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2

2015.01.19

폭탄처리반은 왜 자폭했나

‘정윤회 문건 유출’ ‘항명’ 파문의 진앙지 민정수석실 탐구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5-01-19 0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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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탄처리반은 왜 자폭했나

    이재만 대통령총무비서관(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1월 9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청와대 비선 개입과 문건 유출 의혹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국회에 출석하라”는 대통령비서실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사의 표명’으로 맞받아친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의 항명을 두고 여러 얘기가 흘러나온다. 일차적으로 김영한 전 수석의 독특한 캐릭터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검찰 주변에서 김 전 수석은 박근혜 대통령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원칙과 소신’이 뚜렷한 강직한 인사로 손꼽힌다. 그는 대구지방검찰청장 시절 자신을 찾아온 고교 선배를 1시간 가까이 서 있게 했을 만큼 공적 영역에서는 비타협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명박 정권 말기에 실시된 고등검사장 승진 인사 때 김 전 수석이 탈락하자 “꼿꼿함이 발목을 잡았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

    “대통령 대면보고 못 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왕따설’이 거론된다. 지난해 6월 민정수석비서관에 임명된 김 전 수석은 7개월 가까이 수석비서관으로 재임하면서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수석은 사석에서 “민정수석을 7개월간 하면서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며 “‘정윤회 문건’ 사건 조사에서도 완전히 배제됐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그와 가까운 인사들은 “김 전 수석이 문건 조사에서 배제된 상황을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 결국 (민정수석을) 그만두기로 한 것 같다”며 이 같은 분위기를 전했다. 김 전 수석은 사의를 표명하면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정윤회 문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월 12일자 보도)

    대면보고뿐 아니라 업무에서도 상당 부분 배제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비서관과 비서실장 간 직보체제로 민정수석실 업무가 처리되면서 수석의 입지가 크게 위축됐을 수 있다는 것.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실 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일반적으로 행정관→비서관→수석비서관→비서실장→대통령이라는 통상적인 보고 절차를 따르지만, 급박하고 중요한 업무의 경우 현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비서관이 수석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서실장에게 직접 보고하거나 때로는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법무부 출신 한 변호사는 “민정수석실은 기본적으로 검찰과의 업무 연락이 중요한데, 김영한 전 수석의 성향상 청와대 뜻을 검찰에 전달하기 꺼려했을 수 있고, 수석이 껄끄러워하는 상황에서 비서관-비서실장 라인이 더 활발히 가동됐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 전 수석이 ‘정윤회 문건’ 관련 국회 운영위원회 출석을 거부한 데 대해 ‘자신이 관여하지 않아 모르는 일을 해명해야 하는 상황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박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인사도 “김영한 전 수석은 ‘정윤회 문건’ 파동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인 지난해 6월 민정수석에 임명됐다”며 “저간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회에 불려나가 답변하는 것에 대해 부담이 컸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민정수석실의 기능은 국민 여론과 민심 동향을 파악하고, 법률적 측면에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보좌하며, 공직과 사회기강, 민원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민정수석실은 민정수석비서관 아래 민정비서관, 공직기강비서관, 법무비서관, 민원비서관을 두고 있다.

    민정수석실의 업무 가운데 주요 기능이 공직 후보자에 대한 인사 검증과 공직기강 등 사정 기능이다.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문제가 있는 인물을 걸러내고, 공직과 일반 사회의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를 적발하는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민정수석실을 일컬어 현대판 ‘사헌부’라 하기도 한다. 사헌부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시정(時政)을 논의하고,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기강과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일을 없애주는 등 감찰행정을 맡은 기관이었다. 특히 현재의 공직후보자 인사 검증처럼 임금이 결정해 임명한 관원의 자격을 심사한 뒤 이에 대한 동의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다.

    양날의 칼과 마주 서야 할 운명

    폭탄처리반은 왜 자폭했나

    2014년 12월 1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한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업무 특성상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것 같지만 민정수석실은 늘 양날의 칼과 마주 서 있다. 고유 업무에 충실하다 보면 특정 인사를 염두에 둔 정권 실력자들과 부딪히기 쉽고, 실세 눈치를 보면 국민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기 때문.

    “청와대 인사위원회 풍경을 생각해보면 민정수석실 업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해하기 쉽다. 공직자 인선을 위한 인사위원회가 열리면 (인사위원회) 정규 멤버가 아닌 몇 사람이 뒷줄에 앉아 참관한다. 검증을 담당하는 민정수석실은 기본적으로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데 뒷줄에 앉아 있던 ‘실세’가 한마디 거들면 논의 방향이 180도 바뀌기도 한다. ‘몇몇 흠은 있지만, 결정적 하자는 아니다’라는 쪽으로 결론이 유도되는 식이다.”(청와대 전직 비서관)

    인사위원회에 배석한 대통령 측근이 논의 방향에 영향을 끼쳐 단행된 인사가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 모든 책임은 인사 검증을 담당한 민정수석실 몫으로 돌아온다. 인사위원회에서 한마디 거든 실세는 인사위원회 정규 멤버가 아니기 때문에 인사 검증 실패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박근혜 정부 들어 2년 만에 3명의 민정수석이 불명예 퇴진했다. 초대 곽상도 전 수석은 잇따른 인사 검증 실패로, 후임으로 임명된 홍경식 전 수석도 총리 후보자의 연쇄 낙마 책임을 지고 김영한 전 수석으로 교체됐다.

