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4

2011.02.14

대한해운 사기극이 기가 막혀

유상증자 40여 일 만에 법정관리 신청 파문…뒤통수 맞은 투자자만 “분통 터져”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11-02-14 0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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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해운 사기극이 기가 막혀

    대한해운은 과도한 용선 비용 때문에 유상증자를 한 지 한 달여 만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게 됐다.

    1월 25일 국내 4위 해운업체인 대한해운이 유상증자를 실시한 지 불과 40여 일 만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기업회생 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은 한 편의 사기극을 연상시킨다. 회사의 부실을 숨긴 채 무리하게 자금을 차입하려 한 경영진이 주연이라면 엉터리 신용평가를 한 신용평가사(이하 신평사),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주관 증권사들, 부실심사 의혹을 받는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은 조연으로 열연했다. 이 회생 절차를 법원이 기각하면 청산 수순을 밟게 돼 주식은 정리매매에 들어간다. 회생이 개시되면 주식은 관리종목으로 편입되며, 일반적으로 관리종목이 되면 주가는 크게 떨어진다. 어떤 경우가 됐든 기존 주주는 물론 유상증자에 참여한 투자자들은 꼼짝없이 피해를 보게 됐다.

    대한해운은 2008년까지만 해도 3조 원대의 매출과 5000억 원의 영업이익을 자랑하는 튼실한 회사였다. 하지만 경기에 민감한 용선업(화물 운송을 위해 보수를 지급하고 남의 선박을 빌리는 일)이 발목을 잡으면서 2009년 4881억 원의 영업손실을 본 데 이어 2010년 하반기까지 누적 548억 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증자 과정 곳곳에서 허점 발견

    그러자 대한해운은 회사채 발행과 유상증자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한 달여 만에 스스로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투자자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렸다. 대한해운 측은 “해운업 경기 악화 탓”으로 책임을 돌렸지만, 경기 사이클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비싼 용선료를 지불하며 배를 빌린 것은 분명한 패착이었다.

    망하기 직전의 대한해운이 투자자의 돈을 사기 쳐 ‘먹튀’에 성공한 데는 유상증자 과정 곳곳에서 일조한 증권사, 신평사, 금융당국의 책임이 크다. 유상증자를 위한 신주발행에 관한 이사회 결의가 있으면 해당 회사는 금융위원회(이하 금융위)나 금감원 등 금융당국에 유가증권신고서를 제출하고, 금융투자협회에 신주배정 기준일을 신고한다. 이어 증권사에 신주발행을 의뢰하면 증권사는 신주발행 절차를 대행한다. 증권사는 투자설명서를 만들어 배포하며 유상증자 투자자를 모집한다.



    이때 증권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당 기업에 대한 투자 적격성을 가장 먼저 점검하기 때문이다. 증권사들은 유상증자를 주관하기에 앞서 해당 기업에 대한 실사를 나간다. 그런데 주관사의 실사 시점과 실제 유상증자 시점 간에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 이상 괴리가 발생한다. 대한해운의 경우 이 때문에 치명적인 결과가 빚어졌다.

    현대증권, 대우증권 등 대한해운 유상증자 주관사들이 실사를 벌인 것은 10월 중순. 당시 BDI지수(발틱운임지수)는 2700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투자자들이 유상증자에 참여한 12월 말 BDI지수는 1000포인트 이상이나 빠져, 1700선도 깨지기 직전이었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12월 초만 해도 BDI지수가 2000대를 유지해서 급격히 하락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상황이 달라지면 실사를 맡았던 증권사는 증자 절차를 중지해야겠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금껏 실사 때와 상황이 달라졌다고 증자 절차를 취소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권리락의 특수성 때문이다. 상장회사가 증자를 하는 경우 신주인수권을 확정하기 위해 신주배정 기준일을 정한다. 이때 그 기준일의 익일 이후에 결제되는 주권에 대해선 신주인수권이 없어지는데 이를 권리락이라고 한다. 우리투자증권 IB영업전략부 곽석주 부장은 “권리락은 신주인수권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주가가 낮게 형성된다. 유상증자가 취소돼 신주인수권을 받을 수 없는 데다 주가마저 떨어진다면 주주들이 가만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유상증자를 신청한 회사에서도 갑작스럽게 증자를 취소하면 신용에 타격을 받기 때문에 자진 철회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증권사의 투자위험에 대한 안이한 태도가 화를 키웠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는 재탕, 삼탕 반복되는 투자설명서에 여실히 드러난다. 대한해운의 유상증자를 주관한 현대증권과 대우증권의 유상증자 투자설명서는 2010년 11월 말 400억 원 회사채 발행 때의 투자설명서와 유사하다. 투자위험 부분에 대한 설명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동안 진행했던 투자설명서에서 ‘토씨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현대증권을 비롯한 다수의 증권사는 유상증자 등의 투자설명서를 작성할 때 예전 투자설명서를 참고하는 일이 관행적으로 이뤄져왔다는 점을 시인했다.

    관련 기관들 책임 떠넘기기 급급

    대한해운 사기극이 기가 막혀

    유상증자를 주관한 증권사들은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항변했지만, 투자자들에게 위험에 대한 고지를 제대로 했는지에 대해선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대우증권 내부 모습.

