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6

2008.10.14

‘명품 일본’ 내건 콤플렉스 내각

아소 총리, 학창시절·정치역정 모두 열등생 …‘강한 일본’ 브랜드로 정치적 치장

  • 이웅현 도쿄대 박사·정치학 zvezda@korea.ac.kr

    입력2008-10-08 15:4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명품 일본’ 내건 콤플렉스 내각

    9월 2일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정부 과천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이명박 대통령. ‘강부자’ 내각, 인프라 건설을 통한 경기부양 등 아소 다로 총리와 닮은꼴이지만 ‘유연한 변신’은 아소 총리가 빨랐다.

    일본인 특유의 ‘배려’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아소 다로는 인상도 좋지 않다. 1979년 첫 출마 연설에서 “밑바닥(下下)의 여러분!”이라고 한 것이나 한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식민지 근대화론’성 발언 등 그가 내뱉은 대내외 ‘망언’의 계보는 종이 몇 장으론 부족하다. 그렇다고 적을 만드는 요설(饒舌)이라는 자기의 약점을 모르는 것 같지도 않다. 9월16일 자민당 총재경선에서 ‘자기분석’을 해보라는 질문에 아소는 잠시 생각한 뒤 “(쓸데없는) 말 한마디 더 많은 것”이라고 답했다. 이처럼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는 망언과 오만은 한 번도 수위(首位)에 서보지 못한 명문가 자제의 기묘한 콤플렉스를 카무플라주(camouflage·위장)하는 수단이다.

    메이지 유신의 원훈(元勳)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고손자, 전후 일본 정치의 설계자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외손자, 스즈키 젠코 전 총리의 사위. 이뿐만 아니라 일본의사회 회장 및 일본 왕실과 사돈 관계. 하시모토 류타로, 아베 신조,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들과 친인척 관계. 이런 정치적 자산에 대해 아소 본인은 “어릴 때부터 내팽개쳐진 채 자랐다” “집안은 좋은데, 좋지 않게 컸다”고 평가절하한다. 학창시절 공부와 스포츠에서 뒤져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꼈고, 귀족학교 학습원 중학시절의 성적은 145명 중 140등을 했다고 한다. 도쿄대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바보 자식! 돈이 없다면 몰라도 돈 있는 놈이 세금을 축내는 짓은 하지 마라. 도쿄대는 공무원을 만드는 학교다”라고 일갈해 결국 포기했다고 변명하지만, 이는 일류대 콤플렉스의 은폐일 뿐이다.(아소 다로 ‘대단한 일본’)

    아소 총리는 1979년 금성탕지(金城湯池) 후쿠오카에서 첫 의원에 당선됐지만 1983년 낙선해 3년을 정치낭인으로 지내야 했고, 자민당 내 명문파벌 고치카이(宏池會)에 속했으면서도 1996년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첫 입각할 때까지 17년을 기다려야 했다.


    중학 성적 바닥권, 낙선도 수차례

    정치역정도 열등감의 확인과정이었다. 1979년 금성탕지(金城湯池) 후쿠오카에서 첫 의원에 당선됐지만 1983년 낙선해 3년을 정치낭인으로 지내야 했고, 자민당 내 명문파벌 고치카이(宏池會)에 속했으면서도 1996년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첫 입각할 때까지 17년을 기다려야 했다. 한때는 “찬밥 먹는 법은 내게 물어보라” 할 정도로 불운한 시기도 있었다. 총리직에도 4수 끝에야 오를 수 있었다. 2001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두 살 어린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2006년에는 열네 살이나 어린 아베 신조에게 패배했고, 2007년에는 아베의 등장으로 이미 총리직과 연이 멀어졌다고 생각한 후쿠다 야스오에게도 패했다. ‘위공회(爲公會)’의 파벌영수로서 당내 경쟁파벌 ‘청화회(淸和會)’ 후보에 3연패했을 뿐 아니라 선후배 귀공자들에게 뒤처진 셈이었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정상에 오른 명문가 열등생의 선택지는 콤플렉스를 감출 수 있는 명품 브랜드였다. 총선을 겨냥한 것도 있지만, “밝고 강한 국가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열등의식을 없애야 했다. 전례 없이 총리가 직접 조각 명단을 발표하는 퍼포먼스, 34세의 오부치 유코를 저출산 담당상으로 입각시키는 정치적 센스도 가미했다.

    아소는 ‘대단한 일본’에서 미국을 싸움에 능한(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자로,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완력은 그만 못하지만 멋있고 머리도 좋은 자로, 그리고 일본은 완력도 없고 복장과 소지품은 양질의 것이면서도 폼이 나지 않는 부잣집 아들에 비유했다.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지위에 대해서도 미묘한 열등감에 빠져 있는 것이다. 때로는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표현도 마다하지 않지만, 이 역시 기본적으로는 대미 콤플렉스의 표출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미 콤플렉스는 대(對)아시아 우월감으로 포장된다. 외상 시절 이른바 ‘가치의 외교’를 표방하며 ‘자유와 번영의 호(弧)’ 구상, 즉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일본과 동일한 가치관을 지닌 아시아 국가들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는 결국 우월의식의 외교적 수사이며 ‘중, 러 봉쇄’의 다른 표현이었다.