    노태우 정부 이후 이명박 정부 때까지 민정수석은 김영삼 대통령 재임 때를 제외하고 평균 재임 기간이 1년 정도에 불과했다. 민정수석 단명사(短命史)는 민정수석실의 업무 특성과 무관치 않다. 대통령 친인척 관리와 공직기강 등 ‘좋은 일’보다 ‘굳은 일’을 더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친구’보다 ‘적’이 만들어지기 쉽다.

    이명박 정부 시절 민정수석실에서 근무한 한 인사는 “청와대 직원과 관련한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다 ‘왜 내 뒷조사를 하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며 “십중팔구 근거 없는 소문이었지만, 사소한 첩보라 하더라도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민정수석실에 근무한 한 인사는 “민정수석실은 ‘폭탄처리반’ 같은 곳”이라고 업무 특성을 규정했다.

    민정수석실=폭탄처리반

    “경찰에 ‘폭탄으로 의심된다’는 신고가 접수되면 일단 폭탄처리반이 출동하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민정수석실은 대통령 친인척이나 측근, 청와대 직원과 관련한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무조건 현장에 나가 조사를 진행한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폭탄을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민간에서 ‘폭탄 의심 신고’ 대부분이 실제 폭탄이 아닌 것처럼, 청와대 관련 첩보도 근거 없는 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민정수석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사실 확인을 거쳐 ‘사실이 아닌 것’까지 확인해 보고해야 한다.”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민정수석실이 제 기능을 발휘해야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역대 대통령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점은 공통적으로 ‘친인척 또는 측근 비리’가 불거진 이후였다. 대통령 주변에서 문제가 생기면 크고 작음을 떠나 국정운영에 큰 부담을 준다. 결국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될 악재를 미연에 방지하는 민정수석실이 제몫을 다해야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폭탄처리반’ 노릇을 해야 할 민정수석실이 ‘정윤회 문건 유출’과 ‘항명’ 파동으로 오히려 ‘폭탄’이 돼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부담을 주고 있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차기 민정수석은 누구?

    사법연수원 13, 14기 검사장급 이상 출신 유력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이 ‘항명’ 파동으로 자리를 비운 후 법조계에선 벌써부터 차기 민정수석이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하마평이 한창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정권의 민정수석 자리는 대부분 검찰 출신 인사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민정수석실의 경우 공직자에 대한 감찰과 검증 업무를 상시적으로 진행하는 업무 특성상 검찰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검찰 내부에 깊이 뿌리박은 상명하복 문화와 검사 동일체 원칙도 민정수석 자리에 비(非)검찰 출신 인사가 배치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쉽게 말해 비검찰 출신이 그 자리에 가면 검찰에 대한 ‘영(令)’이 서지 않는다는 얘기다. 역대 정권에서 눈에 띄는 비검찰 출신 민정수석은 모두 참여정부 시절 배출됐다. 당시 검찰은 노무현 정권과 대놓고 불협화음을 빚었다.

    이런 이유로 법조계에선 차기 민정수석도 검찰 출신 변호사나 정치인 가운데서 배출될 확률을 높게 점친다. 적어도 김진태(63) 검찰총장과 김 전 수석의 사법연수원 14기 동기급 이상이 낙점될 공산이 크다는 것. 일부에선 황교안(58) 법무부 장관과 동기인 13기가 낙점될 확률이 더 크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김 전 수석의 민정수석실 내부와 검찰 장악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법조계 인사들은 더더욱 13기 낙점설에 무게를 싣는다.

    현재 법조계에서 하마평에 오른 13기 인사는 이명박 정권에서 대검찰청 차장을 지낸 박용석(60)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와 역시 2009년 대검찰청 차장 검사로 젊은 나이에 잠시 총장 직무대행을 하기도 했던 차동민(56)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등이 있지만 이명박 정권의 인물이라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박용석 변호사는 김 전 수석의 고교 선배이기도 하다. 14기 인사로는 노환균 전 법무연수원장이 거론되지만 그 역시 이명박 정권 당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장과 대구고등검찰청장을 거쳤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대검찰청 공안부장을 역임한 신종대(55) 전 대구지방검찰청장의 이름도 회자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15기 검찰 출신 인물들도 회자되고 있다. 이명박 정권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역임한 김홍일(59) 전 부산고등검찰청장과 채동욱 전 총장 퇴임 이후 잠시 총장 직무대행을 했던 길태기(57) 전 서울고등검찰청장, 호남 출신인 소병철(57) 전 법무연수원장이 그들로, 모두 2013년 9월 채 전 총장 퇴임 후 하나같이 신임 총장 물망에 올랐던 인물들이다.

    이 밖에도 17기인 최재경 전 인천지방검찰청장과 19기 현직 검사장급 인사도 거론됐지만 최 전 지검장은 세월호 부실 수사 책임을 지고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19기 현직 검사장급 인물은 우병우 민정비서관과 동기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아주 낮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폭탄처리반은 왜 자폭했나

    최근 법조계에서 차기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회자되는 인물들. 박용석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 차동민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길태기 전 서울고등검찰청장(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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