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9

2012.08.06

대학 기숙사 빌려 쓰면 안 되겠니?

여행객에게 저가 숙소 제공하는 ‘돔서핑’ 큰 호응

  • 이윤진 객원기자 nestra@naver.com

    입력2012-08-06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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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기숙사 빌려 쓰면 안 되겠니?

    돔서핑을 처음 시작한 충북 제천 세명대 기숙사 전경.

    ‘방팅’이 가능한 기숙사가 있다. SBS TV ‘짝’ 애정촌의 기숙사 버전을 만들 테니 남자 방, 여자 방을 넘나들며 직접 청춘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라고 달콤하게 유혹한다. 1990년대 청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단체 미팅은 물론, 달밤에 기타 소리에 맞춰 노래도 불러준단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엄격함의 대명사여야 할 사감은 “이만큼 판을 깔아주면 영화 ‘비포 선셋’처럼 여행지에서 운명처럼 만난 사람과 얼마든지 청춘의 낭만을 즐길 수 있지 않겠느냐”고 큰소리친다.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폰의 만남 애플리케이션(앱) 광고가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우리나라 여행자 숙소를 바꿔보겠다는 대학생이 모여 만든 ‘청춘 숙소’ 돔서핑(Dorm Surfing) 이야기다. 돔서핑은 기숙사를 뜻하는 ‘도미토리(dormitory)’와 인터넷에서 찾아본다는 ‘서핑(surfing)’의 합성어로, 방학이 되면 텅텅 비는 대학 기숙사를 여행자에게 안전하고 저렴한 숙소로 개방한다는 일종의 공유경제 캠페인이다.

    돔서핑 아이디어는 김태연(24·성신여대 법학과) 씨가 유럽여행에서 경험한 ‘기숙사 개방’에서 나왔다.

    “유럽 대학에선 방학 동안 기숙사 공실(空室)을 관광객에게 저렴하게 제공해 관광을 촉진하고 수익금을 모아 장학금 등 학생 복지에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면서도 부러움을 느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이 제도를 우리나라에서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돔서핑’을 만들었다.”

    비싼 방값에 노숙 아니면 찜질방 전전



    우리나라에서 ‘돔서핑’이 가능하리라고 판단한 배경에는 코레일(KORAIL)이 발매하는 ‘내일로’가 대학생 사이에서 촉발한 국내 여행 열풍이 있었다. 여름 시즌에 한정 판매하는 ‘내일로’는 만 25세 이하 국내외 청소년이면 누구나 새마을호, 누리로, 무궁화호, 통근열차 자유석 또는 입석을 7일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자유여행 패스다. 2007년 처음 발매해 5년째인 지난 한 해에만 청소년 17만여 명이 구입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특히 국내 배낭여행족 확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6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공동 주최한 ‘2012 한국관광의 별’ 시상식에서 ‘프런티어 부문’ 수상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내일로’의 요금은 5만4700원에 불과해 지갑이 가벼운 대학생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하지만 ‘내일로’를 들고 여행을 다녀온 학생 대부분이 “저렴한 철도패스에 걸맞은 저렴한 숙소가 전무하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대학 기숙사 빌려 쓰면 안 되겠니?

    돔서핑은 파격적인 가격은 물론, 실속 있는 공간과 서비스를 제공한다(위). 돔서핑을 이용한 사람들이 적은 후기 카드.

