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0

2010.11.01

도란도란 들려왔다, 다른 세상 꿈꾸던 목소리들

모악산 마실길

  •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입력2010-11-01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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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란도란 들려왔다, 다른 세상 꿈꾸던 목소리들
    내장산, 설악산, 오대산 등 유명한 산이 등산객으로 몸살을 앓는 계절이다. 검붉은 단풍 빛깔이 각양각색의 등산 점퍼 색깔에 눌려버릴 정도다. 모악산 마실길 구간 중 귀신사에서 출발해 싸리재를 넘어 동곡약방으로 내려오는 길의 단풍은 유명산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호젓한 것으로는 최고다. 그윽한 숲길의 정취를 독차지한다는 설렘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10월 26일 싸리재를 넘어가며 단 한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 산이 다 내 것 같은 기분, 이런 호사를 어디서 누릴까. 11월 중순이면 마실길이 완성돼 방문객이 크게 늘 것이다. 그 전에 숲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부지런히 짐을 싸자.

    음기 누르려고 남근석을 등에 진 석수 세워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귀신사(歸信寺)에 도착했다. 절 입구 계단을 오르는데 초등학생 3명이 달려와 기자를 반겼다. 전주에 사는데 할머니 49재를 지내러 왔단다. 아이들은 수첩을 들고 메모하며 걷는 기자를 신기해하면서 따라붙더니 쉴 새 없이 수다를 늘어놓았다. 고찰의 고즈넉함을 놓치기 싫었지만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어느새 귀가 솔깃했다.

    귀신사 입구에 묶여 있는 누렁이의 이름은 불가에서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다. 개집이 2개인 이유를 물으니 다른 개 ‘해탈’이는 언젠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축구를 잘해 인기가 많은 개였단다. 아이들은 “해탈이가 없어져 보리가 심심하다”며 개와 놀아줬다. 여자아이는 절 뒤편 탑전을 오르는 기자를 따라와 “돌이 삐걱거려 넘어질 수 있다”며 일일이 삐걱거리는 돌을 알려줬다. 부처만큼 마음이 곱다.

    계단 중간쯤에 수백 살 먹은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당당히 서 있다. 그 옆에는 석수상이 있다. 안내판에는 사자상이라 쓰였지만 사자인지 개인지 확실치 않다. 석수 위에는 남근석이 서 있다. 한 스님을 붙잡고 연유를 물었더니 “모악산 일대에 음기가 강해 누르기 위해서 세웠다” “백제왕의 개인 사찰이라 남근석을 세웠다”는 두 설을 들려주었지만 어느 것이 정설인지 알 수 없다. 귀신사 한가운데 있는 대적광전의 단청은 나무 색깔 그대로다. 스님은 “이는 고색(古色) 단청이다. 오래된 사찰에 어울리게 표시나지 않게 색을 입혔다”고 설명했다.



    귀신사를 바라보고 왼쪽 포장길을 따라 오르면 마실길이 시작된다. 마실길은 이웃동네, 이웃집으로 놀러 가는 길이다. 전북은 걷는 길 사업을 시작하며 ‘마실길’이란 통합브랜드를 출범했다. 모악산 마실길은 김제시, 전주시, 완주군 등 3개 시·군이 함께 조성 중이며 총거리는 약 56km다. 오늘 걸을 구간은 귀신사~싸리재~동곡마을~금평저수지~원평장터 코스로 약 10km다. 김제시는 이 코스 외에 청도리~싸리재~서강사~서릿골~금평저수지~금산사~배재를 잇는 길도 조성하고 있다. 마실길 조성을 담당한 김제시 환경과 김희종 씨와 모악산 토박이 김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최고원 상임이사가 길동무가 돼주었다.

    마실길 정상에 오르니 전북 땅이 한눈에

    도란도란 들려왔다, 다른 세상 꿈꾸던 목소리들

    귀신사 대적광전. 연유를 모르는 방문객들은 고색단청을 보고 “살림살이가 힘들어 색을 못 입혔나요”라고 묻기도 한다.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청도리삼층석탑이 있다. 귀신사가 9개의 암자를 거느리며 번성했던 시절에는 이곳까지 사찰의 터였다고 한다. 귀신사의 내력을 설명하던 최고원 이사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귀신사는 한때 개 구(狗) 자를 따 구신사였다는 것. 한 어머니가 큰아들 집에서 힘들게 일만 하다 죽은 뒤 개로 환생해 큰아들 집에 살았는데 귀여움받아 한을 풀기를 기대한 것과는 반대로 음식을 훔쳐 먹다 큰아들에게 모진 매를 맞았다고 한다. 억울한 어머니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꿈에 번갈아 나타나 하소연을 했고 뒤늦게 불효를 반성한 두 아들은 그때부터 개를 비단에 싸서 업고 안고 전국 팔도를 유람시키고, 맛난 음식을 대접했으며 개가 죽은 뒤에는 지관까지 불러 묏자리를 썼는데 그곳이 귀신사 자리란다. “바로 개 명당이다”란 말에 웃음이 터졌다.

