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7

2014.12.15

눈과 바람이 쓱쓱 황홀하구나, ‘雪景 산수화’

  • 양영훈 여행작가 travelmaker@naver.com

    입력2014-12-15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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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겨울엔 유난히 눈이 잦고 많이 내린다. 자고 일어나면 눈 세상이 펼쳐져 있다. 도심 속에서의 눈은 교통지옥과 짜증의 대명사일 뿐. 하지만 대자연 속에서 맞는 눈은 한 해 동안 찌든 마음을 정화하는 묘약이다. 굽이굽이 펼쳐진 산도 좋고 들도 멋지다. 바다와 바닷가에 내리는 눈은 자신을 성찰하는 사색의 시간을 안겨준다. 기름진 음식과 술을 먹으며 한 해를 정리하기보다 국내외 ‘눈꽃 왕국’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이국적 풍광을 즐기기 좋은 국내 산과 해안, 섬, 그리고 스위스 알프스 지역 등 4곳을 소개한다.

    ■ 강원도 정선 만항재

    만항재는 백두대간의 굵은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고개다. 함백산(1573m)과 태백산(1567m) 사이에 위치한다. 고갯마루의 해발고도는 1330m나 된다. 이곳을 지나는 414번 지방도는 우리나라에서 차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도로다. 하지만 정선 쪽에서 오를 때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해 사시사철 편안하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겨울철에 큰 눈이 내려도 의외로 신속하게 제설작업이 진행되는 덕에 길이 끊기는 경우는 별로 없다.

    만항재 정상 일대에는 낙엽송 조림지가 있다. 1968년 화전정리법이 공포되기 전 화전민이 불을 놓아 만든 경작지에 속성수인 낙엽송(일본잎갈나무)을 심어 조성된 숲이다. 쭉쭉 뻗은 낙엽송 숲은 환상적인 산상 화원을 이루기도 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얼레지, 한계령풀, 복수초, 바람꽃, 동자꽃, 이질풀, 산꼬리풀, 말나리, 마타리, 산국, 구절초 등 각종 야생화가 철따라 피고 진다. 겨울철에는 형형색색의 야생화밭 못지않게 화사한 순백의 눈꽃 세상이 펼쳐진다.

    눈과 바람이 쓱쓱 황홀하구나, ‘雪景 산수화’

    만항재 정상 부근의 낙엽송 숲이 눈꽃 세상으로 탈바꿈했다.

    눈이 내리지 않은 날에도 만항재 낙엽송 숲은 아침마다 순백으로 채색된다. 해발고도가 워낙 높다 보니 밤새도록 고갯마루에 걸린 구름 속 수증기가 얼어붙어 나뭇가지마다 하얀 상고대를 피워 올리기 때문이다. 상고대는 해가 뜨거나 기온이 올라가면 금세 녹아버린다. 기나긴 겨울밤에 느닷없이 꿨던 일장춘몽처럼 허무하다. 그래서 상고대나 눈꽃을 오래도록 느긋하게 감상하려고 아예 만항재 설원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묵는 사람들도 있다. 칼날처럼 섬뜩하고 서늘한 냉기가 이따금씩 온몸을 전율케 하지만, 만항재의 청징한 기운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 때마다 심신이 날아갈 듯 가뿐해진다.



    만항재에서 백두대간 산등성이 눈길을 따라 느긋하게 1시간 30분쯤 걸으면 함백산 정상에 올라선다. 함백산 정상은 천혜 전망대다. 오르기가 쉽고 코스 길이도 짧은 것에 비하면 과분하리만큼 멋진 조망을 누릴 수 있다. 정선, 태백, 영월 일대 고산준령이 파노라마처럼 시야를 가득 채운다. 민족 영산인 태백산조차 육중한 몸을 모두 드러내 보일 정도로 조망이 시원스럽다. 함백산 정상 아래 산비탈에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 군락지도 있다. 이미 신령이나 다름없는 주목의 기품과 기상이 눈 속에서 더욱 돋보인다.

