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2

2010.08.30

그놈의 승인… 승인… 니들이 비정규戰을 알아?

워싱턴과 펜타곤 관료체제 여전… 미국서 “아프간도 이길 수 없다” 쓴소리 터져나와

  • 주성민 군사문제 전문 자유기고가 bluejays@kebi.com

    입력2010-08-30 11:4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공격용 험비(HMMWV) 지프가 실린 헬리콥터에 무장 병력이 탑승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존재 자체가 기밀로 분류된 델타포스 소속이며 고가치 표적의 추적에만 동원된다. 스피커에서 기장의 농담이 들려왔다.

    “환영한다, 신사분들. 마일리지는 알아서 챙겨라.”

    2개의 강력한 회전날개가 돌아가자 소음이 귀를 때리며 대형 수송헬기 CH-47 치누크가 이륙했다. 헬기의 엔진 소음 때문에 거의 모두가 사운드가드 상표의 스펀지 귀마개를 하고 있었다. 작전지역에 이르자 헬기는 내리꽂히듯 급격히 하강했다.

    아프간전쟁이 시작된 지 2주일째인 2001년 10월 20일 이른 아침, 델타부대는 칸다하르 외곽지역을 기습했다. 이곳에는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Mullah Omar)의 집이 있다. 작전을 기획한 중부군 사령부는 물라를 체포하거나, 최소한 탈레반의 비밀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사령부는 특수부대 레인저를 델타보다 먼저 보내놓았다. 낙하산으로 침투한 레인저부대 180여 명이 물라의 집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대기해 있었다. 레인저의 임무는 델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탈레반의 매복에 당한 특수부대

    치누크가 착륙하자 델타부대는 험비에 시동을 걸었다. 그들은 물라의 집과 주위의 작은 집 몇 채로 이뤄진 기지를 기습해 들어갔다. 델타의 적지 침투능력은 미군에서 최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물라의 집은 비어 있었다. 100여 명의 델타가 집집이 수색했으나 모두 빈집이었다.

    수색을 끝낸 부사관이 지휘관에게 보고하는 순간,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탈레반은 유리한 지형에 매복해 있었고 공격하러 간 델타부대는 공격을 받았다. 상황은 절대적으로 델타에 불리했다. 적은 기관총과 로켓 유탄발사기인 RPG, 박격포까지 동원해 공격해왔다. 십자포화에 걸려든 델타들에게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들어 부상자가 속출했다. 지휘관이 소리치며 명령했다.

    “소단위로 나눠 철수한다!”

    그들은 4명, 6명씩 나뉘어 부상한 동료들과 함께 퇴각하기 시작했다. 헬기가 기다리는 지점으로 한 조가 철수해 들어가면, 다음 조들이 엄호사격을 했다. 끝없이 날아와 터지는 로켓탄과 박격포탄 속에서 엄호와 철수를 반복하며 헬기에 올라탔다.

    간신히 퇴각이 완료될 때쯤 지원부대가 날아왔다. 4대의 근접지원용 항공기 AC-130 스펙터가 정밀타격에 들어갔다. 저공비행으로 선회하는 스펙터에서 휴대용 전기톱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스펙터의 거대한 6연장 개틀링 기관포가 돌아가면서 25mm 탄과 40mm 탄을 적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스펙터가 꼬리를 물고 적에게 접근해 105mm 포탄까지 퍼붓는 틈을 타 치누크 헬기는 연이어 날아올랐다. 적의 집중포화 속에서 델타부대는 12명이 부상했으며 3명은 중상이었다.

    그날 오후 국방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국방장관 럼즈펠드는 미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곁에 서 있던 합참의장 마이어스는 “작전부대가 탈레반의 방해 없이 침투했고, 목표했던 임무는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발표했다. 실패한 공격의 내용은 언론에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델타부대는 이 작전을 소규모로 신속히 수행하려 했으나 중부군 사령부는 대규모 공격을 원했다. 때문에 계획을 만드느라 시간이 걸렸고, 작전을 지체한 탓에 이미 칸다하르에는 미군이 공격한다는 말이 돌았다. 탈레반에게 조직적으로 준비할 시간을 준 셈이었다.

