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5

2013.02.18

국내 정보 수집 어찌하오리까

안보 활동 vs 정치 개입 논쟁 가열…“댓글은 본연 업무 아니다” 첫 확인

  • 입력2013-02-15 17: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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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정보 수집 어찌하오리까
    시계를 2007년 12월 21일로 돌려보자. 이날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이재홍 수석부장판사)는 신건,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의 불법 도청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불법감청은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서랍을 열어보거나 다른 사람의 알몸을 몰래 엿보는 것과 같은 비열한 범죄다. 국가기관이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두 전직 원장이 공모하거나 관여한 이 사건 범죄는 국가 정보기관이 장기간에 걸쳐 조직적으로 불법감청을 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통신의 비밀과 자유, 개인 사생활을 침해한 것이어서 사안이 중하다.”

    합법과 탈법의 경계선

    당시 신건,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김대중 정권 당시 국정원장을 지내면서 정치인, 공직자, 언론인 등 각계 인사 1800여 명의 통화를 도청한 혐의로 2005년 11월 구속 기소됐다. 1800여 명의 전화번호를 입력해놓고 통화를 엿들은 혐의였다. 당시 두 전직 국정원장을 구속하며 도청행위 수사를 지휘한 인물이 박근혜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에 내정된 황교안(56·사법연수원 13기) 전 부산고검장이다. 항소심에서 두 전직 국정원장은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문민정부 초대 안기부장이던 김덕 씨도 재직 시절 지방선거 연기 공작을 추진한 사실이 드러나 부총리(통일원 장관)에서 낙마했고, 권영해 씨는 총풍·북풍 등 각종 공안사건과 안기부가 공기업을 통해 대선자금을 불법모금한 사건 등에 연루돼 네 차례 기소됐다. 국민의정부 시절 천용택 국정원장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및 국가정보원(국정원) 불법도청 사건과 관련해 ‘미림팀’의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을 보관하면서 이를 활용한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2006년 말 당시 국정원 5급 직원 고모 씨는 이명박 대통령선거(대선) 후보와 주변 인물 131명의 재산 흐름을 뒤지다 실형을 선고받았다. 고씨는 통상 업무인 것으로 가장해 행정자치부, 건설교통부, 국세청을 통해 이 대선후보와 그 주변 인물 10명의 토지, 건축물, 납세 자료를 제공받는 등 131명의 재산 흐름을 살폈다.

    국정원법 제3조 제1항에 따르면, 국정원은 “국외정보 및 국내보안정보(대공, 대정부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의 수집, 작성 및 배포” 권한을 가지며, 정부조직법 등에도 국정원의 국내외 정보 수집 권한이 명시돼 있다. 국내 정보 수집 대상을 대공과 방첩 등으로 한정했지만, 좌파 혹은 종북 꼬리표를 달면 대공과 방첩 범주에 포함할 수 있어 자의적 기준이라는 비판이 있어왔다.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 활동이 합법과 탈법 경계선에 위치해 항상 논란의 소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2009년 9월에는 박원순 서울시장(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희망제작소가 행정안전부와 맺은 3년 계약이 1년 만에 해약되고, 하나은행과의 후원 사업이 갑자기 무산된 과정에 국정원이 개입했다”고 밝히자 국정원은 2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국정원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법부는 ‘국가기관 명예가 훼손됐다’는 주장을 기각했다.

