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7

2014.07.21

‘독이 든 성배’ 드실 분 어디 없소?

한국 축구 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위기…감독 부재 당장 내년 1월 아시안컵 걱정

  • 김도헌 스포츠동아 기자 dohoney@donga.com

    입력2014-07-21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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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이 든 성배’ 드실 분 어디 없소?

    외국인 감독으로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친 히딩크.

    2014 브라질월드컵은 독일 우승으로 끝이 났다. ‘전차군단’ 독일은 아메리카대륙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사상 첫 우승컵을 들어 올린 유럽국가가 됐다. ‘개최국 대륙 우승 징크스’까지 날려버린 멋진 우승이었다.

    70억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번 월드컵은 32개국 참가국에게 때론 영광을, 때론 좌절을 안겼다. 우승국 독일은 무한 영광을 맛봤고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등은 조별리그에 이어 토너먼트에서도 돌풍을 이어가며 큰 감동을 선사했다. 반면 직전 대회 우승국 스페인은 조별리그 탈락이란 비운을 겪었고, 전통적인 유럽 강호로 꼽히는 이탈리아와 ‘큰 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소속된 포르투갈도 쓸쓸히 조별리그에서 짐을 쌌다. 무엇보다 통산 6번째 우승을 노렸던 개최국 브라질은 4강전에서 독일에 1-7로 치욕을 당하고 3·4위전에서도 네덜란드에 0-3으로 완패하며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월드컵에서 부진했던 여러 나라가 그렇듯, 16년 만에 ‘무승 월드컵’으로 참패를 당한 한국 역시 뼈아픈 성적표 속에 거센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어렵게 홍명보 감독의 재신임을 결정했지만, 분노한 민심과 미디어는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에 견디지 못한 홍 감독은 7월 10일 결국 사퇴를 발표했다. 허정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도 동반 퇴진했고, 황보관 기술위원장 역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 한국 축구, 과연 ‘포스트 홍명보 시대’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식물위’ 기술위원회부터 바로잡아야

    홍 감독의 사퇴 이후 다음 지휘봉을 누가 잡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도 “조만간 새 감독을 선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감독 선임보다 먼저 해야 할 게 있다. 그동안 ‘유령위원회’ ‘식물위원회’라고 불리던 기술위원회의 정상화다. 지난해 5월 대한축구협회 조직 개편 이후 기술위원회는 유명무실해졌다.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월드컵 당시 축구 국가대표팀 지원팀장을 맡았다.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없는 비정상적 구조였다.



    기술위원회는 축구 국가대표팀 구성뿐 아니라 한 나라의 축구 발전과 관련한 구체적인 정책과 의사를 결정하는 기구다. 한국 축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기술위원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새로운 기술위원장에게 확실한 권한을 주고, 대표팀 감독 선임 작업도 기술위원회에 맡겨야 한다. 외국인 지도자를 영입할지, 국내 지도자를 선임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현실을 감안했을 때 어떤 지도자가 가장 적합한지를 검증하는 게 먼저다. 또한 대표팀 경기력 향상을 위해 각급 대표팀을 포함한 한국 축구 전반에 걸쳐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장기적인 계획도 수립해야 한다. 당연히 이 중에는 2018 러시아월드컵에 대비한 대표팀 운영 방안도 포함돼야 한다.

    당장 내년 1월 호주에서 2015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이 펼쳐진다. 8월 내 새 사령탑을 선임한다 하더라도, 준비 기간이 6개월도 채 안 된다. 당초 대한축구협회 집행부가 무리하게 홍 감독의 재신임을 결정한 것도 반년밖에 남지 않은 아시안컵을 위해서였다.

    아시안컵이 중요한 대회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아시안컵만을 위한 단기처방식 새 사령탑 선정이라면 한국 축구의 미래는 또 암울할 수밖에 없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흔히 ‘독이 든 성배’에 비유된다. 매력적이지만 위험 부담도 크기 때문이다. 프로팀에서도 지도자가 팀에 자기 색을 입히려면 최소 2년이 걸린다고 한다. 3년 정도 돼야 비로소 ‘내 팀’을 만든다. 소속팀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훈련하는 프로팀도 최소 2년이 걸리는데, 몇 달에 한 번씩 사나흘 손발을 맞추는 대표팀은 운영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한국은 월드컵 직후 취임한 감독이 차기 월드컵 본선까지 간 경우가 없다. 차기 감독에게는 4년 후를 바라보고 천천히 팀을 완성해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독이 든 성배’ 드실 분 어디 없소?

    히딩크 감독이 성공을 거둔 이후 코엘류, 본프레러, 아드보카트, 베어벡(왼쪽부터) 등 4명의 외국인 감독이 사령탑에 앉았지만 주목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또 외국인 감독? 황선홍, 최용수, 김호곤?

    홍 감독 퇴진의 결정적 이유는 박주영의 발탁과 고집스러운 주전 기용 등에서 나타난 ‘의리 엔트리’ 문제였다. 이런 연유로 축구팬 사이에서는 홍 감독 후임으로 외국인 감독을 원하는 여론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외국인 감독은 학연, 지연 등 개인적인 인연이나 외부 압박에 시달리지 않고 오직 실력만으로 팀을 투명하게 꾸릴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역대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5명의 외국인 사령탑 중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친 사람은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일군 휘스 히딩크(네덜란드) 감독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이 성공을 거둔 이후 움베르투 코엘류(포르투갈), 조 본프레러(네덜란드), 딕 아드보카트(네덜란드), 핌 베어벡(네덜란드) 등 4명이 더 거쳐갔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 한국의 원정 월드컵 첫 승을 기록한 아드보카트 감독만 평균 정도 성적을 거뒀을 뿐 나머지 3명은 쫓겨나듯이 한국을 떠났다.

    브라질월드컵이 마무리되면서 명망 있는 감독은 대부분 거취가 정해졌다. 아직 둥지를 찾지 못한 A급 감독들은 몸값이 부담스럽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일본은 재빠르게 알베르토 차케로니(이탈리아) 감독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새로운 사령탑으로 하비에르 아기레(멕시코) 감독을 선임했다. 연봉만 약 24억 원으로 알려졌다.

    대한축구협회가 외국인 감독의 ‘적정 연봉’으로 여기는 금액은 12억 원 선이다. 연봉 외에도 외국인 감독에게 제공해야 하는 주택, 차량, 동반 코칭스태프 비용까지 포함하면 대한축구협회의 살림살이 규모로 봤을 때 그 정도가 적정 수준이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또 ‘쫓겨나듯’ 실망만 주고 떠날 수준의 감독이 오기 십상이다. 홍 감독의 연봉은 8억 원 선이었다.

    제대로 된 외국인 사령탑을 데려오기 어렵다면, 다시 국내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현재 새 사령탑 후보로 거론되는 국내파로는 포항 황선홍 감독과 FC서울 최용수 감독, 김호곤 전 울산 감독 등이다. 황 감독과 최 감독은 모두 “현재 소속팀 돌보기에도 벅차다”며 고사의 뜻을 나타내고 있고,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거친 김 전 감독 역시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이 든 성배’를 선뜻 들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또 다른 숙제인 셈이다.

    ‘독이 든 성배’ 드실 분 어디 없소?

    브라질월드컵 이후 자진사퇴한 홍명보 감독과 차기 사령탑으로 거론되고 있는 김호곤 전 감독, 최용수, 황선홍 감독(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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