    이런 사실에 델타부대 지휘관들은 분노했다. “제정신으로 그 작전을 만들었는지 의심스럽다. 준비도 안 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우릴 몰아넣었다. 모가디슈 이후 또 웃음거리가 됐다.”

    델타는 1993년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작전을 벌인 적이 있다. 미군은 악명 높은 군벌 지도자 아이디드를 제거하기 위해 델타와 레인저, 특수작전항공단을 투입했다. 델타와 레인저는 충분한 지원계획도 없이 작전에 투입됐다가 적의 한가운데 고립됐다. 무장한 수천 명의 적에게 포위된 델타와 레인저는 낮과 밤 동안 사투를 벌였고, 2대의 헬리콥터가 RPG에 격추됐다.

    그들은 15시간이 지나 지원부대가 도착하면서 적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이미 19명이 전사한 뒤였다. 하사와 중사를 포함한 12명의 부사관과 4명의 사병, 헬기조종사인 상급준위 3명이 하루에 모두 전사했다. 델타의 저격수 두 사람은 추락한 헬기조종사를 구하려고 자원해 목숨을 걸었다가 희생됐다. 델타의 고든 상사와 슈거트 중사에게는 미 의회가 최고의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했다. 저널리스트이며 작가인 마크 보든은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이라는 책을 통해 처절했던 모가디슈 전투 상황을 전했다.

    뒷북친 손타이 포로수용소 기습작전

    미군이 시간만 끌다 실패한 대표적 작전이 있다. 베트남에서 전쟁을 시작한 이후 1968년 말이 되자 미군은 54만 명이 주둔해 있었다. 당시 미군 항공기가 숱하게 격추돼 북베트남군에 포로가 된 조종사가 360명이 넘었다. 이들은 공군과 해군 조종사, 육군과 해병대의 헬기조종사로 대부분 하노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버지니아의 포트 벨보아 기지에는 보안사령부(INSCOM) 소속 특수정보부대가 있다. 정보부대는 미군 포로들이 갇혀 있는 수용소 한 곳을 확인했다. 하노이에서 37km 떨어진 손타이 수용소였다. 그곳에는 55명 이상의 미군이 있었고, 손타이에서 14km 지점의 산에는 수용소에서 탈출한 미군 6명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5월 중순, 사령부 정보국장실의 긴급회의에서 포로들과 탈출해 있는 6명의 구출이 급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국방정보국(DIA)은 고도정찰기 SR-71 블랙버드가 고공에서 촬영한 항공사진과 무인항공기가 저고도에서 찍은 사진을 분석했다. DIA는 그 결과를 정보부대에 통보했다. 손타이에는 50명에서 100명의 미군 포로가 있고, 경비병은 50명 내외이며, 10km 거리에 북베트남군 기지가 있어 그들이 수용소에 도착하려면 15분이 걸린다는 정보였다.

    합동참모본부는 6월 초 구출작전을 승인하며 그달 말까지 계획을 완성하라고 지시했다. 구출계획은 그린베레의 블랙번 준장이 맡았으나 6월 말이 지나도록 작전은 완성되지 못했다.

    블랙번 준장은 플로리다의 에글린 공군기지에 손타이와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 훈련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보국은 소련의 스파이위성 ‘코스모스’에 발견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8월이 돼서야 작전계획이 나왔고, 헬리콥터 부대와 지원용 C-130 허큘리스 수송기들의 훈련이 시작됐다. 현장에 투입될 기습부대의 훈련은 9월 말 완료됐다.