    만항재를 오가는 길에는 함백산 북동쪽 기슭에 자리한 정암사(033-591-2469)를 지나칠 수가 없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를 품은 곳이기도 하다. 적멸보궁 뒤쪽 가파른 산비탈에 세워진 정암사 수마노탑(보물 제410호)에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고 한다. 높이 9m 7층 모전석탑인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갖고 온 마노석으로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한 수마노탑 앞에 서면, 정암사 주변의 비좁은 골짜기와 육중한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자락마다 눈에 덮인 전나무 고목들이 첨탑처럼 솟아 있다. 늠름하고 당당한 그 자태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고 기분도 절로 좋아지는 듯하다.

    눈과 바람이 쓱쓱 황홀하구나, ‘雪景 산수화’

    만항재 낙엽송 숲에서 스노캠핑을 즐기는 사람들. 나뭇가지마다 상고대가 만발했다(왼쪽). 수마노탑 앞에서 바라본 정암사의 설경. 눈 쌓인 전나무 고목들이 첨탑처럼 우뚝하다.

    여행정보

    ● 숙식

    눈과 바람이 쓱쓱 황홀하구나, ‘雪景 산수화’

    ‘시골막국수’의 비빔막국수.

    만항재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숙박업소는 영월 쪽 만항재 고갯길에 위치한 장산콘도(033-378-5550)다. 만항재 정상에서 10여km 거리인 고한읍내에도 스타월드모텔(033-592-0313), 루비모텔(033-591-2729) 등 숙박업소가 많다. 스키장, 콘도, 카지노 등이 있는 하이원리조트(1588-7789)도 12km쯤 떨어져 있다.

    ● 맛집

    만항재 정상에서 약 2km 거리인 만항마을에는 토종닭백숙, 닭볶음탕 등을 내놓는 닭요리 전문점이 몰려 있다. 할매닭집(033-591-3136), 밥상머리(033-591-2030), 산골닭집(033-591-5007) 등이 추천할 만하다. 만항재 가는 길에 지나는 정선군 남면 무릉리의 시골막국수(033-591-9044)는 정선 제일의 막국숫집으로 평가된다. 차가운 겨울에도 찾는 이의 발길이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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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변산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내소사의 겨울 풍경.

    ■ 호남 서해안

    언젠가부터 호남 서해안 지역이 눈 구경하기에 좋은 겨울 여행지로 새롭게 부상했다. 전통적인 겨울 여행지인 강원도 못지않게 적설량이 풍부한 덕택이다. 어떤 해에는 강원도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내리기도 한다. 특히 ‘눈폭탄’에 가까운 폭설이 잦다.

    부안, 고창, 정읍, 영광 등 호남 서해안 지역에 폭설이 잦은 이유는 지형적 요인 때문이다. 시베리아 고기압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발생한 북서풍이 서해를 통과하게 된다. 이때 따뜻한 서해와 차가운 북서풍의 온도 차이에 의해 강한 눈구름이 만들어진다. 북서풍을 타고 내륙으로 향하던 눈구름은 노령산맥에 가로막혀 호남 서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눈을 뿌리게 된다.

    호남 서해안에서도 특히 적설량이 많은 곳은 부안 변산반도다. 변산반도 최고봉인 의상봉(508m)과 서해의 직선거리는 5km에 불과하다. 서해를 질러온 눈구름이 서해안에 상륙하자마자 곧바로 눈을 쏟아버릴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눈 구경을 하러 변산반도를 찾았다면 내소사(변산반도국립공원 내소분소 063-583-2443)를 먼저 들러야 한다. 운치 좋은 숲길과 고색창연한 절집, 그리고 절집을 에워싼 내변산 암봉 등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보다 더 아름답다.

    옴폭한 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변산반도와 마주보는 선운산(도립공원관리소 063-563-3450)도 폭설이 잦다. 내소사에서 100리(40km)쯤 떨어져 있다. 나직한 선운산 자락과 울창한 동백 숲에 둘러싸인 선운사도 설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고찰이다. 사실 선운사는 사시사철, 일 년 열두 달 중 어느 때 찾아가도 만족스러울 만한 곳이다.

