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4

2011.02.14

묻지마 퇴직연금 몰아주기?

대기업들, 계열 증권사와 보험사 잇단 선정…年 8% 보장까지 등장 상대적 우대도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1-02-14 0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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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묻지마 퇴직연금 몰아주기?
    HMC투자증권이 증권계 최초로 ‘퇴직연금 적립금 1조 원 클럽’에 가입했다. 1월 3일 HMC투자증권은 “2010년 12월 말 HMC투자증권의 퇴직연금 적립금이 1조2000억 원에 달했다”고 밝혔다. HMC투자증권의 적립금 1조 원 초과는 은행, 보험, 증권사 등 전체 56개 퇴직연금 사업자 중 7번째로 증권사로서는 최초다. HMC투자증권은 퇴직연금 자산관리기관으로 등록한 지 1년 2개월 만에 적립금 1조 원을 달성해 ‘최단 기간 1조 원 클럽 진입’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HMC투자증권보다 하루 늦게 “적립금이 1조 원을 돌파했다”고 밝힌 미래에셋증권은 같은 성과를 이루기까지 만 5년이 걸렸다.

    이처럼 HMC투자증권이 퇴직연금 분야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2010년 12월 HMC투자증권과 같은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 퇴직연금 운용관리기관으로 HMC투자증권을 단독 선정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사업자는 기업과 근로자가 적합한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퇴직연금 상품을 선정하고 추천해 운용 지시를 지원하는 ‘운용관리기관’과 운용관리기관의 지시를 받아 퇴직연금 자산을 보관하는 ‘자산관리기관’으로 나뉜다. LG전자, GS칼텍스 등 대부분의 퇴직연금 가입 기업은 운용관리기관과 자산관리기관을 각각 2곳 이상 선정했다. 이와 달리 현대차는 운용관리기관으로는 HMC투자증권을 단독 선정하고 자산관리 부문에서는 은행과 보험사 13개사를 선정했다.

    불이익은 고스란히 근로자 몫

    현대차 관계자는 “내부 기준에 따라 판단한 결과 HMC투자증권은 안정성과 고객 서비스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며 “자산관리 부문에 다수 업체를 선정했기 때문에 HMC투자증권에 ‘적립금 몰아주기’를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경쟁업체 관계자는 “운용관리기관이 데이터를 대부분 관리하므로 자산관리기관은 운용관리기관의 하청업체 개념”이라고 말했다. 이는 곧 HMC투자증권이 현대차 퇴직연금 약 1조 원을 독식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현대차는 HMC투자증권 이외 증권사에서는 퇴직연금 사업자 입찰 제안서를 받지도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HMC투자증권을 퇴직연금 사업자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는 의혹을 떨치기 힘든 상황이다. 한 현대차 임직원은 “이미 작년 6월부터 회사 내부에서는 ‘HMC투자증권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단독 선정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전했다.

    재벌 그룹이 계열 금융기관에 퇴직연금을 몰아주는 것은 현대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1월 3일 현대중공업은 하이투자증권, 교보생명, 대한생명, 삼성생명 등 4개 사업자를 퇴직연금 운용관리기관으로 선정했다. 겉으로만 보면 별 문제가 없는 듯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퇴직연금 불입액 6300억 원 중 교보생명, 대한생명, 삼성생명에는 각각 10%(630억 원)를 배분하고, 70%인 4410억 원을 계열사인 하이투자증권에 맡겼기 때문. 표면상으로는 공정하게 4개 업체에 나눠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구색 맞추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현대중공업은 자산관리 부문 역시 교보생명, 신한은행, 삼성생명 등 16개 업체를 선정했지만 15개 업체에는 각 3~10%씩 배분한 데 반해 하이투자증권에는 20%를 맡겼다. 현대중공업의 ‘퇴직연금 밀어주기’ 덕에 하이투자증권은 2010년 12월 말 58억 원에 불과하던 퇴직연금 적립금이 2011년 2월 기준 4000억 원을 돌파했다.

    이 밖에도 2009년 퇴직연금을 도입한 삼성그룹의 경우 총 43개 퇴직연금 가입 계열사 중 42개사가 삼성생명, 삼성증권 등에 몰아줬다. 1월 1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삼성생명이 가지고 있는 그룹 계열사 퇴직연금은 총 3조467억 원에 달한다. 롯데손해보험 역시 롯데그룹 계열사 퇴직연금 1598억 원을 맡았다.

    운용사 “타사 잘나가는 상품 껴주겠나”

    한 계열사가 동일 계열 금융회사에 퇴직연금을 몰아줬을 때 나머지 계열사도 뒤따를 소지가 크다. 2009년 퇴직연금을 도입한 LG전자는 산업은행, LIG손해보험, 굿모닝신한증권 등 퇴직연금 사업자 9곳을 선정했다. 이후 퇴직연금을 도입한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은 굿모닝신한증권, 우리투자증권, LIG손해보험, 교보생명 등 4개 업체를 사업자로 선정했다. 큰 틀에서는 LG전자를 뒤따른 셈이다. 한편 LG그룹에서 계열 분리해 나온 LIG손해보험은 LG그룹 계열사의 퇴직연금 사업자로 대부분 선정됐다.

    그러다 보니 올 1분기 퇴직연금 운용기관을 선정할 계획인 기아자동차(이하 기아차) 역시 현대차와 마찬가지로 같은 계열사인 HMC투자증권에 몰아줄 소지가 크다. 기아차가 퇴직연금 사업자로 HMC투자증권을 단독 선정하면 HMC투자증권은 전체 퇴직연금 업계 5위권에 진입하게 된다. 하지만 기아차 노조는 “계열사 밀어주기가 아니라 운용 능력이 가장 뛰어난 곳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 진통이 예상된다.

