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7

2010.07.26

토종 브랜드 ‘2535 언니들’ 취향 몰랐나

온라인·해외 명품 등 달라진 의류 쇼핑 … 해외 브랜드에 시장 55% 내주며 고전

  • 이설 기자 snow@donga.com

    입력2010-07-26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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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종 브랜드 ‘2535 언니들’ 취향 몰랐나

    2008년 4월 문을 연 스페인 SPA 브랜드 ‘자라’ 코엑스점.

    “좀 더 자주 사 입을 걸….”

    기자의 학창시절을 함께한 ‘톰보이’가 부도를 맞았다. 지난 4월 ‘쌈지’가 무너진 지 석 달 만이다. 톰보이는 2006년 창업주인 최형로 회장이 숨진 뒤 닥친 경영난을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최근 국내 토종 의류브랜드들이 흔들리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의류시장의 파워쇼퍼인 ‘2535 언니들(25~35세 직장여성)’이 토종 브랜드를 외면한 탓이 크다. 과거 백화점에서 주로 쇼핑하던 이들이 온라인, 편집숍, SPA(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제조, 유통 일체화) 브랜드, 해외 명품 등으로 눈을 돌리면서, 달라진 쇼핑 패턴을 따라잡지 못한 토종 브랜드들이 고전하고 있다.

    유행보다는 가치 선호

    여대생들에게 쇼핑은 하나의 놀이다. 종일 명동거리를 누비며 서로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골라주다가 배고프면 밥을 먹고, 지치면 커피숍에서 브레이크 타임을 갖는다. 꼭 뭔가 사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용돈은 부족하고, 취향을 나누며 친목도모를 했으니까. 그러나 ‘2535 언니들’은 다르다. 쇼핑 스타일은 사람마다 제각각. 하지만 3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 실용 쇼핑을 선호했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은 달리고 직장에 얽매여 쇼핑할 시간이 부족하니 대신 빠르고 정확한 ‘득템(괜찮은 아이템을 얻었다는 뜻의 신조어)’을 선호하는 것. 또 이들은 브랜드나 유행보다 제품의 가치를 따진다.

    ◆ 브랜드보다 스타일!



    “어울리는 옷, 입었을 때 편한 옷이 딱 보여요. 브랜드나 유행보다 나한테 맞는 스타일을 첫째로 보죠.”

    일본계 기업에 다니는 5년차 직장인 김세나(29) 씨는 2년 전쯤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다. 이목구비가 단아하고 살짝 살집이 있는 편이어서 심플한 세미 정장과 진주 액세서리가 잘 어울린다. 안목이 생기자 어렵던 쇼핑이 쉬워졌다. 브랜드나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SPA 브랜드나 편집숍에서 원하는 아이템을 고른다. 그는 “스페인 브랜드인 ‘자라’와 가격대가 합리적인 편집숍, 상설매장을 좋아한다. 괜찮은 국내 브랜드 블라우스 값이 30만~40만 원인데 가로수길 편집숍이나 상설매장에 가면 10만 원이면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한 대기업에 근무하는 홍모(32) 씨는 원래 ‘시스템’과 ‘데코’ 마니아였다. 디자인과 소재가 좋아서 무엇을 사도 실패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브랜드를 가리지 않는다. 얼마 전 아이보리 스커트와 매치할 하늘색 재킷을 SPA 브랜드에서 샀다. 그는 “이대, 홍대 등지의 로드숍이나 SPA 브랜드도 백화점 옷에 뒤지지 않는다. 필요한 아이템 중 입었을 때 예쁜 옷을 사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2535’ 직장여성 대부분은 ‘가치 쇼핑’을 한다. 원하는 제품을 괜찮은 가격에 살 수 있다면 브랜드는 따지지 않는다. 패션정보업체인 PFIN 마케팅팀 서강희 팀장은 “20대는 스타일을 찾는 시기다.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면 스타일 개념이 생겨 유행을 좇을 필요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 해외 브랜드 친숙한 ‘섹스 앤 더 시티’ 세대

    건설사 해외영업팀에 근무하는 강민정(27) 씨는 자타 공인 멋쟁이다. 심심한 정장보다 호피 무늬처럼 개성 있는 스타일을 즐긴다. 독특한 아이템을 공수하는 비밀창고는 해외 로드숍. 한두 달에 한 번 출장을 갈 때마다 현지 쇼핑몰을 샅샅이 뒤진다. 얼마 전에는 베트남에서 7만 원에 황금색 실크 드레스를 건졌다. 그는 “면세점에서는 잡화류를, 현지 쇼핑몰에서는 디자인이 예쁜 옷을 본다. 취업한 이후로 출장 갈 때마다 필요한 물건을 주로 산다”고 말했다.

    온라인을 통해 현지 제품을 구매하는 해외구매대행도 인기다.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김모(26) 씨는 해외구매대행 마니아다. ‘나인웨스트’ ‘DKNY’ 등 한국에 들어온 브랜드는 물론, 미국 연수시절 좋아하던 ‘아베크롬비’ 제품도 저렴하게 산다. 그는 “국내 디자인은 천편일률이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과 만나기 일쑤인데, 해외구매대행은 그럴 위험이 적다”고 설명했다.

    95~05학번인 ‘2535’들은 외국 알레르기가 없다. 한 번씩은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와 외국 친구와 채팅을 하거나 e메일을 주고받는다. ‘섹스 앤 더 시티’ 등 미국 드라마와 케이블 패션채널의 해외 쇼 프로그램 세례를 받아 해외 브랜드에도 익숙하다.

    패션계 한 관계자는 “휴가철 면세점 쇼핑은 물론 쇼핑만을 위한 원정 쇼핑도 흔하다. 옷 욕심이 많은 패션계 피플의 해외 쇼핑 문화가 패션계 밖으로 퍼진 것”이라고 말했다.

