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1

2013.01.14

아날로그 추억에 열리는 지갑

과거 회고 레트로 마케팅, 음악 패션 등 전 방위로 확산

  • 이윤진 객원기자 nestra@naver.com

    입력2013-01-14 09: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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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 추억에 열리는 지갑

    디지털카메라에 필름카메라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한 레트로 마케팅으로 큰 인기를 끄는 올림푸스 PEN 시리즈.

    2012년은 아날로그 감성이 대중문화계를 점령한 해였다. 2011년 음악다방 ‘쎄시봉’, 영화 ‘써니’, 티아라 노래 ‘롤리폴리’로 대중의 눈길을 끌었던 복고 트렌드가 영화 ‘건축학개론’, 드라마 ‘응답하라 1997’, 대중음악인 ‘버스커버스커’ 등에 의해 한층 성숙해진 레트로 마케팅 잔치판을 벌였다.

    과거를 회고한다는 뜻을 지닌 ‘Retrospec tive’의 약어인 ‘레트로’는 ‘과거 것을 현대적으로 재수정한 것’을 의미한다. 즉, 레트로 마케팅은 소비자가 지닌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상품에 대한 친화력을 높이는 마케팅 전략이다. 과거에도 레트로 마케팅은 있었다. 하지만 2012년 레트로 마케팅에서 유독 눈에 띄는 점은 1980~90년대를 배경으로 30~40대 감성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96학번 건축학도의 첫사랑 이야기에 CD플레이어, 공일오비 노래, 청재킷과 힙합바지 같은 소품을 담아 1990년대 중반 학번의 청춘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H.O.T와 젝스키스, 이스트팩 가방, 삐삐와 개인용 컴퓨터(PC) 통신 등을 통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던 변화의 시기를 그려내 10대부터 40대까지 세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자아냈다.

    또한 지난해 3월 발표한 버스커버스커의 1집은 디지털 일색이던 가요계에 새롭게 아날로그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각종 온라인 차트에서 1위를 독식하는 쾌거를 이뤘다. 버스커버스커를 통해 아날로그 음악의 정서에 매료된 대중은 이후 발매한 리쌍, 나얼, 윤건, 넬 등의 앨범과 ‘응답하라 1997 OST’ 등으로 이어지는 1990년대 감성에 기꺼이 지갑을 열면서 오랜 불황으로 허덕이던 가요계에 숨통을 터줬다.

    1980~90년대 스타일 3040 감성 자극



    레트로 마케팅은 외식업계에서도 통용된다. 대표적 사례가 음악주점인 ‘밤과음악사이’다. 서울 홍대 앞에서 출발한 ‘밤과음악사이’는 주점과 클럽을 결합한 형태의 업소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로 지점을 늘려가며 3040 놀이터로 떠올랐다.

    ‘1989년 이후 출생자 출입금지.’ 밤과음악사이 입구에 써 있는 문구다. 이른바 ‘수질 관리’를 위해 일정 연령 이상을 가려내는 클럽은 많지만, 나이 어린 사람을 출입 금지시키는 곳은 이곳뿐일 것이다. 대다수 클럽에서 ‘수질’을 좌우하는 물 좋은 청춘남녀도 없이 어떻게 장사가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뜻밖에도 이곳은 주말이면 수십 미터 밖까지 줄이 이어질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이곳의 인기 요인은 아주 간단하다. 음악은 1980년대 후반~90년대 중반의 것만, 입장은 30~40대에게만 허용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은 찾는다”는 회사원 유광연 씨는 “귀에 익은 음악뿐이라 분위기가 편안한 데다, 주위에 전부 또래들만 있어 외모나 차림새에 주눅 들지 않고 마음껏 놀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떡볶이 전문점 ‘국대떡볶이’는 1980~90년대 초등학교와 분식집 분위기를 결합해 30~40대의 추억을 자극한다. 묽은 양념 국물에 밀가루 떡을 사용한 옛날식 떡볶이를 주요 메뉴로 하며, 매장 내부는 다이얼식 공중전화, 표준전과, 옛날 교과서, 종이인형 같은 추억의 소품으로 장식해 3040에겐 추억을, 1020에겐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디지털 제품에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한 레트로 마케팅이 인기다. 올림푸스 PEN 시리즈와 OM-D가 대표적이다. 필름카메라의 클래식한 외관을 그대로 차용한 디자인은 하이테크적인 이미지 일색이던 디지털 제품에 대한 선입견을 깨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골수팬을 양산하고 있다. 특히 OM 시리즈는 미국과 유럽에서 ‘레트로 섹시’라는 평을 들을 정도다.

    모든 세대에 먹히는 콘셉트

    아날로그 추억에 열리는 지갑

    노래, 의상, 뮤직비디오 전반에 복고를 내세운 가수 이하이.

    하지만 레트로 마케팅을 가장 적극적으로 펼치는 분야는 패션업계다. 1990년대 중반 인기를 끌었던 군화 스타일의 여성화 ‘워커’는 2~3년 전부터 핫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푸마, 아디다스, 컨버스 등 유명 신발 브랜드도 과거 히트 상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신발을 내놓고 레트로 대열에 가세했다. 장문영 ABC마트 마케팅팀 부장은 “레트로 열풍과 경제불황이 겹치면서 앞으로도 클래식한 정통성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디자인을 가미한 신발이 더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레트로 스타일의 강세는 올해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가장 두드러진 장르는 케이팝(K-pop)이다. 국민 걸그룹 소녀시대의 새 앨범은 레트로 스타일로 익숙함을 강조한다.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를 연상시키는 ‘익스프레스 999’와 ‘댄싱퀸’ 등 디스코 장르를 통해 복고를 내세우는 것.

    SBS TV 오디션프로그램 ‘일요일이 좋다-K팝 스타’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이하이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싱글앨범 ‘1, 2, 3, 4’는 노래와 의상, 뮤직비디오 전반에 걸쳐 복고를 전면에 내세웠다. 한국 가요계에서 찾아볼 수 없던 장르인 ‘레트로 솔(Retro Soul)’을 표방한 ‘1, 2, 3, 4’는 도입부의 강한 비트와 리듬앤드블루스(R·B)풍의 창법으로 10대 음악의 리듬감과 성인음악의 깊이 있는 창법을 동시에 표현한다. 인터넷 음악 포털사이트 벅스에선 음원 공개 다음 날부터 2주간 다운로드 및 스트리밍 횟수를 기준으로 한 연령별 선호도를 발표했는데 ‘1, 2, 3, 4’는 10~20대에게 36%, 30대에게 31%, 40대에게 24%, 50~60대 6%, 그 외 세대에게 3% 선호도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세대에 ‘먹히는’ 레트로 마케팅의 힘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레트로 마케팅이 인기를 끄는 걸까. 최영일 문화평론가는 “레트로는 중·장년 세대 처지에서 되돌아봤을 땐 ‘그때 이렇게 해봤으면 좋았을 것’이고, 젊은 세대 처지에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 문화의 역사’”라면서 “이처럼 모든 세대에게 먹히는 콘셉트인 ‘레트로’를 기업 처지에서 놓칠 리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씨는 레트로 마케팅의 근간은 “치유를 위한 퇴행에 있다”고 정의했다.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과거의 무언가에 대한 미련을 자본력과 실행력을 갖춘 현대에 다시 끄집어내어 좀 더 완성된 형태로 내보낸다는 의미에서다. 그런 점에서 레트로 마케팅은 현대인의 키워드인 ‘힐링’과 맞닿아 있다. 현대인이 복고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익숙한 편안함이나 과거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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