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1

2008.04.15

꽃도 보고 盧도 보고… 상춘 관광지로 떴다

봉하마을, 평일 2천~3천명, 주말 6천~1만명 북적… 김해시에선 가족체험 마을로 개발

  • 김해=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8-04-07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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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도 보고 盧도 보고… 상춘 관광지로 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관광객들에게 “차도 한잔 못 드려 죄송하다”며 인사하고 있다.

    “여러분, 나 같으면 (봉하마을에) 안 옵니다.”

    “사모님은요?”

    “글쎄요, 쑥 캐러 갔나보네요.”

    4월1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란색 출입금지선이 쳐진 사저(지상 1층 지하 1층, 연면적 1277㎡) 입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걸어 나오자 200여 관광객의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님, 나와주세요” “익산에서 왔어요” “문경에서 왔어요” 같은 ‘면담 요청’의 대가였다.

    콤비 차림에 황토색 갈모자를 쓴 노 전 대통령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흔들며 입구 옆 1.5m 높이의 축대에 올라섰다. 축대 위에는 ‘간이 연단’인 10cm 두께의 플라스틱 팰릿이 깔려 있었다. 한 경호 관계자는 ‘만남의 광장’으로 불린다고 했다.



    “아이고, 할머니! 안녕하십니까?”

    노 전 대통령이 한 할머니를 보고 인사하자 여기저기서 “식사하셨어요?” “모자 멋져요”라는 인사말이 나온다.

    “밥은 먹었는데 목소리가 크게 안 나오네요.”

    노 전 대통령 특유의 겸연쩍은 듯한 눈 찡그림에 관광객들의 폭소가 터진다.

    “이 모자는… (예전에 쓰던) 밀짚모자가 없어졌어요. 친한 사람 중에 누가 가져갔겠죠.”

    여기저기서 카메라폰이 올라오던 중 한 관광객이 “여기 좀 봐주세요” 하자 슬며시 고개를 돌린 뒤 잠시 뜸을 들인다.

    “(그 카메라는) 줌이 안 되네요. 그럼 그쪽(으로) 가서 ‘서비스’할게요.”

    귀향(歸鄕)은 편해 보였다. 관광객들의 인사에 노 전 대통령의 적절한 유머가 이어졌고, 미간의 굵은 ‘내 천(川)자’는 적어도 관광객들과 만나는 동안만큼은 ‘뷰 포인트’가 아니었다.

    “점심도 못 드리고 차 한잔도 못 드려 죄송하고…, 처음엔 하루 종일 (카메라 촬영을) 해도 끝이 안 나서 요즘은 사진촬영 안 합니다.”

    관광객들과의 대화는 어느새 청와대 시절 이야기로 흘렀다.

    “5년간 청와대 생활을 해보니 (청와대는) 좋은 곳, 편한 곳 아닙니다. … 속이 시원하네요.”

    웃음과 박수 소리에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가 대통령 시작할 때는 내가 아니면 큰일날 줄 알았어요. 근데 그런 것도 아니더라고요.” “대통령 되면 전라도 경상도(라는 지역구도와 지역감정) 없어질 줄 알았어요. 뭐 남은 게 없네요.”

    그때 한 관광객이 “(대구 수성을에 출마한) 유시민이 (남아) 있잖아요”라고 하자 “(당선 가능성이) 까딱까딱(아슬아슬)하죠”라며 웃었다. 궁금한 듯 “남해 분 오셨어요?” 하자 손이 올라온다. “(남해·하동에 출마한) 김두관은 어때요? (당선)돼도 둘이(남)네요”라며 눈을 찡긋했다.

    꽃도 보고 盧도 보고… 상춘 관광지로 떴다

    4월1일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앞에 모인 관광객들

    적절한 등장과 유머 구사 관광객 환호

    웃음과 환호가 계속된 만담(漫談)은 때론 연설로, 때론 반성으로 25분가량 이어졌다. 관광객들과 만나는 시간은 보통 5~10분. 그는 이날 하루 약 2시간 간격으로 5차례 관광객들을 만났다.

    4월2일 오전 다시 찾은 봉하마을의 분위기는 비슷했다. 150여 명의 관광객이 박수로 노 전 대통령을 맞았다. 밀짚모자에 콤비 차림이었다.

    “여기(축대 위) 심은 나무가 장군차나무입니다. 며칠 전에 차나무 2400여 그루를 심었는데,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고 뭉쳐 다니는 사람들 있습니다. (함께) 심다, 저만 가면 안 심고 사진 찍고…, (얼굴이) 검어진 이유입니다. 나무 심는다고.”

    한바탕 웃음이 지나자 그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밥 묵자고 기다리는데…. 지각하겠네”라며 종종걸음으로 사저로 향했다.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었다”며, “대통령을 만났으니 복권을 사야겠다”며 저마다 5분간의 짧은 만남을 추억한 채 마을을 빠져나갔고, 새로 온 관광객들은 다시 사저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통령님, 빨리 나오세요” “전주에서 왔어요” 등 만남 요청은 반복됐다. 일부는 기다리다 발길을 돌렸다.