    삼층석탑을 지나면 왼쪽으로 고압전선이 지나는 철탑과 그 아래 축사가 눈에 들어온다.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려는데 한 편의 이야기가 눈길을 잡았다. 철탑 아래 주변이 ‘여드레 약수터’ 자리란다. 앉은뱅이였던 한 사내가 이곳 약수가 몸에 좋다는 소문을 듣고 8일 동안 두 팔로 기어올라가 마침내 약수를 마시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전설이 있다. 이제는 약수터의 흔적조차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여기서 길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경사진 맨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야 한다. 길이 임도(林道)라 차 한 대가 지날 정도밖에 안 되지만 오가는 차량이 없어 걷기에는 아쉬움이 없다. 이 코스는 산악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이 종종 찾는다. 경사진 길을 30~40분 오르면 또 한 번 갈림길을 마주하는데 바로 싸리재다. 전봇대에 표지판이 걸렸는데,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선암1길은 금구면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곧장 오르는 청도6길은 구성산 자락을 따라 오른다. 김제시는 마실길 개장 전에 이곳에 마실길 코스 안내도를 설치할 예정이다.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재인 이곳에도 사연은 많다. 동학 농민들은 일본군과 관군을 피해 도망 다니며 불을 지펴도 연기가 나지 않는 싸리나무, 청미래덩굴 뿌리로 밥을 지었다. 먼 길을 이동해야 하니 무거운 가마솥 대신 쇠가죽으로 밥을 했다. 쇠가죽을 네 방향으로 팽팽히 잡아당겨 나무에 걸고, 불린 쌀을 올려 짓는 방식이다.

    귀신사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 뾰족하게 솟은 구성산 정상이 눈에 들어오더니 어느새 마실길 정상에 올랐다. 오르막을 오르며 틈틈이 바라보던 익산, 전주 시내가 정상에 서니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탁 트였다. 맑은 날에는 부안, 변산반도 바다까지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히기 좋다.

    땀이 적당히 마르자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동곡마을까지 내리막이 이어져 발걸음에 탄력이 붙었다. 멀리 금평저수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무에 가려 사라지고 정상에서 불던 바람은 오간 데 없이 새소리만 저 멀리서 들려왔다. 조용한 숲길을 만끽하며 내려가는데 갑자기 길가에서 푸다닥 하더니 꿩 한 마리가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순간 귀신사를 지나 걸어오며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꿩도 사람을 모처럼 만나 더 놀랐나 보다. 김희종 씨는 “사전답사를 위해 여러 번 이 길을 찾았을 때도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다. 숨어 있던 길을 발굴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숨은 트레킹 코스를 개발해 도보관광객을 모으기 위함이다.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굽잇길을 한참 따라 내려오니 오른쪽에 전봇대를 눕혀 다리로 만들어놓았다. 전봇대를 건너 오르면 구성산 정상이 나온다. 전봇대 아래는 계단을 만들어놓았는데 도보관광객이 계곡에 내려가 간단한 세면을 하도록 돕는다. 아직 이 길의 이름은 없지만 나무가 병풍처럼 이어지니 병풍길로 불러도 좋겠다. 사방댐을 지나면 다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병풍길이 끝난다. 다리 아래 흐르는 계곡물에 송사리가 떼 지어 노는 게 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김제는 여름철 물놀이에 적당하게 한창 정비공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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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곡(구릿골)마을에 들어서자 농사일을 하는 주민이 보였다. 왼쪽이 원불교 원심원 방향이고 오른쪽이 동곡약방 자리로 가는 길이다. 마실길은 동곡약방으로 이어진다. 예부터 구리 등 광물이 많아 구릿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그릇을 만들어 그릇골이었는데 구릿골로 잘못 전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실길 주변에는 ‘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은데, 한때 이곳에서 사금 채취가 활발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이곳의 금덩어리를 모두 수탈했다.

    동곡약방은 증산교 창시자 강증산(1871~1909) 선생이 1908년 마을에 살던 김준상의 아내의 발가락 종창을 고쳐주고 보답으로 방 한 칸을 얻은 뒤 연 약방이다. 강증산이 이곳을 광제국이라 부르며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는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원래 초가였던 동곡약방은 사라지고 오색단청으로 장식된 기와집이 앉아 있다. 귀신사의 고색단청과 비교돼 바로 보자니 눈만 피곤했다.

