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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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무딘 칼로 농협 개혁하겠다고?

중앙회장 단임제·인사권 축소가 핵심 … 의원들 입으론 개혁 뒤에선 표 걱정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9-03-04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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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들은 다 죽어가는데 정치한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농협이 금융 하고 뭐 해서 돈을 몇조원씩 벌잖아. 농협이 번 돈을 농민에게 돌려주라 이거야. 농협이 돈 벌어서 사고나 치고 말이야.”

    지난해 12월4일 새벽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이처럼 강한 톤으로 농협을 비판했다.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의 비리 연루 혐의가 드러나자 작심한 듯 불신과 불만을 터뜨린 것. 이 대통령으로선 순간적으로 ‘욱’했을 수도 있다. 상인의 애환을 체험하면서 “눈물이 난다”고 토로하고, 좌판에서 무시래기를 파는 할머니에게 20년 걸치고 다니던 목도리를 건넨 것을 보면.

    어쨌든 이날 이후 바빠졌다. 농협 경영진이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고 사의 표명도 잇따랐다. 농협은 자체 개혁안을 발표하고, 정부는 농업협동조합법(이하 농협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일사천리. 그러나 급물살을 타던 농협 개혁은 칼자루를 쥔 국회에서 ‘일단 정지’했다. ‘시기상조’니 ‘9월 정기국회용’이니 하는 의원들의 ‘정지 발언’이 쏟아졌다. 결국 방송법 등 미디어관계법안 직권상정으로 국회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사실 농협 개혁은 정권 초기마다 쟁점화했고, 김영삼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세 차례 개정됐다. 사안은 다르지만 3명의 농협중앙회장이 영어(囹圄)의 몸이 됐으며, 농민들은 농협 얘기만 나오면 ‘아직 멀었다’는 반응이다. 국회에서 ‘일단 정지’된 농협법 개정안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읽을 수 있다.

    정권 바뀔 때마다 추진하다 ‘용두사미’



    농림수산식품부가 내놓은 농협법 개정안의 핵심은 농협 지배구조 개편. 신용사업 수익에 의존해온 농협 경영구조를 슬림화하고 농협 본연의 임무인 농산물 판매와 가공, 수출 등 경제사업을 강화하는 게 큰 틀이다. 거대 공룡(자산규모 206조원, 은행권 4위 규모) 농협을 분야별로 떼어내는 ‘칼’을 국회에 내놓은 것이다.

    지배구조 개편은 중앙회장의 막강한 인사권이 세종증권 매각 비리 의혹 등 각종 비리의 근본 요인이 됐다는 여론을 반영한 것이다. 중앙회장 선거는 전체 조합장의 직선(연임 제한 없음)에서 지역별 대표 대의원을 통한 간선제(단임제)로, 35명의 이사회(조합장 20명)는 30명 이내(조합장 1/2 이상 유지)의 규모로 줄였다. 중앙회장의 인사권도 축소해 대표이사, 사외이사, 감사 등을 외부 전문가가 포함된 인사추천위원회에서 후보자를 결정하게 했다. 중앙회장에게 몰린 권한을 줄이고 이사회가 실질적인 협의기구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한 것. 2006년 농협이 자회사 휴켐스를 태광실업에 매각할 당시의 의사결정 과정을 보면 중앙회장의 ‘독단 경영’과 이사회의 한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사회 규정에 따라 최소 일주일 전에는 (매각 사실을 이사들에게) 알리고 의결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런 게 없었다. 긴급 이사회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자회사(휴켐스)를 매각한다는 거였다.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안건 통과에 1~2분도 안 걸렸다.”(당시 농협 이사 A씨의 증언)

    정 전 회장은 이후 휴켐스 헐값 매각 비리 의혹에 휩싸였다.

    조합장의 권한도 제한했다. 자산 규모가 큰 조합부터 단계적으로 조합장 비상임화를 유도하고, 상임이사 임기도 4년에서 2년으로 줄이도록 한 것. 이와 함께 조합 경비로 경조사에 축의금이나 부의금품을 내는 것을 막고 임원 자격 기준도 강화했다. 기부 행위를 제한함으로써 사전선거 행위와 과열선거의 폐해를 막는다는 의도에서다. ‘촌(村)’에서 선거 출마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인물이자 경조사 ‘연락 1순위’가 조합장이란 것은 시골 출신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조합 관련 일 외에도 ‘지역 막강 파워’라는 이유로 조합장이 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며 부정선거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농협법 개정안은 또 신용사업 이익금을 경제사업에 먼저 지원하고 조합이 유통사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세제 지원도 강화했다. 2007년 일선 조합의 매출 총이익 7조3000억원 가운데 인건비 등 조직 유지비는 5조7000억원. 조합장 보수는 평균 8300만원이었다. 신용사업 이익금의 상당 부분을 조직 유지비로 충당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중앙에서 내려보내는 조합 지원 자금(2007년 6350억원 규모)은 조합 경제사업 활성화에 집중 지원하도록 했다. 이 돈은 양재동 하나로클럽 같은 대형 판매장을 매년 2개씩 지을 수 있는 액수지만 그동안 조합별로 분산 사용돼 “있는 듯 없는 듯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

    “농협중앙회장이 식사 제의를 하면 (국회의원) 서너 명은 참석한다. 지역구를 챙겨야 하는 의원으로선 (농협의) ‘돈줄’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원 자금의 사용처를 분명히 하면 국회의원이 중앙회장을 만나는 횟수는 확실히 줄 것이다. 정치 바람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국회 보좌관 A씨)

    이 밖에 농협법 개정안에는 조합 선택권을 도(道) 단위로 확대하고, 조합공동사업법인 출자자 범위도 현행 일선 조합에서 중앙회와 농업인으로 확대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산 넘어 산’이다. 국회 파행으로 ‘시계(視界) 제로’ 상태다. 2월23, 25일 열린 공청회와 상임위에선 여야(與野) 의원 할 것 없이 농협법 개정안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당위론’은 찬성이지만 ‘각론’에선 저마다 이의를 제기했다.

    모처럼 합의 →‘누더기 입법’ 가능성도

    “회장 선거를 간선제로 한다고 선거 혼탁을 방지할 수 있는가”(한나라당 Y의원) “조합장의 경조사비 제한은 상부상조 전통을 끊는 것이다”(자유선진당 L의원) “농협법 개정안은 농협중앙회장을 무력화하고 있다. 상임이사는 조합원 눈치를 보지 않고 경영만 할 것이다”(민주당 C의원)….

    국회의원이 농협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차근차근 손질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속마음은 조금 다른 듯하다.

    “사실 농촌 관련 법안은 끝(본회의)까지 가봐야 한다. 본회의에서 뒤집힐 수도 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농촌 출신 의원들은 ‘생색’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봐라. 농협 조합장과 관계자들은 농촌의 ‘오피니언 리더’다. 농협 개혁도 좋지만 ‘고심했다’ 혹은 ‘반대했다’는 제스처 정도는 해야 한다. 표도 신경 써야 하지 않겠나.”(국회 보좌관 B씨)

    농협법 개정안이 지지부진한 진짜 이유가 이렇다면 모처럼 농민단체들까지 합의한 농협 개혁은 요원하다. ‘딜’을 하는 과정에서 정부 원안 대신 ‘누더기 입법’이 될 수도 있다. 칼자루를 쥔 국회가 ‘농협 개혁의 칼’을 어떻게 다룰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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