    2월 6일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퇴직연금에 대해 “트렌드에 따라 동네축구 하듯 몰려다닌다”며 “열어놓은 자유를 속박할 생각은 없지만 당국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금융당국도 퇴직연금 계열사 몰아주기를 막을 대책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퇴직연금 사업자는 회사와 노조 합의를 통해 선정하는데, 합의만 이뤄진다면 동일 계열 금융회사 밀어주기 자체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10년 3월 공정위는 “대기업 계열사 간 퇴직연금 몰아주기는 부당지원에 해당할 수 있다”며 조사에 착수했지만 11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한 금융계 관계자는 “공정위는 2009년 삼성그룹 계열사 95%가 삼성화재에 손해보험을 몰아준 것에 대해 조사하겠다고 밝혔지만 발표하지 않은 전력이 있다”며 “이번에도 슬쩍 넘어가지 않겠느냐”고 예상했다.

    한 공정위 관계자는 “공정위가 경고탄을 쏴놓고 발표하지 않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정위 측에서 ‘퇴직연금 대기업 몰아주기는 불법행위가 아니다’라고 발표를 하면 대기업이 대놓고 퇴직연금을 몰아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대기업이 이와 같은 비판을 감수하고 퇴직연금을 계열 금융회사에 몰아주는 것은 퇴직연금 시장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이다. 현재 퇴직연금 사업자는 총 56개. 이 중 삼성생명, KB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기업은행 등 상위 5개 사업자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의 50% 이상을 차지해 나머지 51개 사업자가 절반의 파이를 나눠야 한다. 게다가 근로자가 한 번 퇴직연금에 가입하면 퇴직 때까지 사업자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어, 초기 사업자로 선정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묻지마 퇴직연금 몰아주기?
    초기 시장 진입에서 살아남으려는 56개 사업자가 내세우는 가장 확실하고 손쉬운 무기는 바로 경쟁자보다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업계 5위권 사업자의 한 관계자는 “시중금리는 3.5% 내외지만 통상 0.5~1% 포인트 더 높게 금리를 제시한다”며 “겨우 역마진이 안 나는 최대 수준”이라고 말했다. 퇴직연금 사업자 간 고금리 경쟁이 가장 심했던 2010년 상반기 한국수력원자력 퇴직연금 유치전(戰)에서 신한은행은 당시 예금금리의 2배가 넘는 연 7.5%의 고금리를 제시하기도 했다.

    워낙 경쟁이 치솟다 보니 금리 이상의 ‘떡고물’을 제시하는 사업자도 있다. 2010년 말 한 대기업 퇴직연금 사업자 입찰에 참여했던 증권사는 퇴직연금 사업자로 선정되면 콘도 무료이용권 및 무료 종합검진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한 금융계 관계자는 이 같은 ‘고금리 전쟁’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누군가 상대적으로 고금리를 받았다는 것은 곧 다른 누군가가 손해를 봤다는 뜻이다. 결국 힘 있고 돈 많은 대기업 근로자는 고금리로 대우받으며 퇴직연금에 가입하고, 힘없고 급여 적은 중소기업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저금리를 받을 확률이 높다. 퇴직연금 금리의 양극화이자 계층화다.”

    대어 놓친 경쟁사들 속만 태워

    묻지마 퇴직연금 몰아주기?
    계열 금융회사가 퇴직연금 운용관리를 독과점했을 때 불이익을 받는 것은 가입자다. 여러 사업자가 한 회사의 퇴직연금 운용관리 사업자로 선정되려고 경쟁을 하면 일반적으로 경쟁업체보다 좋은 조건,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하므로 가입자에게는 이익이다. 반면 경쟁 없이 계열 금융회사에 몰아주면 근로자들이 이런 혜택을 놓칠 수 있다.

    여기에 근로자가 가입할 수 있는 상품 풀(pool)이 줄어들 소지도 크다. 계열 금융회사가 퇴직연금 운용관리를 맡게 되면 자사의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제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 금융계 관계자는 “운용사가 무조건 자사 제품으로만 상품 라인업(line-up)을 짜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경쟁사의 잘나가는 주가연계증권(ELS)을 팔기는 껄끄럽지 않겠나. 자사 상품을 팔아야 수수료에서도 이익이다”라고 말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HMC투자증권은 아직 라인업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신생회사인데 그 많은 고객의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시도조차 못 하고 적립규모 1조 원의 ‘대어(大魚)’를 놓친 경쟁 증권사들이다. 특히 현대차는 여러 경쟁업체가 사업자로 선정되기 위해 임직원 대상 무료 퇴직연금 교육을 하는 등 공식, 비공식적으로 노력했지만 입찰제안서마저 내지 못하고 지붕만 쳐다보게 된 것. 하지만 경쟁 사업자들은 퇴직연금 계열사 몰아주기에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문제를 적극 제기할 수 없다. 괜히 볼멘소리를 했다가 미운털이 박히면 동일 계열 자산운용사가 상품 풀에 넣어주지 않을 수도 있고, 기타 계열사들까지 사업자로 뽑아주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감독당국이나 경쟁사들이 묵인하고, 가입자는 자기 권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퇴직연금 몰아주기 및 과당경쟁은 점차 확대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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