 감은 자는 현재도 보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메르켈 총리뿐 아니라 일본 사회 지식인과 일왕이 우경화된 아베 정권에 한목소리로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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