    증권사는 비록 기존의 투자설명서와 유사한 대목이 많지만 위험 가능성에 대해선 충분히 기재를 했다고 주장한다. 현대증권 기업금융부 김상현 팀장은 “금감원과 협의를 통해 중요 사항은 두꺼운 글씨로 처리해 투자자들의 주의를 끌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증권의 설명대로 투자위험에 대해 분명히 명시했다 치더라도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투자설명서를 제대로 읽는 투자자는 거의 없다. 결국 투자자들에게 투자위험을 제대로 설명했는지 따지고 들면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증권사는 투자설명서에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투자에 대한 긍정적인 요인과 부정적인 요인을 기재한다. 이때 증권사들은 신평사의 신용평가를 상당 부분 참조한다. 신평사는 채권 발행 기업의 위험 수준을 평가해 신용등급을 매기는데, 이는 투자자들이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문제는 신용등급 평가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다. 현재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종합평정이 가능한 3개사(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한신정평가)의 과점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과점 체제가 오래 유지되다 보니 경쟁이 제한돼 신용평가 능력에 대한 불신이 끊이지 않았다.

    더 우려되는 것은 신용등급을 매기는 기업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이해상충의 문제다. 당연한 얘기지만 기업은 자신에게 불리한 신용등급을 매기는 신평사에 일을 맡기지 않으려 한다. 신평사가 기업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탓에 평가 결과가 왜곡될 수 있는 셈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서정호 연구위원은 “수임을 늘리기 위해 신평사들이 관대하게 등급을 주는 경향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한해운이 신용등급을 부여받는 과정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2008년 6월 대한해운은 한국기업평가(이하 한기평)에 기업 신용등급 평가를 의뢰했고, 한기평은 A- 등급(긍정적)을 매겼다. 그러나 2009년 2월 한기평은 대한해운에 대한 의견을 수정했다. A-의 신용등급은 유지시켰지만 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조정한 것.

    사문화된 금감원 ‘수리거부권’

    그러자 4개월 후 대한해운은 800억 원어치 회사채 발행을 준비하면서 한기평을 뺀 한국신용평가(이하 한신평)와 한신정평가(이하 한신정)에 신용등급 평가를 의뢰했다. 2009년 6월 한신평과 한신정 평가는 나란히 대한해운 회사채에 A- 등급(부정적)을 부여했다. 2009년 말에 이르러서야 대한해운의 회사채 신용등급은 A-에서 BBB+(안정적)로 한 단계 강등됐다. 이후 신평사들은 해운업계 시황이 급변하는데도 1년이나 BBB+ 등급을 유지했다. 신평사들은 1월 25일 대한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나서야 투기 등급인 D로 내리며 고질적인 뒷북평가 행태마저 보였다.

    앞서 언급했듯 유상증자를 하려는 회사는 유상증자에 관한 증권신고서를 금융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본시장법) 제119조 이하에는 증권신고서에 관한 규정이 나와 있다. 대한해운이 유상증자 한 달여 만에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시장 일각에선 증권신고서를 수리한 금감원이 부실 심사를 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금감원은 “대한해운이 제출한 증권신고서를 부실 심사하지 않았다”며 반박했다. 증권신고서 제도는 발행인이 제출한 신고서 기재 사항의 충실성과 적정성을 판단하는 수리제도로 운영되는 만큼, 법상 허위 기재나 중요한 기재 사항의 누락이 없는 한 수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 금감원 관계자는 “형식적인 요소만을 따지기 때문에 허가나 승인처럼 적격성 여부 등 실질적인 요소까지 점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사실상 사문화된 ‘신고서 수리거부권’도 다시 한 번 도마에 올랐다. 2009년 2월 자본시장법이 개정되면서 신고서 수리거부권 규정이 마련됐다. 한계기업들이 자본잠식 등에 따른 상장 폐지를 모면하려고 감자와 증자를 반복해 생명 연장을 하면서 투자자들의 손실이 커지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마련된 것. 금감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상증자 등 자본 마련을 위해 기업들이 제출하는 증권신고서가 부실하면 신고서 수리거부권을 행사하겠다며 한계기업을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관련 규정이 만들어진 그때부터 2011년 2월 현재까지 실제 거부권이 행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대신 정정 요구를 해왔다. 2010년 제출된 총 868건의 증권신고서 중 13.7%에 해당하는 119건이 금감원으로부터 정정 요구를 받았다. 수리거부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금감원 기업공시국 관계자는 “문제가 된다 싶으면 기업들이 자진 철회하니 수리거부권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해명했다. 시장에 수리 거부 사실이 알려지면 기업 평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다 보니 기업들이 선수를 친다는 설명.

    상황이 이렇지만 누구도 앞장서서 사태를 수습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서로 ‘자신이 피해자’라며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대한해운은 투자자들에게 사과는커녕 경영권 지키기에 골몰해 빈축을 사고 있다. 현행 통합도산법(채무자 회생과 파산에 관한 법률) 제74조에 따르면 기존 대주주에게 재산 유용이나 은닉 또는 중요한 경영부실 책임이 없으면 그를 관리인으로 선임하도록 한다. 대한해운은 외부적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법정관리 이후에도 경영권 유지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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