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3

2007.07.10

생명공학의 윤리 딜레마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시인

    입력2007-07-09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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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ooking 논술’은 말 그대로 ‘논술 예약하기’란 뜻으로, 주제 쟁점별로 책을 소개해 ‘논술의 밑바탕’인 사고력을 길러주는 독서 논술 세미나다. 학문과 문화 장르의 칸막이를 같은 주제로 엮어내 ‘다름에서 같음’을 꿰뚫는 통합교과 지혜, 즉 ‘창의력의 샘물’을 흠뻑 마시게 할 것이다.
    생명공학의 윤리 딜레마

    감정이 있는 인공지능 로봇 이야기를 다룬 영화‘A.I(큰 사진).<br> 공상과학소설 ‘멋진 신세계’와 ‘전갈의 아이’(아래).

    제갈공명은 주군 유비의 숙원인 삼국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벌을 감행하나, 번번이 ‘위(魏)나라 잔머리의 달인’ 사마중달 때문에 애를 먹는다. 결국 우장위안(五丈原)에서 “일은 사람이 꾸미나 성공은 하늘이 정한다”는 명언을 남기고 죽는다. 공명은 삼태성의 주인별이 손님별보다 덜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뒤, 위연의 반란을 걱정하며 회군을 명하고 죽었다고 한다. 향년 54세였다.

    중달은 공명에게 혼쭐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수성(守城)만 하다 공명의 죽음을 알고 공세를 취한다. 그런데 공명이 수레에 앉아 학우선을 부치며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중달은 크게 놀라 곧바로 퇴각하고 만다. 나중에 진짜 공명이 아니라 목각인형 공명이었다는 것을 알고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나관중과 후세 사람들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쫓다(死孔明走生仲達)’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과학적으로’ 물리치는 세상이 올 모양이다. ‘삼국지’ 배경인 후한의 멸망을 알린 변괴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일이었다. 당시는 자연변괴를 천명으로 알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가 말해주듯, 자연의 섭리를 과학기술로 ‘변화’시키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미국 문단의 최근 성과인 공상과학소설 ‘전갈의 아이’(낸시 파머, 비룡소)도 ‘자연사해야 할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칠 것’이라는 걸 예감케 한다.

    소설 ‘전갈의 아이’ 복제인간 문제 심도 있게 다뤄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문예출판사)의 존 새비지가 신세계와 격리된 외곽보호구역에 사는 ‘야만인’이었듯, ‘전갈의 아이’ 주인공 마트도 대저택의 변두리 오두막에 숨어 살다가 태어난 목적이 다른 아이들에게 발견된 뒤 짐승 취급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에 의해 끔찍한 생활에서 벗어난다. 소설은 추리소설 기법으로 노인이 왜 버려진 전갈의 아이를 융숭하게 대접하는지를 보여준다.



    마트(마테오 알라크란)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 배 속이 아니라 암소 자궁에서 자란 탓이다. 바로 클론(Clone·복제인간)이다. 아버지, 그러니까 원본은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 있는 가상의 나라 ‘마약국의 왕’ 엘 파트론(전갈)이다. 그는 권력의 단맛을 영원히 맛보기 위해 천지사방 불로장생약을 찾은 진시황이나 한(漢)무제처럼 절대권력자다. 그는 영생을 누리기 위해 자신의 복제 아들들을 수없이 죽였다.

    마트는 원본 주인에게 장기를 공급하거나 아이를 낳아주는 도구로 쓰인 뒤 무참히 살해되는 영화 ‘아일랜드’의 클론들처럼 ‘엘 파트론의 8번째 클론’, 즉 미래의 장기공급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 엘 파트론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자식이 아니라, 고대부터 연구돼온 연단술(불로장생약을 만드는 게 목적임)의 성공작일 뿐이다. 그래서 ‘원본 전갈’ 엘 파트론은 ‘전갈의 아이’인 마트를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보호한다. 잘 키워 잡아먹기 위해서다.

    이렇게 자연사해야 할 공명에게 불사약을 줘 산 중달을 영원히 괴롭힐, 귀신도 까무러칠 재주가 바로 생명공학이다. 그런데 과연 죽어야 할 공명을 되살리는 게 윤리적으로 정당하냐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문학적으로’ 태어난 클론 마트는 또 ‘특수한’ 클론이기에 더욱 괴롭다. 복제인간이라면 누구나 맞는 지능파괴 주사를 맞지 않아 ‘나는 고민한다. 고로 인간’임을 아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지능이 제거되는 다른 클론과 달리 마트는 자의식이 있다. 따라서 저자는 클론의 시대가 오면 그들의 실존적이면서도 윤리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것이라고 본다.