    지난해 4월에는 방송인 김미화 씨가 “국정원 직원이 두 차례 찾아와 ‘VIP’(이명박 대통령을 지칭)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폭로해 국정원의 연예인 사찰 파문이 일기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김미화 씨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이 이들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인 이유는 국정원의 과거 어두운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국민 사이에서 정보기관으로부터 감시나 도청, 이메일 해킹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불신감이 싹튼 것도 그런 그림자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국정원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음모론’이 고개를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 안보기관 흔들기로 볼 수도 있지만 국정원의 업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는 모니터링이 주 업무”

    최근 국정원 여직원 김모(29) 씨가 지난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서울 한 오피스텔에서 문재인 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을 받은 이른바 ‘국정원녀 댓글 사건’이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야당에서는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국기를 뒤흔든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공세를 편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에서는 정상적인 업무 활동이라면서 여직원 김씨는 정쟁 희생양이라고 반박한다. 사실 대북 활동과 정치 개입 경계는 불분명하다. 법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도 없다. ‘주간동아’가 국정원 여직원의 것으로 알려진 인터넷 ID 11개로 3개 사이트를 확인한 결과 “삐라 살포가 멍청한 짓이면 북한이 저러고 나오겠나?” “NLL 반대하는 사람도 있나요?” “MB 연평도 방문이 왜 대선 개입이지?” 등의 글이 주류를 이뤘다.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선후보의 ‘남쪽 정부’ 발언을 비판했지만, 야당 대선후보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전 국정원 고위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친북 인사들이 인터넷에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북한 찬양 활동을 하는 것에는 대응해야 한다. 그럼 대체로 체제 수호적인 내용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여직원 김씨의 글은 체제 옹호와 북한 핵·미사일 반대, 불법파업 및 이적단체 반대 등이 대부분이었다. 정치 개입 의도였다면 야당 대선후보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공격해야 하지 않나. 만약 친북 인사를 감시할 목적으로 특정인에게 협조를 구한다고 치자. 그를 설득하려고 친북인사 활동에 대해 얘기했다면 그것도 정치 개입이 되나? 법은 기준일 뿐, 상식적으로 풀어야지 일일이 법으로 명문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야당은 계속 물고 늘어질 태세다. 박범계,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 등은 2월 6일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을 직권 남용, 경찰공무원법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대선후보 토론이 있은 직후 경찰이 중간수사 결과 발표를 강행해 당시 후보였던 박근혜 당선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며 “이는 김 청장 지시 하에 이뤄졌다”고 말했다. 진 의원은 또 “2012년 8월 31일 16시 32분부터 33분까지 국정원 여직원 김씨 ID를 포함한 의심 ID 11개가 정부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을 비판하는 글 14개를 1분 동안 집중적으로 게재해 대선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며 국정원의 조직적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국정원 여직원 아이디로 추정되는 글 가운데 ‘장기연애 경험이 있는 이성?’(2012년 11월 27일 작성)이라는 제목의 연예 가십성 글이 있다는 것. 국정원 관계자는 ‘주간동아’의 서면질의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김씨는 북한의 사이버 선전 및 선동 모니터링 등 대북 심리전 업무를 담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게시글 등을 작성한 것은 직원 개인의 정체성 및 체제 수호 신념 차원”이라고 밝혔다. 또한 “모니터링이 주된 업무이지만 (댓글 달기와 추천 같은) 초과 업무에 대해선 칭찬할 일이지 비판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댓글 달기는 업무가 아닌 자발적 의사였다는 것. 이는 모니터링과 댓글 달기를 구분한 발언으로 “댓글 달기 역시 대북 심리전 업무”라는 그간의 주장과 배치된다. 대북 심리전을 펼치면서 개인 취미활동을 했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또 하나. 국정원은 정보 활동이라는 명분으로 국정 운영에 참여한다. 국정원 직무는 ‘정보 및 보안 업무의 기획·조정’(국정원법 3조 5항)으로 적시해놓았다. 국정원장은 이를 근거로 대통령과 독대하고 국정에 참여한다. 이를 위해 국정원은 국회와 정부기관, 국가 연구기관 등에 IO(Intelligence Officer)로 부르는 정보관을 파견한다. 출입처 기관장의 행적을 조사하거나 때론 사법적 판단 위에 군림하기도 했다. 정부부처 고위 공무원 A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옛날얘기이긴 하지만, 학교 식중독 사고가 발생해 담당 공무원과 식품제조회사가 행정·사법조치를 당했다. 그런데도 ‘영감’(국정원 파견 IO를 지칭)이 몇몇 공무원을 한적한 식당에 불러 줄을 세워놓고 추궁했다. 사회 불만을 없애야 하는 판에 사고를 쳤다며 지휘봉으로 머리를 툭툭 치기도 했다. 요즘 그런 일은 없다. (IO가) 가끔 찾아와 인사하거나 몇 가지 물어보는데, 과거 기억 때문에 여전히 불안하긴 하다.”

