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2

2009.06.30

사전의료지시서를 씁시다

  • 입력2009-06-26 0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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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 “자율적 요구가 연명치료 중단의 핵심이자 존엄사 첫걸음”

    사전의료지시서를 씁시다
    병원에서 약 3년간 항암치료를 받던 백혈병(혈액암) 환자 김영수(가명·10) 군의 부모는 아이의 기대수명이 1개월 정도 남았다는 판정을 받은 뒤 주치의에게 퇴원 의사를 밝혔다. 입원을 고집하지 않고 귀가하려는 이유를 묻자 이들은 이렇게 답했다.

    “지난 몇 년간 병동에서 수많은 아이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힘든 항암치료를 받느라 지칠 대로 지친, 주삿바늘에 찔려 성한 곳 없는 팔뚝을 하고 떠난 그들의 괴로운 표정이 내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김군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늘 갖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강아지를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가족과의 정든 추억을 남기고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웃으며 눈을 감았다.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허대석 교수(사진)는 이 사연을 소개하며 “갈비뼈가 부러질 만큼 엄청난 충격을 가하는 심폐소생술과 기계에 의한 인공호흡 끝에 삭막한 병실에서 마지막을 맞는 모습을 떠올리면 어떤 것이 더 존엄한 죽음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존엄사·안락사 등 용어 정립 필요”

    허 교수는 올해 상반기 한국 사회를 휩쓴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이라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죽음과,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대법원의 최근 확정판결이 죽음을 화두로 한 사회적 이슈를 어느 때보다 강하게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존엄사, 안락사, 자연사 등 용어에 대한 혼란 때문에 존엄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욱 많습니다. 1997년 미국 오리곤주의 존엄사법에 ‘의사조력 자살’이 포함됐는데 이를 계기로 특히 종교계를 중심으로 존엄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대됐습니다. 의사가 환자의 자살을 돕는 행위는 안락사입니다. 반면에 말기 환자가 연명 치료를 거부해 의사가 이를 수용하는 것은 존엄사로 그 의미가 엄연히 다릅니다.”

    허 교수는 또한 1980년과 2003년 바티칸은 교리서를 통해 ‘의미 없는 의료집착적(over-zealous)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적법(legitimate)하다’고 밝혔고, 개신교에서도 미국 교단 중 하나인 복음주의 루터교회가 1992년 ‘인위적인 영양, 수분 공급이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판단이 있으면 생명연명 장치를 제거할 윤리적 책임(morally responsible)이 있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고 주장했다.

    사전의료지시서를 씁시다

    국내에서도 완화의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사진은 수원시립노인전문요양원.

    연명치료 중단 요건의 핵심은 환자 본인의 자율적 요구다. 그러나 환자가 식물인간 등의 혼수상태라면 이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남은 가족과 의료진의 갈등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허 교수는 “현재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하는 환자 수는 전체의 1%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사나 환자 가족 모두 불치병 환자에게 병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알리지 않는 문화가 확산돼 있어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알고 대처하는 사례가 26%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각종 국민인식조사는 환자의 96%, 가족의 78%가 ‘불치병 환자에게 병의 상태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필수’라고 답해 생각과 실제의 괴리가 큰 형편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명목으로 끝까지 고통을 강요하는 사례도 한국이 미국 등보다 훨씬 많습니다. 말기 암 환자 가운데 임종 직전 1개월 동안 항암제를 사용하는 비율이 한국은 30.9%, 미국은 10%로 한국이 3배 이상 높고, 고통을 경감시키는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의 사용 비율은 미국이 한국의 25배에 이릅니다.”

    허 교수는 존엄사가 의학적 결정의 주체를 의사에서 환자로 전환시키는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강조했다. 1997년 뇌수술 환자를 가족의 요구에 따라 퇴원시켰다가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의료진에 살인방조죄가 적용된 보라매병원 사례와 평소 환자의 뜻이었다며 연명치료 장치 제거를 요청한 가족의 요구가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진 2009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사례의 차이가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존엄한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가톨릭 신자인 허 교수는 “최근 한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곱씹게 됐다”며 ‘육체적인 고통 없이, 주위 사람들에 대한 오해와 미움을 다 씻은 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을 맞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자연적인 죽음을 기계에 의존해 의미 없이 연장하는 것이 더 비종교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다운 존엄한 죽음을 위해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의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우리 사회에 확대되기를 바랍니다.”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웰다잉, ‘이벤트’가 아니라 교육 과목으로 진전시켜야

    미국에서는 웰다잉 연구와 교육이 4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로버트 풀턴 교수는 미네소타대학에 죽음준비 교육 과목을 1963년 개설했고 정신과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에 대한 연구서 ‘죽음과 임종(On Death and Dying)’을 69년 출간했는데, 이런 움직임이 미국 내 웰다잉 논의를 진전시킨 계기가 됐다. 미국은 대학은 물론 초·중·고교에서도 죽음준비 교육을 보건 교육의 일부로 가르친다.

    또 문학이나 사회과목 수업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죽음을 바라볼 수 있도록 교육하기도 한다. 뉴저지주의 고등학교 교사인 로버트 스티븐슨은 1972년부터 죽음준비 교육을 시작했다.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호스피스 센터 자원봉사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운영한다. 삶의 질만큼 죽음의 질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데다, 죽음을 제대로 알아야 삶을 바르게 영위할 수 있다는 생각도 힘을 얻어 청소년 자원봉사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다기(Dougy)센터는 뇌종양으로 열세 살 때 죽은 소년의 이름을 따서 1982년 설립된 ‘어린이를 위한 슬픔 치유와 카운슬링 센터’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왕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다기센터는 이들을 위한 상담, 치유 과정을 진행한다.