    ◆ “실용적인 게 최고” SPA 브랜드·신진 디자이너 브랜드 인기

    토종 브랜드 ‘2535 언니들’ 취향 몰랐나

    일본 SPA브랜드 ‘유니클로’ 명동 매장 전경.

    5년차 은행원인 김연희(29) 씨는 쇼핑 대부분을 SPA 브랜드에서 해결한다. 근무지가 명동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눈스퀘어’에 들른다. 가장 큰 매력은 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디자인. ‘유니클로’에서는 티셔츠·브라톱 등 질 좋은 기본 아이템을 구입하고, ‘자라’에서는 휴양지에서 입을 만한 원피스에 눈독을 들인다. 공간이 널찍해 점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 그는 “골격이 큰 편인데, SPA 브랜드는 사이즈가 넉넉하다. 품질이 다소 떨어지지만 한두 해 입기에는 무난하다”고 말했다.

    SPA 브랜드가 중저가 영캐주얼 브랜드 시장을 재편했다면,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는 ‘시슬리’ ‘마인’ 등 다소 고가의 브랜드들을 위협하고 있다. 국내 한 의류브랜드 디자이너인 정모(30) 씨는 브랜드 옷을 거의 사지 않는다. 복잡한 유통단계를 거치며 가격이 7, 8배 뻥튀기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다. 그의 주 쇼핑 장소는 동대문 ‘두타’, 압구정동과 신사동 가로수길 등지의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편집숍.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진 디자이너의 감성을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다. ‘패션저널’ 강두석 편집장은 “연예인 등 유명인사가 주로 찾던 편집숍이 최근 대중화됐다. 신사동 가로수길은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약진으로 새로운 쇼핑 명소로 떴다. 하지만 중저가 편집숍은 국내 브랜드나 SPA 브랜드와 경쟁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진단했다.

    ‘제조기반’에서 탈피해야 승산

    “과거 국내 소비자들은 국내 브랜드 의존도가 심했다. 스타일을 고민하기보다 브랜드가 쏘는 메시지를 수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2535’ 세대는 스타일에 자신감이 있고, 해외 브랜드에 대한 정보력이 강하다. 한마디로 패션 센스가 일취월장했다.”(PFIN 유수진 이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이어들은 트렌드를 고민하지 않았다. 매년 파리 등 패션 선진국의 트렌드를 한두 시즌 지나 그대로 들여왔다. 유행이 조금 지난 디자인이라도 매출에는 지장이 없었다. 소비자들은 해외 트렌드를 알지 못했고,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도 높았다.

    토종 브랜드 ‘2535 언니들’ 취향 몰랐나

    ‘이랜드’는 중국시장에 진출해 호평을 받고 있다. ‘엘지패션’의 SPA 브랜드인 ‘티엔지티’ 명동 매장(왼쪽부터).

    하지만 순식간에 상황이 변했다. 온라인 쇼핑, SPA 브랜드, 해외구매대행과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가 차례로 고객을 빼앗아갔다. 설상가상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데코’ ‘구호’ 등이 대기업 패션계열에 합병됐고, 수많은 중소기업이 쓰러져 나갔다. 그 흐름은 최근 ‘쌈지’ ‘톰보이’ 부도로 이어졌다. ‘블루페페’ ‘씨씨클럽’으로 유명한 중견기업 ‘대현’은 매각설에 휩싸였고, 에스콰이아는 최근 대주주가 설립자에서 사모펀드로 바뀌었다.

    반면 글로벌 브랜드는 승승장구다. 주요 백화점에 입점한 글로벌 SPA 브랜드와 명품 브랜드 매출액 모두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국내에 진출한 해외 글로벌 패션기업의 시장점유율이 55%에 이른다. 이처럼 토종 브랜드가 해외 브랜드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이유가 뭘까.

    “한국은 과거 OEM 생산기지였다. 대부분 패션기업이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해 경영 마인드나 글로벌 비즈니스 감각이 부족하다. 지금은 내수 시장에서나 해외 진출에서나 유통구조가 중요하다. 국내 기업들의 체질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유수진 이사는 국내 패션산업의 히스토리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최근 활발한 패션기업 마케팅 인력의 재배치에도 이런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보끄레 머천다이징’ ‘엘지패션’ ‘제일모직’ 등이 관행을 깨고 패션 경력이 없는 최고경영자(CEO)를 속속 영입했다. “세계 시장에서 검증을 거친 글로벌 브랜드가 강세인 것이 당연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롯데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SPA 브랜드, 명품 브랜드는 수십 년간 시행착오를 거친 반면 국내 브랜드들은 내부경쟁만 해왔다. 따라잡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패션기업들은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 중소기업은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대기업들은 자금력을 앞세워 수입 브랜드 전개에 몰두하고 있다. ‘이랜드’는 스포츠 브랜드인 ‘뉴발란스’를, ‘엘지패션’은 ‘바네사 브루노’와 ‘질 스튜어트’를 전개하고 있고, ‘제일모직’은 2008년 이후에만 10개가 넘는 수입 브랜드를 들여왔다. 국내형 SPA 브랜드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랜드’는 ‘스파오’를, ‘엘지패션’은 ‘티엔지티’에 이어 ‘티엔지티우먼’을 출범시켰다. ‘플라스틱 아일랜드’ ‘르샵’ 등 기존 토종 SPA 브랜드도 매달 백화점 브랜드 매출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섬’ 마케팅팀 백세훈 과장은 “SPA가 대세지만 일부에서는 퀄리티나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국내 브랜드들은 제조, 디자인력이 좋아 경영만 재정비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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