    관광호텔이나 펜션 같은 ‘괜찮은’ 숙소는 하나같이 비싸고, 그나마 만만한 숙박시설인 모텔이나 여관은 학생 신분으로 들어가기가 찜찜하다 보니 많은 학생이 기차역에서 노숙하거나 찜질방에서 잠을 청하는 실정에서 오는 불만이다. 오죽하면 ‘내일로’ 연관검색어로 ‘무료 숙박’이나 ‘찜질방’이 자동 추천될 정도다. 김씨는 “친구 가운데 찜질방에서 자다 도난사고를 당하거나 몸이 힘들어 여행을 망쳤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만일 방학 중에 대학 기숙사 공실을 저가 숙소로 개방하는 외국 사례를 도입한다면 ‘내일로’ 이용자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돔서핑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돔서핑의 첫 서핑은 7월 22일 충북 제천에 있는 세명대 기숙사 ‘세명학사’에서 시작됐다. 홍보기간이 2개월도 안 되는 상황에서 결정된 일이라 얼마나 호응을 얻을지 불안했지만 ‘사전 예약 완료’라는 성과를 내며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4인 1실 6개 실(남자실 3개, 여자실 3개)을 △전실 1층 침대, 개인 책상과 사물함, 개별 샤워실과 세면대, 화장실 완비 △각 방마다 와이파이 무료 제공, 그리고 △에어컨 무제한 사용 가능한 방을 △1박에 7000원(대학생 기준, 일반인은 1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 ‘저가에 실속 있는 숙소’에 목말라하던 젊은이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것.

    김씨는 돔서핑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가격과 시설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홍보부터 관리까지 모든 과정을 대학생 서포터스가 직접 기획하고 운영한다는 점이 대학생 여행자의 공감대를 얻은 것 같다.”

    겨울방학에 좀 더 많은 곳 참여 기대

    인터넷을 통해 모집한 서포터스 21명은 서너 명씩 짝을 이뤄 각각 3박4일간 숙소에 머물며 체크인, 체크아웃, 비품 관리, 청소 같은 실무에서부터 투숙객이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오락반장’ 구실까지 도맡았다. 그 덕에 예고 없이 남자 방과 여자 방의 방팅을 주선하거나, 다 같이 모여 앉아 보드게임을 즐기는 등 찜질방과 모텔 같은 기존 숙소에선 경험할 수 없었던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포터스로 참가한 류지선(20·경인교대 교육학과) 씨는 “처음엔 음주, 흡연이 금지된 공간이라 ‘재밌게 놀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술 힘을 빌리지 않고도 순수하게 ‘놀이’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다 함께 어우러져 게임하고 노래를 불렀던 경험은 대학 시절 최고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며 자랑했다.

    안타깝게도 이번 서핑은 8월 4일까지 2주간에 걸친 ‘베타서비스’로 막을 내렸다. 많은 이용객이 ‘겨울방학을 기약하며’ 떠났지만 베타서비스 이후 계획은 미정이다. 김씨는 “‘방학마다 지속적으로 기숙사를 개방하겠다’는 대학이 없을 뿐 아니라, 좀 더 많은 대학 기숙사를 활용해 체계적으로 ‘돔서핑’을 운영해갈 수 있는 탄탄한 조직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김씨는 “‘대학생들에 의한 운영’은 참신한 발상이었지만 이번 같은 소규모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면서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으려면 규모를 키워야 하는데, 그럴 경우 안전사고 등 대학생만으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대학이나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가 앞장서서 ‘돔서핑’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돔서핑’에 관한 제안서를 만들어 청와대와 각 지자체 관광홍보과, 20개 대학 대외홍보처에 보냈다. 특히 서울시장 집무실에서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 숙박업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펼쳐 ‘좋은 아이디어’라는 칭찬을 들었다. 비록 세명대를 제외한 나머지 단체에선 긍정적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김씨는 “이번 성공을 계기로 많은 사람이 ‘기숙사 공실 활용’ 아이디어에 공감해 겨울방학에는 좀 더 많은 대학에서 ‘돔서퍼’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김씨의 바람이다.

    “국내 배낭여행을 하고 싶어도 지방에 가면 숙소가 마땅치 않아 포기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다.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비싼 특급호텔보다 다른 여행자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며 대학 기숙사에서 부담 없이 숙박할 수 있다면, 한국에 대한 인상도 더 깊어지고 여행이 끝난 다음에 이야깃거리도 훨씬 풍부해지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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