    선운사에서 장사송, 도솔암, 마애불, 용문굴, 낙조대 등을 거쳐 천마봉에 이르는 왕복 7.4km의 선운산 등산 코스는 겨울철에도 비교적 안전하고 수월하게 눈꽃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시간이나 체력, 장비 등이 부족해 천마봉까지 오르내리기가 부담스럽다면 선운사에서 왕복 5.4km 거리인 도솔암 마애불까지만 다녀와도 선운산 설경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다.

    눈과 바람이 쓱쓱 황홀하구나, ‘雪景 산수화’

    내장산 케이블카의 상부 승강장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부안 변산반도와 고창 선운산을 1박 2일 일정으로 묶으면 여유롭게 설경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두 곳 모두 대중교통편이 잘 갖춰져 있으므로 굳이 승용차를 이용할 필요도 없다. 기차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부안 변산반도 대신 정읍 내장산을 넣어 1박 2일 여정으로 계획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정읍역에서 정차하는 호남선 KTX를 이용하면 한결 편안하고 안전하게 설경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내장산(내장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 063-538-7874)은 우리나라 제일의 단풍 명산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내장산은 단풍보다 설경이 더 낫다”고 말하는 이가 적잖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처럼 큰 산은 아니지만, 산세가 유려하고 아기자기한 내장산은 여러 명산의 절경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처럼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남녀노소 누구나 케이블카(063-538-8120)를 타고 산중턱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여행정보

    ● 숙식

    부안 내소사 입구에 모텔여정(063-583-5767), 정든민박(063-582-7574) 등이 있다. 12km 거리에 있는 모항마을에 해나루가족호텔(063-580-0700), 모항레저타운(063-584-8867) 등의 숙박업소가 많다. 고창 선운사 입구에도 산사의 아침(063-562-6868), 둥지펜션(010-3671-5450), 선운산유스호스텔(063-561-3333) 등이 있다.

    눈과 바람이 쓱쓱 황홀하구나, ‘雪景 산수화’

    선운사 입구 ‘신덕식당’의 풍천장어구이정식.

    ● 맛집

    내소사에서 멀지 않은 곰소항 부근의 칠산꽃게장(063-581-3470)은 오랜 단골이 많은 꽃게장 전문점이다. 선운사 입구에는 신덕식당(063-562-1533), 연기식당(063-561-3815), 풍년만가(063-563-3420) 등의 장어요리 전문점이 즐비하다. 내장산 상가지구에서는 신세계회관(산채정식/ 063-538-3515), 명인관(산채정식/ 063-538-8981) 등이 권할 만한 맛집이다.

    ■ 울릉도 성인봉

    눈과 바람이 쓱쓱 황홀하구나, ‘雪景 산수화’

    울릉도 성인봉 원시림 지대의 나뭇가지마다 얼어붙은 눈꽃이 맑은 종소리를 쏟아낸다.

    울릉도는 우리나라에서 강설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전체 강수량의 40%가량을 차지할 정도다. 울릉도 한복판에 우뚝한 성인봉(984m) 역시 설경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성인봉 눈꽃 산행은 나리분지에서 시작해 도동 쪽으로 하산하는 게 좋다.

    울릉도에서 가장 넓은 평지인 나리분지는 겨울철 내내 새하얀 설국(雪國)으로 변신한다. 그곳에서 성인봉 정상까지 거리는 약 4.2km이다. 그중 나리분지에서 알봉분지를 거쳐 신령수까지 이어지는 2km쯤의 구간은 비교적 평탄하다. 너도밤나무와 곰솔(해송)이 뒤섞인 천연림 속으로 조붓한 숲길이 이어진다. 알봉분지에는 울릉도의 전통 투막집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그 집 앞의 드넓은 억새밭은 새하얀 설원으로 탈바꿈했다.