    이곳을 모태로 한 어린이 대상 슬픔치유 교육과 카운슬링 센터가 미국 전역에 개설됐다. 또한 ‘국립 죽음준비교육센터(the National Center for Death Education)’ ‘죽음준비교육과 카운슬링 협회(the Association for Death Education and Counselling)’ ‘미국 슬픔치유 카운슬링 아카데미(the American Academy of Grief Counseling)’를 통해 죽음준비 교육과 슬픔치유 전문가 양성이 이뤄진다.

    몇 해 전 불치병 선고를 받았으나 다행히 치료 가능한 췌장암으로 밝혀져 다시 회사로 돌아온 애플 컴퓨터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내게 가장 중요했다. 죽음을 생각하면 무언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열일곱 살 때 ‘하루하루가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길에 서 있게 될 것’이라는 글을 읽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죽음은 삶을 변화시킨다. 여러분의 삶에도 죽음이 찾아온다. 인생을 낭비하지 말기 바란다.”

    미국인들은 죽음을 터부시하거나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시신을 앞에 둔 채 그와 관련된 생전 일화 등을 나누며 유머러스한 추모 코멘트를 하기도 한다. 장례식장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풍경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2007년 1월18일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는 칼럼니스트 아트 부크월드의 부고 동영상이 올랐다. 동영상에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그 자신.

    “안녕하세요. 아트 부크월드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사망했습니다.”
    날카로운 풍자가 가득한 칼럼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가 자신의 부고 동영상을 미리 제작해 인터넷에 올리게 했던 것이다.

    죽음 주위에서 머뭇거리는 국내 웰다잉문화

    일본에서는 알폰스 데켄 교수가 1975년 도쿄 조치(上智)대학에 ‘죽음의 철학’ 강좌를 개설하고, 82년 ‘생과 사를 생각하는 세미나’를 개최한 후 83년 ‘생과 사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현재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53개 지역모임을 통해 5000여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또 웰다잉 교육을 보급할 목적으로 교수, 교사 등이 주축이 된 ‘죽음준비교육 연구회’는 1999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죽음준비 교육이 2004년부터 학교 교육에 포함됐고, 관련 교재 개발을 위해 2006년 예산에 400만 달러가 책정되기도 했다.

    한편 일본존엄사협회는 30년 넘게 일본 전역에서 공개강연회와 토론회를 열고 자기가 원하는 임종 방식을 준비하는 ‘생전유서(리빙윌) 준비하기’ 운동을 벌여왔다.

    사전의료지시서를 씁시다

    뉴욕 맨하탄에서 열린 현대 미술의 거장 백남준의 장례식엔 웃음이 넘쳤다. 조문객들이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로 ‘파격’의 작가를 기렸다.

    이에 동참한 사람이 벌써 12만명을 넘어섰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오쿠다 히로시 전 경제단체연합회 회장도 이 협회 회원이다. 일본변호사협회는 매년 4월15일을 ‘유언의 날’로 정하고 유언장 작성 공개운동을 벌인다. 전국 각지에서 무료 법률상담이나 강연회를 진행하며 유언장 작성을 도와주고 상속에 관한 법률지식을 알려준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일단 죽음에 대한 터부와 거부감이 뿌리 깊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최근 교회, 사찰 등을 중심으로 한 종교단체와 노인복지시설, 대학 등에서 죽음준비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명동성당에서는 ‘죽음체험 하루 피정’을 매년 11월 진행하고 서울노인복지센터, 각당복지재단과 서울 광진구, 노원구, 동작구 노인종합복지관 등에서는 노인 대상의 웰다잉 교육을 실시한다. 대학에서는 한림대 생사학연구소가 1997년부터 죽음준비 교육을 하고 있으며 일반인 대상으로 인터넷을 통해 ‘웰다잉-자살예방 전문과정’(28주 코스)를 운영 중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이는 웰다잉 교육은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입관 체험이 죽음준비 교육의 전부라도 되는 듯 여기서 머뭇거리기만 할 뿐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

    또 입관 체험은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등 일종의 ‘퍼포먼스’로 전락한 느낌이다. 죽음이 끝인지 아닌지, 과연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인지, 죽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핵심 내용을 가르치지 못한다. 생사학 전문가의 부재가 결국 웰다잉 교육의 부실로 이어지는 것. 죽음준비 교육도 노인계층을 중심으로 극히 일부만 실시될 뿐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

    자살 문제와 웰다잉 교육을 연결하지 못하고 있는 점 역시 문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살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자살률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지만, 죽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자살이 마치 삶의 고통을 덜어주는 간편한 수단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자살 예방교육 등을 포함한 웰다잉 사회운동을 적극 전개해나갔으면 한다. 또 호스피스 제도의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도 필수적이다. 연명치료 중단의 대상과 절차를 분명히 제시하는 한편 사전의료지시서 표준양식을 보급하고 유서 쓰기 생활화를 꾀하는 등 죽음문화 성숙을 위한 개인적, 사회적 노력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오진탁 한림대 철학과 교수·생사학연구소장 jtoh@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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