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4

2011.02.14

‘해적’과 ‘탐험가’는 종이 한 장 차이

조국 강조 경제적 호사 소말리아 해적, 400년 전 카리브해 해적과 ‘닮은꼴’

  • 밴쿠버=황용복 통신원 facebok@hotmail.com

    입력2011-02-14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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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적’과 ‘탐험가’는 종이 한 장 차이
    ‘해적’은 바다의 도적이란 뜻이지만, 소말리아 해적들은 자신을 도적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네 나라 근해에 외국 어선들이 와 불법으로 조업하고 부자 나라 기업들이 산업폐기물을 마구 버리는데도, 이를 응징할 공권력이 무력해 어민인 본인들이 직접 나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양민으로서 삶의 터전이 유린되는 것을 막아내려는 정당방위라는 얘기.

    1990년대 초반 시작된 소말리아인들의 해적 행각은 그 나름의 명분을 지녔다. 아랍계 방송인 알 자지라는 2008년 유엔의 소말리아 문제 담당 특사의 입을 빌려 “유럽의 몇몇 업체가 소말리아의 부패한 지방 실력자들의 비호 아래 핵폐기물을 포함해 유독한 산업 쓰레기를 근해에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적 산업’이 태동한 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해적질을 통해 큰돈을 벌어 호사를 누리고, 엘리트로 대접받기를 기대한다. 요즘 소말리아 해적은 출신 면에서도 어업과 관련이 없다. 실제 소말리아는 여러 해 내전 상태라 각 지방에 군벌이 할거한다. 수도 모가디슈에 웅크리고 있는 정부는 이름만 ‘중앙정부’일 뿐 고작 수도권만 장악했다. 해적들은 군벌과 유착해 인질 몸값과 노획물을 나눠 갖는다. 일종의 조직폭력배인 해적단은 자신의 조직을 국가 의용 해안 방위대(National Volunteer Coast Guard), 해양 구원단(Ocean Savation Corp) 등으로 부른다. 조국과 민족을 앞세우는 점, 경제적 호사를 누리는 점, 권력과 유착한 점 등이 400년 전 카리브해를 무대로 했던 유럽 해적들과 닮았다.

    콜럼버스가 아시아인 줄 알고 다녀온 땅이 전혀 다른 신대륙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스페인은 ‘이것 역시 나쁘지 않다’고 봤다. 당초 중국과의 교역이 목표였지만, 신대륙을 정복하면 이에 못지않은 경제적 이득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긴 것. 당시 스페인은 오늘날의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이르기까지 중남미 대부분을 차지했고 현지의 ‘돈 될’ 물산을 모두 빼돌렸다. 귀금속과 보석류는 물론 담배, 설탕 등 진기한 특산물도 본국으로 반출해 16세기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됐다.

    이처럼 스페인이 활발하게 신대륙을 경영(혹은 수탈)할 수 있었던 것은 ‘무적함대’(armada)라고 불린 막강한 해군과 항해기술 덕분이었다. 이런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프랑스와 영국 등은 갈수록 부자가 되는 ‘이웃’을 시샘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결국 100년 후 북미에 식민지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이 시기 해군력의 약세를 보강할 목적으로 ‘사략선’(私掠船·영어로 privateer, 프랑스어로 corsaire)이라는 편법을 동원했다. 사략선이란 전쟁 때 적의 배를 나포하기 위해 평소에도 무장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민간 선박이다. 사략선은 정규 해군의 통제를 받지 않았고 무장 비용도 정부 아닌 선주가 부담했는데, 적선을 나포하면 선주가 배와 화물을 경매에 부쳐 얻은 돈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국고에 편입했다. 사략선 면허는 주로 상선을 대상으로 발급했으나, 일부 선주는 낡은 해군 함정을 사들여 개조했다.

    사실 사략선과 해적선의 경계는 모호했다. 망망대해에 있는 사략선이 한 발짝만 더 타락하면 해적선이 되는 형국. 반대로 사략선(혹은 해적선) 선장이 왕명을 받아 탐험에 나설 경우 숭고한 탐험가가 됐다. 사략선 선장은 대개 노련한 뱃사람이었기에 흔히 탐험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들 사략선의 가장 큰 무대가 카리브해였다. 카리브해는 멕시코의 바로 동쪽이자 남미의 북동쪽에 있는 바다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박들이 식민지에서 챙긴 물산을 본국으로 운반하는 길목이었다. 해골 깃발이 펄럭이는 뱃전에서 애꾸눈 선장이 럼주를 들이켜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적의 이미지가 바로 카리브해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사략선은 전쟁이 났을 때 지정된 해역에서만 무력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 제한은 대부분 무시됐고 정부도 이를 묵인했다. 묵인 정도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재위 1558~1603년)을 비롯한 영국의 지도층은 이를 즐기며 지켜봤다. 당초 사략선 제도는 나랏돈을 들이지 않고 경쟁국의 국력을 좀먹고, 노획물 처분을 통한 이익까지 챙긴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사략선 선장들은 노획물을 공매 처분하는 공식 절차를 밟는 한편 따로 떡고물을 챙겨 일부는 본국의 고위층에 상납했으며 다른 일부는 미래의 비자금으로 무인도 등 외딴곳에 숨겼다. 보물섬의 전설이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자메이카나 아이티 앞바다의 토르튜 섬 등은 카리브 해적선들의 육상 기지였다. 카리브 해적들은 선박뿐 아니라 육지에 있는 스페인의 정착촌들도 습격해 쑥대밭을 만들곤 했다.

    역사 속 탐험가? 실제로는 해적 선장!

    역사책을 보면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1580년 영국인으로서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를 완수한 탐험가로 나오지만, 실은 해적선장과 사략선장, 탐험가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든 사람이었다. 비슷한 시기 영국 왕실의 명을 받고 북서통로 개척을 위해 세 차례 장정에 나선 탐험가 마틴 프로비셔 역시 본업은 해적이었다. 북서통로란 대서양에서 북극 바다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가상의 뱃길을 말한다. 북극해가 얼음에 덮여 있어 이 뱃길은 생길 수 없음이 훗날 밝혀졌으나, 당시 영국은 이를 개척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프로비셔는 1588년 스페인이 영국으로 쳐들어왔을 때 격퇴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기사(knight) 작위를 받은 후에도 해적질을 계속했다.

    해적사상 가장 악명이 높았던 사람으로 꼽히는 헨리 모건도 영국계 카리브 해적의 선장이었다. 드레이크나 프로비셔보다 후세대인인 그 역시 기사 작위를 받고 자메이카 부총독까지 올라 현지에서 호사를 누렸다.

    17세기 전성기를 누리던 카리브 해적들도 차츰 찬밥 신세가 됐다. 스페인의 국력이 기울면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사략선이라는 얄팍한 수법으로 이 나라를 견제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 이때부터 영국은 사략선이 면허 조건을 어기면 엄하게 처벌했다. 사략선 제도는 그 뒤로도 존속했으나 1856년 유럽 주요 나라들이 이 제도의 폐지에 합의함으로써 역사책 속으로 들어갔다.

    해적은 도적이지만 많은 젊은이의 우상이기도 하다. 미국 프로야구팀 ‘피츠버그 파이리츠 (Pittsburg Pirates)’는 해적이라는 뜻이고, 프로 미식축구팀 ‘탬파베이 버커니어스(Tampa Bay Buccaneers)’에서 ‘버커니어’는 카리브해의 프랑스계 해적을 가리키는 영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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