    이제 손타이로 날아갈 일만 남았으나 닉슨 대통령이 최종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포로 석방을 위해 북베트남 정부와 파리에서 접촉 중이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10월이 돼도 승인은 떨어지지 않았고 포로들이 확인된 지 5개월이 지났다. 블랙번 준장은 안보담당 보좌관 키신저를 찾아가 작전 허가를 요청했다.

    “성공할 가능성은 100%에 가깝습니다.”

    키신저는 실패 가능성을 고려해 확답을 주지 않았다. 또 한 달이 지난 11월 중순 백악관에서 기습에 대한 최종회의가 열렸다. 그날 오후 닉슨은 작전을 허가했다. 11월 18일 55명의 그린베레가 C-141 스타리프터 수송기로 에글린 기지에서 타일랜드의 타킬리 기지로 날아갔다. 블랙번 준장은 수개월간 극비에 부쳤던 작전을 대원들에게 브리핑했다. “이제부터 동료들을 구출하러 간다.”

    그놈의 승인… 승인… 니들이 비정규戰을 알아?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한 미군 특수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전쟁의 본질을 조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랙 호크 다운`’.

    그동안 추측만 하고 있던 대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11월 21일 새벽 2시, 알파팀의 헬리콥터가 손타이에 착륙했다. 알파팀 지휘관 매더스 대위가 대원들을 이끌고 수용소로 진입했으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구출을 반년이나 미루는 동안 포로들은 이미 다른 수용소로 옮겨지고 없었다. 기습부대원들은 허탈했다.

    그 시간 브라보팀은 엉뚱한 곳을 손타이로 알고 착륙해 공격하다가, 주둔하고 있던 북베트남군과 교전이 벌어졌다. 브라보팀은 소련군을 포함해 100여 명의 적을 사살한 뒤 퇴각했다. 알파와 브라보팀은 기습 시작 16분 후 사상자 없이 헬리콥터로 철수했다. 타킬리 기지에 있던 블랙번 준장은 무전으로 보고를 받았다.

    “작전 종료. 아군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작전 실패로 미군 조종사들은 수용소에서 6, 8년씩 갇혀 있어야 했고, 상당수는 견뎌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바그람 기지엔 지휘관만 넘쳐

    미군은 아프간에서 9년간 전쟁을 벌이고 있으나 별다른 성과도, 대안도 없다. 미군은 아프간전쟁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비정규전인 테러와의 전쟁은 재래식 군대로는 치를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규모만 큰 재래식 군대는 층층의 수직적 관료체제를 이루고 있어 비정규전에 걸맞지 않다. 결국 전쟁은 9년간 헛바퀴만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연합기동사령부는 바그람 공군기지에 주둔해 있다. 바그람에는 수천 명이 있으나 절반은 전투와 상관없는 병력이다. 규모가 큰 군대일수록 직접전투 병력은 적게 마련이고 작전에 간섭하는 지휘관만 넘쳐나게 된다.

    때문에 전방작전 기지가 당장 벌여야 할 작전도 서류 작업에 며칠이 걸리고, 바그람의 승인을 얻는 데 며칠이 더 걸린다. 바그람에서는 위험요소를 따지며 미루고, 작전 당일에 무전으로 최종승인을 또 받아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쟁 초기에는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 ‘9·11사건’ 얼마 후 2001년 9월 하순, 미 중앙정보국(CIA) 작전팀이 아프간에 도착했다. 이들은 특수부대가 침투할 길을 여는 것이 임무였다.

    10월 중순 포트캠벨 제5특전단 소속의 그린베레 ‘작전분견대 알파’가 공수돼 CIA팀과 접선했다. 알파팀은 3명씩 소단위 ‘근접항공 지원’조로 나눠 극비작전에 들어갔다. 1개조는 2명의 알파대원과 공군의 전술항공 통제병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적지에 침투해 목표를 찾아낸 뒤 항공기와 교신하며 레이저 유도장치를 가동했다. 공격기들은 레이저 빔의 유도를 따라 정밀유도직격탄 제이댐(JDAM)으로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 알파팀의 활약으로 탈레반의 무수한 차량과 병력이 파괴됐다.