    동곡약방을 나와 정면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우뚝 솟은 제비산이 보인다. 제비산은 ‘황제의 아내’를 뜻하는 산으로 음기가 강하다. 제비산 자락에는 정여립(1546~ 1589)이 살던 집터가 있다. 기축옥사의 주인공인 정여립은 조선 선조 22년 전라도에서 군사를 모아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능지처참당했다. 조정은 그의 집터도 역모의 땅이라 하여 숯불로 태우고 다시는 집을 못 짓게 했다. 제비산 중턱 치마바위는 정여립이 천일기도 끝에 날아가는 화살을 따라가 잡는다는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기축옥사를 두고 진짜 모반을 했다, 안 했다 설이 오가지만 궁금한 것은 정여립의 사상이다. 그는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대동사상으로 양반, 상놈 구분 없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천하는 따로 주인이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를 섬기더라도 임금이다’는 하사비군론 등을 전파한 열린 사상가였다.

    도란도란 들려왔다, 다른 세상 꿈꾸던 목소리들

    ‘한반도의 자궁’금평저수지 물은 호남평야를 적신다.

    후천세상 메시아가 온다는 오리알터

    백제의 한 맺힌 저항의 역사가 이어져온 모악산 일대에는 현실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을 얻고 꿈을 펼치려는 사람이 과거부터 줄을 이었다. 어머니의 산으로 들어와 매듭을 지으려 한 것이다. 강증산도 동곡마을에 들어와 여자와 상놈이 대접받는 후천개벽 세상을 꿈꾸며, 서로 맺힌 한을 풀어주고 도우며 살아가라는 해원상생(解寃相生)을 설파했다. 속된 말로 모악산은 ‘기도발이 잘 받기’로 소문났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따라 내려왔더니 금평저수지가 바다처럼 넓게 느껴졌다. 나무로 만든 데크를 따라 걸으면 물 위를 걷는 기분으로 저수지를 만끽할 수 있다. 금평저수지의 또 다른 이름은 오리알터. 오리알은 올(來) 의미이므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할 메시아가 온다는 터다. 정여립도, 강증산도, 전봉준도 이 근방 사람이다. 금평저수지 물은 만경강, 동진강을 따라 내려가 호남평야를 적시는 젖줄이 된다. 1980년대 초 김지하 시인은 생명운동 기행을 이곳에서 시작하며 금평저수지를 ‘한반도의 자궁’이라 불렀다.

    금평저수지를 지나 금산면 방향 도로를 따라 약 2km 걸어나가면 원평장터가 나온다. 한적한 시골장터 모양새지만 이곳은 전봉준이 유년시절을 보내고 마지막 전투를 치른 유서 깊은 곳이다. 최고원 이사장은 “사람들은 흔히 동학혁명군과 전봉준을 생각하면 고창, 정읍부터 떠올리지만 이곳은 1894년 11월 공주 점령이 좌절된 뒤 전봉준이 농민군을 재집결해 아침부터 밤까지 구미란 전투를 벌였던 역사적인 장소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우리 기억에서 멀어졌다. 구미란 뒷산에는 무명 농민군의 묘지 10여 기가 있었으나 봉분의 흔적마저 사라졌고, 전투를 증언해줄 안내판 하나 없다.

    도란도란 들려왔다, 다른 세상 꿈꾸던 목소리들
    이곳에서 서릿골이나 금산사로 돌아나갈 수 있다. 모악산 마실길은 조성공사가 끝나지 않아 미흡한 점이 많지만, 홀로 걷는 운치를 맛보고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개혁사상가들의 정신을 곱씹어보기엔 부족함이 없다. 마실길을 운영 관리하는 (사)마실길은 매달 음력 보름 달 밝은 밤에 ‘모악산 마실길 달빛 즈려밟기’ 행사를 열 계획이다. 전주 삼천교에서 완주군 추동마을과 학전마을을 돌아 12km 정도를 걷는다. 마실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줄 이야기꾼도 양성할 예정이니 기대가 크다. 그러나 한적한 숲길을 걷고 싶다면 지금이 딱이다.

    Basic info.

    ☞ 교통편

    승용차 | 서울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 →금산사 방면 712번 국도 →청도리 →귀신사

    대중교통 |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전주고속버스터미널 →79번 금산사행 버스(약 30분 소요) 또는 서울 →김제고속버스터미널 →청도리행 완행버스 이용(완행버스는 하루 2번밖에 운행하지 않아 전주터미널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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