    2월25일 귀향 이후 사저에서 사는 노 전 대통령이 김해시의 주요 ‘관광상품’이 됐다. 평일엔 하루 2000~3000명, 주말엔 6000~1만1000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웬만한 놀이공원 수준이다. 김민정 문화관광해설사는 “봉하마을에 들른 뒤 김수로왕릉이나 대성동박물관 등 김해 주요 관광지를 찾는 방문객이 80~90% 늘었다”고 했다. 봉하마을이 관광객을 모아 김해시로 보내준다는 것이다. 김해시는 관광객이 대거 몰리자 주차장, 화장실, 식수대 같은 편의시설과 청소 인원을 늘렸다.

    인터넷에 밀짚모자를 쓴 채 나무를 심는 노 전 대통령의 사진이 올라오자 ‘노간지’ ‘쁘띠무현’이라는 새 별명도 생겼다. ‘간지’는 누리꾼(네티즌) 사이의 속어로 ‘좋다, 멋지다’는 뜻. 대통령 성(姓) 뒤에 붙인 것이다. ‘쁘띠무현’은 예쁘다는 표현의 ‘쁘띠’를 붙인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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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저 앞에 마련된 벽보에 글을 남기고 있는 어린이들

    깜짝 부활이냐 단순 호기심이냐

    퇴임 후 잊혀져간 역대 대통령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현실 정치와 담을 쌓은 뒤 오히려 인기가 치솟는 듯한 기현상. ‘깜짝 부활’일까, 단순 호기심일까. 노 전 대통령은 3월11일 “편 가르는 데 안 들어가서 평가가 후한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4월1, 2일 봉하마을을 찾은 관광객은 50대 이상, 지역별로는 경상·전라도에서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최소한 ‘비판적 지지’ 성향을 보였다. 한 관광객은 “‘노통’ 싫어하는 사람이 기름값 아깝게 왜 오겠느냐”고 했다.

    관광객들은 노 전 대통령의 귀향 후 ‘소탈한 행보’가 알려지면서 호기심과 호감이 생겼다고 입을 모은다.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퇴임 후 고향에 내려와 나무를 심거나 ‘발가락 양말’에 슬리퍼를 신은 모습 등이 신선하다는 반응이다. 이런 모습들이 대중적 친밀도를 높였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한 ‘높으신 분’이 ‘이웃집 아저씨’가 된 듯해 호기심과 호감을 자극했다는 설명이다.

    50대 김모 씨는 “(언론에서) 참 정겹게 보여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친구들과 왔다”며 “퇴임 후 낙향해 소탈하게 생활하는 모습이 국민정서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스타 팬 심리’와 ‘퍼포먼스’도 한몫하는 듯했다. 부산에서 온 문정이(72) 씨는 “감히 (청와대 계실 땐) 얼굴이나 봤습니까. 대통령 얼굴도 보고 사진도 찍고, 친구들한테 자랑도 할라꼬(하려고) 왔지예(왔습니다)”라고 했다. 마산에서 왔다는 김진철(54) 씨는 “10분 정도 얘기를 듣다 보면 (노 전 대통령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입담에 계속 웃게 된다. 다섯 번째 들렀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도 연설 시작과 끝에 “‘공연’하러 (여러분이)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죠. 이제 공연시간 넘었네”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의전 파괴’를 통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관광객도 눈에 띄었다. “나이도 저보다 훨씬 많으시니 형님 합시다”(30대 남성) “오빠! 모자, 저 주이소!”(50대 여성) 등등. 노 전 대통령은 “형님 하려면 내 말 잘 들어야 하는데…”라는 유머로 되받았다.

    노사모 회원이나 ‘열혈 지지자’들도 주요 관광객이다. 사저 앞에 설치된 대형 벽보에 ‘보물 같은 울 대통령’이라고 쓴 50대 여성은 대통령 재직시절 노 전 대통령의 치적, 야당과 언론의 부당한 지적을 주장하면서 변함없는 지지를 약속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산다는 그는 남편과 새벽에 출발했다고 한다.

    일부 관광객은 노 전 대통령의 연설이나 일문일답에 ‘동일화(identification)’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타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타인의 목적이나 가치를 자기 가치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4월1일 노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언론을 비판했을 때, 2일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747 프로젝트’(연평균 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 건설)와 관련한 연설을 했을 때 “저렇게 소탈한 분이 얼마나 서운했으면…” “4만 달러 시대는 어려운가봐”라는 반응으로 나타났다.

    열혈 지지자로 보이는 한 관광객이 노 전 대통령의 연설 중에 “민족의 지도자가 돼주십시오” “노무현 짱!”을 외친 게 오히려 일반 관광객들의 ‘동일화’를 반감시킬 정도였다. 순간 경계심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꽃도 보고 盧도 보고… 상춘 관광지로 떴다

    ‘벗을까 말까.’ 얼굴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모자를 벗으려는 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4월1일 퇴임 후 처음 정치권과 언론에 불만을 토로했다.