    ‘미일동맹’은 자민당의 영원한 외교정책 주제곡이자 아소 총리의 외조부 이래 대부분의 보수적 일본정치인들의 유전자 코드다. 전임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아버지 다케오의 DNA를 물려받아 ‘아시아 외교’를 중시한 것처럼 요시다의 DNA는 대미 콤플렉스를 지닌 아소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론-야스’(레이건-나카소네) 밀월시기를 구축했던 나카소네 전 총리의 아들 히로후미를 외상에 기용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아소 내각, MB정부와 닮은꼴 출발

    아소 내각은 여러모로 이명박 정부와 닮았다. 아소 총리 자신이 헌금문제 등 정치적 스캔들에 휩싸인 ‘말 많은’ 인물이고, 출범 며칠 만에 구설에 휘말린 낙마자도 발생했다. 정치적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한 브랜드 내각을 구성한 것도 그렇고, 균형감각을 상실한 ‘최고’ 지향도 비슷하다. 현실적인 경제정책에서 구조개혁을 통한 재정 건전화보다는 인프라 건설을 통한 경기부양을 지향하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현실주의로의 전환에서만큼은 아소 내각이 더 기민한 것처럼 보인다. ‘싸움꾼 국수주의자’(뉴욕타임스)이자 ‘뻣뻣한 우익 독설가’(AP통신)는 9월27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중국과 한국을 중요한 파트너라고 언명했다. 이미 22일의 자민당 총재직 수락연설을 통해 대외관계에서의 유연함을 암시한 신임총리는 거듭된 망발로 사임한 나카야마 나리아키 국토교통상 건에 대해서도 “각료가 되고 나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며 일본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아소는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민감한 문제들(야스쿠니 문제, 북방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사업가적 합리성에 의거한 현실적 해법을 주장해왔다. 이러한 ‘쿨 비즈 스타일(Cool Business Style)’에 총리직의 무게가 더해진다면, 콤플렉스도 해소되면서 ‘직설화법’의 횟수도 줄어들 것이다. 더불어 한일관계는 일거에 역전시키거나 단숨에 밀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총리와 각료들의 사려 깊은 말 한마디, 호의적인 행동 하나하나가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학습하게 될 것이다.

    아소 내각 지지율 바닥 이유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아소 총리의 입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신임 총리는 흔히 ‘2m 사나이’라고 불린다. 가까이에서 보면 인간적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란 뜻이지만, 멀리서 보았을 때 별로 호감을 주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낮은 지지율 때문에 1년 만에 스스로 총리직을 내놓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총리의 초기 지지율보다 아소 내각의 출범 지지율이 낮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소 총리는 아베 신조(安部晋三) 전 총리가 1년 전 돌연 사임을 선언했을 때도 총리직을 거의 손에 넣다시피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아소 포위망’이 만들어졌고, 총리 자리는 정치적 야심이 너무 없어서 문제인 후쿠다 전 총리에게 넘어갔다. 그만큼 아소 총리가 적을 많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이번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 그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인기 있는 그의 경쟁자들이 퇴장했기 때문이지 그 자신의 정치적 카리스마 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소 총리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가벼운 입’이다. 일본의 한 유력 보수신문이 아소 내각 출범에 맞춰 1면에 ‘실언(失言)도 정치력’이라는 취지의 기명 칼럼을 실었을 만큼 그의 가벼운 입은 일본 정치의 큰 불안요인 중 하나다. 아소 총리의 실언 궤적은 길고 다채로워서 주간지 주간신조가 ‘아소 다로 실언 대전집(大全集)’이라는 기사를 실었을 정도다.

    아소 내각 출범과 함께 5일 만에 사임한 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成彬) 전 국토교통상의 실언은 아소 총리의 ‘과거’에 비춰보면 애교로 봐줄 만하다. 예컨대 나카야마 전 국토교통상의 문제 발언 중 하나는 “일본은 단일민족”이라고 말해 아이누 민족의 존재를 무시한 것이다. 그런데 아소 총리는 2005년 10월 “한 국가, 한 문명, 한 언어, 한 문화, 한 민족은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소 총리의 실언 중에는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것도 적지 않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정말 풍요로운 시대죠. 노숙자도 당뇨병에 걸리는 시대니까.”(2003년 10월)

    “일본의 표준미 가격은 1만6000엔이다. 중국에서는 7만8000엔. 어느 쪽이 비싼지는 알츠하이머 환자도 안다.”(2007년 7월)

    올해 8월에는 제1야당인 민주당을 독일 나치에 비유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일본 국내 정치만의 문제라면 아소 총리의 입이 가볍다고 해서 우리가 신경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2003년 5월 한 강연에서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그도 총리가 된 만큼 예전보다 말을 극도로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입조심에 신경 쓰기보다는 이웃나라나 자기 나라의 소외계층을 존중하는 마음부터 갖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도쿄 = 천광암 동아일보 특파원 iam@donga.com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