    마트 같은 ‘멋진 신세계의 아이’들은 생물학 전체주의 체제의 통제 아래 태아 때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다섯 가지 계급으로 나뉜다. 그리고 체격·성격·지능·체질·직업·취향 등이 맞춤 제작되는 ‘자연적·사회적’ 팔자를 수면학습법, 조건반사 훈련, 전기충격 요법, ‘소마’ 약물투여 등에 의해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마트는 복제인간의 노년기인 14세가 되면 다른 클론들처럼 엘 파트론을 위해 장기를 공급하고 죽어야 할 ‘조작된’ 운명이라는 걸 인식하기에 정체성을 고민한다. ‘주체적으로’ 성장통을 앓으면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유토피아야말로 디스토피아 아닌가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난치병 치료 등 순기능과 인권침해 역기능

    결국 병에 걸린 엘 파트론은 마트의 심장을 이식해 회춘하려 하지만, 마트를 진정한 인간으로 대해주고 사랑한 멘돌리사 상원의원의 딸 마리아, 경호원 템린, 요리사 셀리아의 도움으로 마트는 복제왕국을 탈출한다. 그리고 마리아의 어머니가 쓴 책을 읽고, 독재자 엘 파트론과 그의 ‘알라크란 귀족가문’만이 복제인간의 장기로 무병장수하고 나머지 백성은 복제문명의 이기(利器)로 이용당하는 전갈마약 왕국의 추악한 전모를 알게 된다. 물론 마크의 탈출로 엘 파트론은 148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래도 공명보다 3배나 더 살았다.

    클론 말고도 ‘이짓’의 침묵시위도 흥미롭다. 그들은 미국과 멕시코를 넘나드는 불법 밀입국자들의 뇌에 컴퓨터칩을 넣어 감정과 자의식 등을 없애고 오로지 칩에 내장된 명령만 수행하는 좀비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가 컴퓨터칩으로 진화해 머릿속에 행복만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다민족 용광로’ 국가인 미국의 와스프(WASP·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인) 우월문화를 비판하는 우화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인간의 피조물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되풀이돼왔다. ‘피노키오’ ‘인어공주’ ‘프랑켄슈타인’,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의 앤드루, 영화 ‘A.I.’의 휴머노이드 로봇 데이비드가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대표적 피조물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복제인간과 인간의 싸움을 보여준 지도 시간이 꽤 흘렀고 올해 제작된 영화 ‘트랜스포머’는 변신 로봇들이 선과 악의 편으로 나뉘어 싸우고, 선의 편인 오토로봇 군단이 인류와 지구를 구하려 한다. 한국 문단에서는 ‘나무’라는 유전자변형(GMO) 아이의 성장통으로 과학과 윤리의 문제를 다룬 장편동화 ‘지엠오아이’(문선이, 창작과비평사)가 문학적 성과를 거뒀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죽을 때 죽는 것이 아름다운가’ ‘복제인간도 인간과 똑같지 않은가’ ‘인간은 태어나는 것인가 또는 만들어지는가’.

    물론 과학기술의 발달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의 발전 자체가 문제일까, 아니면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손과 양심이 문제일까. 이것은 ‘멋진 신세계’의 총통 무스타파와 야만인 존이 나누는 대화가 던진 문제였다. 또한 생명공학은 난치병 치료 등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전갈의 아이’에서 복제인간의 뇌를 파괴해 가축으로 분류하는 법을 시행하는 예가 보여주듯 민감한 인권문제다.

    무스타파 총통이 존 새비지에게 늙음, 고자, 매독, 기아, 불안, 장티푸스 등에 고달픈 권리도 원하냐고 묻자 존은 그 모든 권리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마트 또한 ‘스스로’ 복제왕국의 반골이 돼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를 갈구한다. 태어날 아이의 유전자 구성을 미리 알아서 좋은 형질을 가진 ‘나무’ 같은 아이만 낳아야 한다는 ‘적극적인 우생학’(생물학적 결정론)이 결코 유토피아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게 ‘멋진 신세계’와 ‘전갈의 아이’의 메시지인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착한 목동 지게스가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요술반지를 우연히 얻은 뒤 사악한 욕심쟁이로 변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요즘의 지게스 마법반지는 핵무기 또는 바이오 기술일 것이다. 하지만 지게스의 타락에서 엿볼 수 있듯, 우리가 지게스의 반지를 낀 채 인간의 내면에 똬리를 튼 무스타파와 엘 파트론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는 용암 속에서 녹고, 공명은 ‘자연사’한 뒤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기에 만고의 모사꾼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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