    인간적이고 신선한 모습 호감으로 작용

    주차장 슈퍼마켓에서 만난 60대 남성은 “(구호를 외친 지지자를 가리키며) 저런 사람들 때문에 (노 전 대통령) 이미지가 더 나빠지는 기라(거야)”며 혀를 찼다. “그럼 구호를 외칠 때 자제시키시죠”라고 하자 “맞아 죽을라꼬(죽으려고)”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2%’ 부족했다. 철부지 10대 팬클럽도 아니고, ‘현실적’ 성향의 고령자들이 고유가 시대에 봉하마을을 찾은 게 과연 이러한 이유뿐일까. 주차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열혈 지지자를 뺀 관광객 대부분은 ‘경유지’로 봉하마을을 찾고 있었다. 4월1일 시작된 진해 군항제와 벚꽃축제에 참가하는 관광객들, 하동 쌍계사나 김해 신어산으로 향하던 산악회원들, 김해 김수로왕릉 견학에 나선 가족들, 업무차 부산이나 대구 방면으로 가는 사람들이 ‘휴게소 봉하마을’에 들른 것이다. ‘무료입장’에다 노 전 대통령 표현대로 ‘무료공연’도 하루 4, 5회 펼쳐져 관광객들은 (노 전 대통령을) 못 봐도 ‘손해 볼 게 없다’는 반응이었다.

    광주지역 주부 산악회 모임 산덕산악회의 회장 김문정 씨는 “30여 명의 회원들과 진해 벚꽃도 보고 등산도 하려 들렀다. ‘무료입장’인 데다 운 좋으면 (대통령을) 만날 수도 있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손용석(34) 씨는 “(부산에서) 김해 공장으로 작업 물품을 받으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4월1, 2일 이틀 동안 봉하마을을 찾은 관광버스 10여 대 가운데 절반은 광주 전주 익산 등 전라도에서, 나머지는 안동 포항 등 경북에서 온 차량이었다. 차량 앞유리 하단에는 ‘진해 군항제·벚꽃놀이’ ‘부산 해운대·광안리행’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봉하마을 접근 코드’는 지역별로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전라도에서 온 관광객들에게는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의 정치 코드’가, 경상도에서 온 관광객들에게는 ‘시원하고 소탈함’ ‘구수한 사투리’ 등 ‘동일문화 코드’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은 “인간적이고 신선한 모습과 기존 대통령에 대한 인식 전환, 감성적 모습 등이 맞물리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편 김해시는 미꾸라지 잡기, 벼농사 짓기 등 농촌체험 활동과 노 전 대통령 생가 방문 등을 결합한 ‘용의 기운과 차 향기가 가득한 봉하마을’ 조성 사업을 내년에 추진하기로 했다. ‘노 전 대통령과의 만남’과 ‘가족 단위 농촌체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된다면 ‘경유지’가 ‘목적지’로 변할 수 있다는 논리다.

    정치와 담 쌓고 살고 있나

    “뭘 보고 선거하라는지… 우리 경제는 이미 대학생”


    “정치 안 하겠다”며 정치적 발언을 삼갔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4월1일 봉하마을을 찾은 관광객들 앞에서 심경을 토로했다. 작심한 바는 아니었다. 관광객들과 일문일답을 이어가던 중 김두관 유시민 후보의 총선 얘기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그는 “전라도 경상도 표 갈라서 하는 거 없애려고 대통령이 되려 했다. 소망을 이루려 했는데 된 게 없다”며 푸념한 뒤 “안 돼도 아무 미련 없다. 동네(봉하마을)나 아름답게 가꿨으면 한다”고 말했다.남북관계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잘하는데, 전직이 ‘이러쿵’ 하는 건 옳지 않다. 1년 정도 지긋이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사사건건 옳다 나쁘다 하기보다 전략적으로 일관성 있게 가야 한다”고 말해 우회적으로 햇볕정책 지속을 요구했다.

    “시비는 끝이 없다.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뜸을 들인 그는 “(야당과 언론이) ‘해라’고 하면 자기 당이 추진하다가도, 내가 하면 반대했다. 내가 하면 반대하고…”라며 불만을 쏟아냈다. “신문이 정부와 권력투쟁을 했다. 나에게도 (대통령 시절) 호감 있는 사람 많은데, 정확히 따져야 할 것은 안 따졌다” “물어뜯어야 신문 팔리는 거 아니냐”는 등의 격한 반응도 보였다.

    이번 18대 총선과 관련해선 “세금 깎으면 이익인지 손해인지 따지지 않는다. 자립형사립고 세우면 어떻게 되는지, 금산분리하면 어떤 영향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뭘 보고 선거하라는 거냐”라며 정부, 한나라당, 언론을 싸잡아 비난했다.

    이어 “정치, 언론 얘기 안 하는데 (여러분 질문에) 말렸어요”라며 “민도(民度)가 높아 잘될 겁니다. ‘공연’은 끝났습니다”라며 사저로 향했다.

    한 경호 관계자는 “이렇게 길게 얘기한 건 처음”이라고 귀띔했다. 관광객들은 “맞는 얘기” “여전하네”로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4월2일 오전 관광객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747 프로젝트’를 예로 들면서 “중학생과 대학생 중 누가 많이 큽니까? 중학생은 10cm 이상 크죠. 우리 경제는 이미 대학생입니다”라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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