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5

2013.07.08

“신HSK 5급 땄으니 중국 변강쇠 만들어야죠”

영화 ‘변강쇠’ 제작자 박태환 옹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3-07-08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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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HSK 5급 땄으니 중국 변강쇠 만들어야죠”

    1994년 영화 ‘두 여자 이야기’로 수상한 대종상영화제 그랑프리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한 박태환 고려미디어 대표. 그는 중국어를 통해 또 다른 도전을 구상하고 있다.



    “나이가 드니 잠이 없어요. 새벽 5시쯤 일어나 중국어 단어 외우고 MP3 들으며 따라했죠. 이참에 중국인을 위한 ‘중국 변강쇠’ 영화를 만들까 봐요(웃음).”

    영화 ‘변강쇠’ ‘두 여자 이야기’의 제작자이자 고려영화사 창립자인 박태환(79) 고려미디어 대표가 요즘 중국어 공부에 푹 빠졌다. 그는 세 번째 도전만에 최근 신HSK(중국한어수평고시) 5급 시험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신HSK는 중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의 중국어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1~6급 가운데 5급은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고 대학 강의를 이해할 수 있는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이다.

    주위를 놀라게 한 중국어 도전기

    1986년 고려영화사를 창립하고 첫 작품 ‘변강쇠’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변금련’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거리의 악사’ 등 영화 15편을 제작했고, 또 다수를 수입 배급했다. 1994년 김서라, 윤유선 주연의 ‘두 여자 이야기’는 대종상영화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을 휩쓸었으며, 박 대표의 수상 장면은 안방으로 생중계됐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고려영화사는 충무로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국내 영화사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인 98년 그는 영화인에서 고려미디어 대표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고려미디어는 자막이 나오는 MP3 모듈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휴대전화 제조사와 이동통신사에 납품하는 콘텐츠 개발업체다.



    “업종은 바꿨지만, ‘변강쇠’ 같은 대중적인 영화를 다시 만들어보려고 지금까지 고려영화사를 폐업하지 않았어요. 앞으로 기회가 오겠죠.”

    그는 변강쇠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 변강쇠 캐릭터는 외소하고 볼품없는 영감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감을 내가 아주 센 놈으로 바꿨어요. 1986년 당시 시대 상황이 산업화 아니었어요? 남자들이 일에 쫓겨 힘이 빠질 때여서 남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시켜줄 캐릭터를 만든 거죠. 공감 가는 캐릭터, 변강쇠. 나는 처음부터 이대근, 원미경 씨를 출연시키고 싶었어요. 그때는 2명 다 무척 바쁠 때였죠. 어느 날 이대근 씨에게 ‘변강쇠’ 시나리오를 줬더니 그 자리에서 다 읽더라고요. 단박에 ‘선생님, 제가 하겠습니다’고 그래요.”

    ‘변강쇠’는 한국 영화 불황기에 내린 단비였다. 박 대표는 변강쇠 시리즈(1~3편)에 이어 ‘변금련’ 1, 2편,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같은 토속적인 애로영화를 만들었다. 고전물 자체가 이미 관객에게 많이 알려져 공감을 얻기에 적격이었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그런 그가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중국어 시험에 도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난해 설암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 힘들었어요. 나는 변강쇠는 아니지만,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에 도전하고 싶었죠. 이 나이에 무슨 야망이 있을까마는, 외국어는 한 번 해보고 싶더라고요. 중국어를 해보자는 생각에 아들 녀석에게 코치를 좀 받았죠. 물론 주변에선 다들 말렸어요.”

    ‘변강쇠’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던 아들 박규진(51) 고려미디어 이사는 치과 개원의이자 발명가로 이미 신HSK 5급에 합격한 터였다. 박 대표는 아들이 한 방법대로,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중국어 단어를 외웠고, 원어민 대화를 반복해 따라하며 중국어를 익혔다. 처음엔 수준 높은 교재로 시작해 차츰 낮은 교재로 바꿔 나갔고, 시험 전에는 모의시험지를 수차례 풀었으며, 시험 일주일 전에는 대학입학 시험 이후 처음 밤을 새웠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말 공부를 시작해 3월 24일 실시한 신HSK에 합격했다.

    기자 역시 중국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기자가 다닌 학원은 신HSK 5급 대비반 원생들에게 “7개월간 교재비와 수강료 276만 원을 내고 꼬박 다니면 딸 수 있다”고 소개했다. 개그우먼 조혜련은 자신의 저서 ‘찐빵 중국어’에서 “매일 3시간씩 공부해 1년 2개월 만에 5급을 따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고 썼다. 그런데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79세 노인이, 그것도 4개월 만에 하루 3시간여 동안 공부해서 5급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기자 경험상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HSK 5급 땄으니 중국 변강쇠 만들어야죠”

    사무실에서 중국어 공부를 하는 박태환 고려미디어 대표.

    “내 나이가 돼보세요. 책 중간쯤 진도가 나가면 책 앞부분 내용은 다 잊어먹어요. 처음엔 글도 안 보이고 들리지도 않아 짜증만 났죠. 아들 녀석과 한 약속 때문에라도 억지공부를 해야 했어요. 단어책에 나온 2500단어와 560문장을 듣고 따라 말했어요. 꾸준히 책을 보면서 원어민 발음을 귀로 듣고, 마이크로 따라 말하며 공부한 거죠. 아, 그런데 어느 순간 신기하게 단어가 기억나면서 다 들리더라고요. 듣기는 점수가 아주 높게 나왔어요(100점 만점에 80점). 두 번 시험을 쳐보니 요령도 생겼고요.”

    신HSK는 독해, 듣기, 작문 3개 영역 각 100점이 만점이다. 평균 60점을 넘어야 합격할 수 있다. 아들 규진 씨는 이를 ‘초청법(Hyper Listening)’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보자.

    “눈, 귀, 발성기관을 동시에 사용해 눈은 눈으로, 귀는 귀로, 발성기관은 발성기관으로 각각 기억하면서 상호 자극을 통해 대뇌의 언어, 기억중추를 동시에 활성화하는 방법입니다. 발음(발성기관), 듣기(청각기관), 독해능력(시각 및 의미해석기관)을 동시에 활성화하면 단기간에 많은 단어를 외울 수 있고, 문장 전체를 암기하는 데도 탁월한 효과가 있어요. 인식이론에 따르면 눈으로 학습하는 것보다 소리를 내 학습하면 효과가 7배 높다고 합니다. 원어민의 소리와 자신의 소리를 동시에 듣고 즉시 교정하면서 확인해나가는 방식으로, 학습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 핵심이죠.”

    ‘초청법’으로 학습효율 극대화

    박 대표의 중국어 도전기에는 ‘인생 4모작’을 대비하는 의미도 있다. 신HSK 5급 합격자는 국내 서울공자아카데미(중국 교육부 산하 기관이 운영하는 중국어 교육원)가 운영하는 HSK중국어교사 양성과정에도 참여할 자격이 주어진다. 또 앞으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중국어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내 또래 사람은 다들 집에서 소일해요. 지금은 100세 시대 아닙니까. 나이 드신 분들이 집에서 쉬는 것보다 중국어 공부도 하고, 중국어 선생을 하면 용돈도 벌고 건강도 챙길 수 있어요. 또 알아요? 변강쇠 캐릭터 저작권을 갖고 있으니, 중국 소림파는 변강쇠파, 무당파는 옹녀파로 만들어볼 수도 있잖아요. 중국 고전과 한국 토속 애로물을 접목한 영화를 만들어 중국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고요. 중국어 공부하다 보면 그날이 올 겁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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