    그린베레는 하이테크와 비정규전 기술을 결합해 베트남전쟁 이후 가장 역동적인 활동을 벌였고, 북부동맹군은 한 달 후 수도 카불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러 단계의 수직적 지휘계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상황에 따라 대응하라는 명령만 받은 알파팀은 수평적인 명령체계를 통해 현지 지휘관의 즉각 승인으로 공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알파팀이 결정하면 거대한 B-52가 날아와 폭격을 시작했다.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통신장비의 성능까지 좋다 보니 모든 결정이 위에서 내려온다. 위의 승인 없이는 아

    무것도 할 수 없다. 서류 작업해 올리고, 위에선 이런저런 일로 지체되고, 승인이 떨어진 뒤 공격에 나서봐야 적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다.

    아프간, 이라크 등 전 세계 미군기지와 전쟁터를 종군하는 ‘어틀랜틱 먼슬리’의 편집인이며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캐플런은 이렇게 평가한다. “아프간을 포함한 해외 미군 기지들은 워싱턴의 수직적 공룡관료체제에 짓눌려 있다. 구태의연한 사고의 장군들이 지배하는 관료제는 테러와의 전쟁 수행에 최대의 걸림돌이다.”

    전방작전 기지에서 수색작전을 나가려던 미군 특수부대 차량이 멈췄다. 하루 전 작전이 결정됐지만 무전으로 승인을 다시 받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1시간이 넘도록 출발 지시가 없자 대원 한 명이 투덜거렸다.

    “원 제기랄, 도착할 때면 우리가 간다는 소식은 다 퍼져 있겠군.”

    바그람의 공격 허가가 떨어진 것은 1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수색대가 목표지점을 기습하자 마을엔 무거운 정적만 감돌고 여자와 아이들만 있었다.

    美軍 출동 탈레반이 다 파악

    대원들은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을 통해 상당량의 총기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색 끝에 찾아낸 건 AK 소총 한 정이 전부였다. 그들은 일주일 전부터 기습을 노렸으나 무기는 다 사라지고 없었다. 바그람의 승인 없이는 신속한 작전은 말뿐이다. 승인이 늦어진 탓에 그들은 소득도 없는 마른 우물만 또 하나 팠다.

    미 국방부는 2003년 비정규전 전문가인 로스슈타인 예비역 대령에게 “아프간전쟁의 문제점을 조사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수개월간 아프간에서 머물며 전방기지를 방문하고 장교들과 부사관,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원들을 만나 오랜 시간 대화하며 문제점을 찾았다. 그는 2004년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했다.

    ‘아프간에서 미군은 승리하지 못하고 있다. 럼즈펠드가 발표하는 전쟁과 실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의 전통적 방식으로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보고서에 놀란 국방부는 로스슈타인에게 내용을 축소하고 완화시키라고 요구했으며, 그 후 은폐하고 말았다. 퓰리처를 수상한 탐사보도 전문 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시가 로스슈타인 보고서의 취재를 시작하자 전직 CIA 고위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국방부가 놀란 것은 보고서가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시는 로스슈타인을 인터뷰한 내용과 보고서에 대한 평가를 ‘뉴요커’지에 보도했다. 그는 기사에서 ‘전쟁지휘부는 지나치게 크고 복잡한 구조이며, 관료화된 굼뜬 구조가 테러와의 전쟁이란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대안도 없이 과거 소련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으며, 알 카에다는 미군에게 무자헤딘의 1980년대 전술을 쓰고 있다. 그들은 소련군을 상대했던 방법으로 미군을 피 흘리게 만들고 있다. 로스슈타인의 보고서는 CBS-TV의 전설적인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트가 1968년 베트남을 방문해 보도했던 내용과 유사하다.

    “이 전쟁에 수천 명의 병사를 더 보내도 전세를 바꿀 순 없다.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미국은 손 뗄 것을 생각해야 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