    한 외교관은 “해외 국제학교에 다니던 국정원 해외주재관 자녀가 우리 아이에게 ‘너희 아빠를 우리 아빠가 쫓아 보낼 수도 있어’라고 말해 놀랐다”면서 “국정원 해외주재관들에게 밉보이면 본국 소환 등 불이익을 받게 될까 봐 심리적 제약도 크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국정 조정 기능을 대통령비서실이나 국무총리실에 맡기자는 주장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측도 국내 파트를 줄이거나 폐지하고 대북 정보 수집과 수사 기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신설되는 국가안보실에 신설할 정보파트와 국정원 정보파트를 어떻게 조율할지도 심사숙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개혁 피로 누적

    국내 정보 수집 어찌하오리까

    2005년 8월 김승규 국정원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고위간부들과 함께 과거 국가안전기획부 시절 불법 도청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과성명을 하고 있다.

    2월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정원의 불법선거운동 근절을 위한 개혁 방안’ 긴급토론회에서 장유식 변호사(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 소장)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국정원으로부터 국내 정보 수집 기능을 분리해내야 한다. 이를 기존에 정보 수집 활동을 해왔던 경찰에 넘기는 방안과 별도의 국내 정보 부문 정보기관을 신설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경찰이 정보 업무를 독점할 경우 또 다른 부작용이 우려된다. 따라서 국정원은 그대로 대통령 산하에 두되, 신설하는 국내 정보기관은 국무총리 산하에 둬 기관 간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신중론도 만만찮다. 염돈재 성균관대 전략대학원장(전 국정원 1차장)은 “미국 역시 2001년 9·11 테러 이후 16개 정보기관을 통솔하는 독립기구인 (2004년 12월) 미국국가정보국(DNI)을 만들어 ‘통합형’으로 가고 있다”면서 “과거에는 정보기관 권력이 커지고 독점하는 부작용 때문에 통합형을 나누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국정원 여직원 사건처럼 정치 개입이 의심되면 곧바로 제보하는 세상인 만큼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는 없다”면서도 “다만 3차장 산하에 업무 성격이 다른 산업보안 업무와 대북사업 업무를 함께 두는 건 잘못”이라고 부연했다.

    한기범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전 국가정보원 3차장)은 직원 재교육을 강조한다.

    “우리는 국내외 정보를 함께 수집하는 ‘통합형’으로 성장했다. 특히 북한이라는 대상이 있어 국내외 업무 구분도 모호하다. 통일을 고려하면 국내 파트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요즘은 정보라는 게 국내외 문제가 다 섞여 있어 분리보다 통합형이 유리하다. 따라서 통합과 분리를 따지기 전에 직원 교육, 다시 말해 국정원 구성원의 전문성과 충성심을 키우는 소프트웨어적 요소에 신경 써야 한다.”

    또 다른 전직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현 상황을 설명한다.

    “지난 30년간 정권교체, 원장 부임 때마다 개혁을 외쳐댔다. 오히려 지금 국정원은 피로가 누적된 상태다. 사실 정보는 투입 후 산출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정보가 나오기까지 5~10년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인적자원에 투자한 후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한데, 매번 개혁만 외치다 보니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올까 걱정이다. 새 정부는 국정원의 공과와 시스템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이런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다.”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이시내 인턴기자 숙명여대 국문학과 4학년 198012o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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