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3

2009.09.15

日流 Story

부럽다 그리고 두렵다!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도쿄=김동운 통신원 dogguli@hotmail.com

    입력2009-09-11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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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流 Story
    ‘발매 일주일 만에 10만부 판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가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거둔 성과다. ‘1Q84’ 한국어판은 8000만 엔대(10억원 이상)에 이르는 선인세 등으로 출간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8월25일 발간된 ‘1Q84’ 1권은 교보문고 8월 5주차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고, 발매 일주일 만인 9월1일 현재 10만부 가까이 팔렸다.

    ‘상실의 시대’ ‘도쿄기담집’ ‘해변의 카프카’ 등 하루키 전작들의 판매 또한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가히 ‘하루키 신드롬’이라고 할 만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외에도 한국에서 일본 작가들은 아주 ‘잘나간다’. 그 중심축에 있는 작가가 오쿠다 히데오. 그의 대표작인 ‘공중그네’는 현재 80만부 이상 팔렸다.

    또 다른 히트작 ‘남쪽으로 튀어!’ 역시 40만부 넘게 판매됐다. 오쿠다 히데오라는 ‘대박상품’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등 소수 유명작가의 작품에만 관심을 가졌던 국내 출판계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중그네’와 ‘남쪽으로 튀어!’를 낸 출판사 ‘은행나무’의 주연선 대표는 “2005년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가 발간된 이후 국내에 ‘진출한’ 일본 작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다양한 작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고 했다.

    실제로 교보문고의 ‘연간 소설분야 동향자료’에 따르면 100위권에 든 일본 소설이 2005년 25종, 2006년 31종, 2007년 39종에 이른다. 2008년 26종으로 다소 주춤했으나 2009년 들어선 상반기에만 25종을 순위에 올렸고, 여기에 ‘1Q84’ 발간에 따른 ‘하루키 특수’까지 누리고 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추리, 판타지, 공포물 같은 일본판 장르소설의 인기다. 최근 일본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은 ‘용의자 X의 헌신’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작품 8종을 2009년 상반기 100위권 내에 올려놓았다. 장르소설가로 분류되는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역시 국내 마니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또 일본에서 문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은 애니메이션풍(風) 장르소설인 ‘라이트 노벨(light novel)’은 특히 10대 여성 독자들이 좋아한다. 캐릭터를 중심으로 만화적인 상상력을 가미한 것이 라이트 노벨의 특징. 교보문고 관계자는 “라이트 노벨은 4~5년 전부터 별도 코너를 마련할 정도로 인기”라며 “대부분 시리즈물이라 판매가 꾸준하다”고 말했다. 8월31일 현재 일본 라이트 노벨로 분류된 발간 도서는 1755종에 이른다.

    소설뿐이 아니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이래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일본 문화 콘텐츠가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우리 문화 전반에 스며들고 있다. 과거 ‘해적판’으로만 접하던 일본 만화는 개방 이후 정식 한국어판으로 들어와 국내 팬들을 사로잡았고, 네이버나 다음 등 포털사이트에서는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일문화연구소 정지욱 학예연구관(영화평론가)은 “특이하고 독특한 이야기를 다룬 일본 만화에 빠져들던 마니아들이 ‘누구나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인터넷 환경을 만나 그 속에서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등 일본의 대표적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작품은 마니아를 넘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고, 개방 직후 ‘흥행 참패’를 면치 못하던 일본 영화 역시 소소한 일상을 섬세하게 담은 작품을 중심으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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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문화 콘텐츠 중 가장 경쟁력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애니메이션은 각종 장르의 다양한 작품이 전 세계적 사랑을 받고 있다. 케이블TV에서는 일본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2004년 이후 케이블을 통해 방영된 일본 드라마는 200여 편에 이른다. 일본 작품에서 ‘스토리’만 가지고 와 리메이크하는 경우도 많다.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는 일본 작가 요코 가미오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

    배우 김명민의 열연으로 화제를 모은 MBC 드라마 ‘하얀 거탑’과 최근 종영한 KBS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 역시 일본 소설 및 드라마가 원작이다. SBS는 일본 작가들이 시나리오를 쓰는 한일 합작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일본 문화 콘텐츠는 우리나라에서만 인기가 있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로 그의 작품은 30여 개국에서 번역, 판매된다.

    유럽, 북미권은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일본과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많이 얽힌 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아 하루키는 민간 외교관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일본 영화의 대부’라 불리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서구의 감독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 1960년 율 브린너, 스티브 매퀸 등 유명 배우가 참여해 흥행에 성공한 영화 ‘황야의 7인’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를 모티프로 제작됐다.

    ‘킬빌’과 ‘펄프픽션’으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일본 문화의 팬이다. 이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는 일본 문화 콘텐츠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비결’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읽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많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일본에서는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관련 책을 다양하게 쏟아낸다”며 “최근 양극화가 문제가 되자 1917년에 나온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이라는 책을 복간했는데, 그것이 40만부나 팔렸다”고 말했다. 책의 내용은 지금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빈곤을 바라보는 작가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책을 산 사람이 40만명에 이른다는 것.