    투막집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신령수 샘터에 당도한다. 한겨울에도 쉼 없이 흘러내리는 신령수의 물맛이 일품이다. 깨끗하고 시원한 샘물 한 모금이 탄산수보다 더 짜릿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신령수에서부터는 울릉 성인봉 원시림(천연기념물 제189호) 지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등산로의 경사도 눈에 띄게 가팔라지고, 켜켜이 쌓인 눈은 더 깊어진다. 이윽고 가파른 나무계단길에 들어선다. 폭설에 파묻힌 계단은 기둥 윗부분만 간신히 드러나 보인다. 그래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나무계단이 끝나고 산등성이에 올라선다. ‘뺍재이등대’라 부르는 이 지점부터는 한결 완만해진 산등성이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쌓인 눈은 더 깊고 풍성하다. 산등성이길에서는 밑동이 몇 아름이나 됨 직한 고목이 종종 눈에 띈다. 나이가 너무 많아 속이 뻥 뚫린 섬피나무 고목도 있다. 다시 급경사의 계단길이 시작될 즈음 성인정 샘터에 도착한다. 성인봉 정상에서 약 500m 아래에 위치한 샘터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눈 속에 파묻혀 물맛을 보기가 쉽지 않다.

    성인정 샘터에서 정상 직전까지는 몹시 길고도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야 한다. 양쪽에 늘어선 나무마다 하얗게 핀 눈꽃이 장관을 이룬다. 한줄기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칠 때마다 맑고 청아한 풍경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귀기울여보니 눈꽃 핀 나뭇가지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얼어붙은 눈꽃이 서로 부딪힐 때마다 천상의 하모니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연신 쏟아내는 것이다. 여태까지 산에서 들었던 자연의 소리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황홀했다.

    성인봉 정상의 풍경은 의외로 밋밋하다. ‘聖人峰’(성인봉) 표지석만 우두커니 서 있다. 전망대는 북쪽으로 20m쯤 떨어진 곳에 따로 마련돼 있다. 마가목이 울타리처럼 에워싼 이 전망대에서는 은세계를 이룬 성인봉 원시림과 알봉분지, 창망한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고 위험하다. 성인봉도 마찬가지다. 올라온 길보다 더 가파른 내리막길을 지나야 한다. 특히 눈 쌓인 겨울철에는 내리막길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훨씬 더 크다. 그러므로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내딛어야 한다. 가파른 비탈길에서는 주변 나뭇가지나 밧줄을 잡거나, 앞뒤 사람끼리 손을 맞잡고 천천히 하산한다. 그리고 반드시 방수 등산화에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고, 등산용 스틱도 챙겨야 한다.

    눈과 바람이 쓱쓱 황홀하구나, ‘雪景 산수화’

    눈보라를 헤치고 올라온 여행객이 성인봉 전망대에서 상쾌한 조망을 즐기고 있다.

    여행정보

    ● 숙식

    눈과 바람이 쓱쓱 황홀하구나, ‘雪景 산수화’

    씨앗술과 산채전을 곁들인 ‘산마을식당’의 산채비빔밥.

    나리분지에 산마을식당(054-791-4643), 뿌리깊은나무민박(054-791-6117) 등의 민박집이 있다. 나리분지 아래 천부리에는 바다풍경펜션(010-9389-9682), 나리관광펜션(054-791-0980) 등이 있다.

    ● 맛집

    나리분지의 산마을식당(054-791-4643), 나리촌(054-791-6082), 야영장식당(054-791-0773) 등은 산채정식, 토종닭백숙 같은 향토음식을 잘한다. 천부리의 신애분식(따개비칼국수/ 054-791-0095)도 울릉도를 대표하는 맛집 가운데 하나다.

    ● 추천 코스

    나리분지(2km)→신령수(2km)→성인정(0.5km)→성인봉(1km)→팔각정(3.1km)→대원사 입구. 겨울철에는 5시간 내외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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