    이처럼 일본은 책을 내면서 사회문제를 공론화하고, 일본인들은 책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일본 출판시장의 규모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일본 출판연감에 따르면 신간의 경우 1990년 4만 종을 넘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증가해 2005년 7만8000여 종으로 늘어났다. 총 발행부수는 1997년 15억7000만부를 정점으로 감소했지만, 2005년에도 14억부 수준이다.

    물론 인구에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2007년 신간 발행량이 만화를 포함해 4만1000종, 총 발행부수가 1억3000만부(대한출판문화협회)에 불과하다. 한기호 소장은 “잡지와 출판이 연계해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도 일본 출판의 특징이자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 잡지는 1994년 이후 매년 4000여 종을 발행하고 있다. 발행종수는 월간지와 주간지를 합쳐 모두 42억8000부에 이른다.

    발행하는 잡지 수와 이를 사보는 독자 수가 많은 만큼 작가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잡지를 기반으로 한 전문 라이터로 활동할 수 있다. 그 결과 자신만의 풍부한 콘텐츠를 모아 단행본을 내고, 잡지에서 글을 접한 ‘골수’ 독자들이 다시 단행본을 사서 읽는 ‘선순환’ 구조가 이어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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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신바시 역에 있는 서점. 전문가들은 소설이나 만화 등 일본 문화 콘텐츠의 인기 비결로 ‘읽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많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는다(좌). 오랜만에 ‘하루키 특수’를 누리는 국내 출판업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온·오프라인 예약판매로 이어지고 있다(우).

    대상 세분화, 맞춤형 콘텐츠 제공

    다양한 대상을 겨냥한 ‘스토리텔링’도 일본 문화 콘텐츠의 경쟁력을 키우는 요소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차이를 들자면 스토리텔링의 대상에 있다. 일본의 경우 성인용과 어린이용, 소녀용과 소년용, 직장여성용 등 고객층을 다양하게 분류하고, 거기에 맞춰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이는 출판만화도 마찬가지). 반면 디즈니의 경우 대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다.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이 소재와 내용 등이 특이하고 독특한 이유도 대상을 최대한 세분화해 이들에게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려 하기 때문. 영화도 마찬가지다. 성인물만 예로 들면 성기가 직접 노출되는 하드코어물, 성기를 모자이크 처리한 소프트물, 10대 후반~20대 초반 여성이 비키니 등의 가벼운 옷차림으로 몸매를 한껏 자랑하는 그라비아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시스템

    생존경쟁이 치열한 것도 일본 문화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런 경쟁 시스템 역시 콘텐츠를 키우는 힘이다. 컬처매거진 ‘브뤼트’의 김봉석 편집장(문화평론가)은 “만화잡지의 경우 매호 인기투표를 해서 하위권에 있는 만화는 연재를 중단한다. 그러니 작가는 더욱 독특한 소재, 탄탄한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안공간 ‘루프’의 서진석 디렉터도 “수많은 젊은이가 만화 산업에 뛰어들지만 그중 극히 소수만이 출판계에 등단해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내고, 무수한 작품 중 다시 극소수만이 좀더 큰 규모인 TV 애니메이션 산업으로, 또 그중에서 선택받은 몇몇만이 ‘극장판’ 애니메이션 시장으로 진출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피라미드 구조의 생존경쟁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특히 스토리를 발전시키는 비결이 된다.

    미디어믹스

    소설과 만화, 영화, 드라마는 물론 캐릭터 사업 등 여러 산업 간 교류를 일컫는 ‘미디어믹스’(원소스 멀티유즈)는 일본 문화 콘텐츠를 읽어내는 주요 키워드다. 서경대 일어학과 이즈미 지하루 교수는 “1970년대 출판사가 영화 산업에 진출하면서 미디어믹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출판사 소유의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고, 그 영화를 보여주면서 소설도 같이 파는 전략이었다.

    이즈미 교수는 “지금은 영화 한 편을 만들 때도 ‘영화제작위원회’가 꾸려져 영화를 소설로 각색해 출판할 것인지, TV 드라마로 만들 것인지, 캐릭터 상품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다 미리 기획한 뒤 제작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장르 문학도 비슷하다. 김봉석 편집장은 “순수문학과 달리 장르문학의 경우 창작 단계부터 편집자와 작가가 긴밀히 상의해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 다른 장르로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콘텐츠는 ‘유료’

    ‘B급 문화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아키하바라(秋葉原)는 흔히 ‘일본의 용산’이라 불리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의 용산과 다른 점 중 하나가 ‘짝퉁’ 소프트웨어, 즉 불법복제 CD나 DVD가 없다는 것. 일본인은 음악이나 영화가 수록된 CD나 DVD,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개인의 창의력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는 당연히 돈을 지불해서 구입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P2P 사이트를 이용해 음반이나 영화를 불법 다운로드하는 광경을 일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불법복제 때문에 누수될 뻔한 금액을 고스란히 수익으로 돌릴 수 있으니, 그 혜택은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일본이 전 세계를 사로잡는 콘텐츠 왕국이 된 이유를 ‘스토리 본연의 힘’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상상력, 소소한 일상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능력, 인간 본성을 자극하는 흡인력 강한 콘텐츠 등 일본만의 스토리가 전 세계인을 빨아들인다는 것. 과연 일본 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스토리의 힘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발전했으며, 한국과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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