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2

2017.01.18

인터뷰

도덕적 권위 갖춘 나라 없는 게 국제사회의 안타까운 현실”

유엔 3대 요직 맡은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

  • 부형권 동아일보 뉴욕 특파원 yamye@edaily.co.kr

    입력2017-01-13 18: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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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최초 유엔 사무총장’은 떠났지만 ‘유엔 최고위직 한국 여성’의 기록 행진은 계속된다.”

    1월 1일 유엔 수장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73·8대)에서 후임인 안토니우 구테흐스 총장(68·9대)으로 바뀌는 와중에 유엔 안팎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은 강경화 신임 총장 정책특보(62·사무차장급·사진)다.

    그는 2006년엔 반 전 총장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는 외교부 국제기구국장(당시 국제기구정책관)이었다. 반 전 총장은 당선했고, 강 특보는 선거 지원 와중에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부대표 공모에 도전해 성공했다. 2007년 1월 반 전 총장은 미국 뉴욕에서 ‘한국인 최초 유엔 사무총장’ 업무를, 강 특보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 여성 유엔 최고위직’(OHCHR 부대표) 일을 각각 시작했다.



    ‘유엔 최고위직 한국 여성’

    그로부터 10년. 반 전 총장은 유력 대권주자로 변신해 1월 12일 귀국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사무차장보를 끝으로 퇴임하려던 강 특보는 신임 총장의 인수팀장에 깜짝 발탁되더니 사무부총장, 총장 비서실장과 함께 ‘3대 핵심 요직’으로 꼽히는 정책특보에 임명됐다. 구테흐스 총장은 “심각한 인권 유린, 내전이나 지역 분쟁의 문제가 심화되기 전 유엔이 그 징후를 미리 파악해 경고하고 예방적 조치를 취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이 같은 예방 외교를 위해 정책특보 자리를 신설한 것이다.



    강 특보와의 1차 인터뷰는 지난해 10월 6일 미국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 인근 한 식당에서 진행됐다. 당시만 해도 강 특보는 서울로 돌아가려고 짐을 싸고 있었다. 당시 그는 “임기는 내년(2017년) 3월 말까지인데 서울에 있는 남편(이일병 연세대 인지과학연구소 소장)과 아이들(2녀 1남)이 무척 보고 싶어 10월 말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당시 인터뷰엔 2가지 조건이 달려 있었다. 첫째, 이른바 ‘반기문 대망(大望)론’에 대해 묻지 않기, 둘째, 귀국한 다음 보도하기. 그러나 강 특보 스스로 두 번째 약속을 어겼다. 귀국 대신 사무차장보에서 사무차장으로 승진하면서 ‘유엔 최고위직 한국 여성’이라는 기록을 이어간 것이다. 첫 인터뷰 이후 인수팀장에 발탁됐을 때, 정책특보에 임명됐을 때, 구테흐스 총장의 업무가 시작됐을 때마다 추가로 전화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다.

    ▼ 반 전 총장의 당선에 기여하고, 구테흐스 총장의 출범을 주도한 전례 없는 인물이 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큰 영광이다. 반 전 총장도 ‘정말 잘된 일’이라며 축하하고 격려해줬다. 당초엔 10년 유엔 생활을 정리하고 2017년 봄부터 모교인 연세대에서 강의할 계획이었다. 한국에 있는 남편, 세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는데 (신임 총장 정책특보를 맡으면서) 뉴욕에서 혼자 지내는 삶을 당분간 계속하게 됐다.”

    ▼ 구테흐스 총장과는 원래 인연이 있었나.

    “내가 스위스 제네바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서 일할 때 구테흐스 총장이 유엔난민기구(UNHCR) 최고대표여서 몇 차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게 개인적인 인연의 전부다. 구테흐스 총장이 나에게 ‘인수팀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왜 나를 선택했느냐’고 물었더니 인수팀장 후보자 명단을 죽 보다 내 이름을 발견하곤 그냥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

    유엔 안팎에선 반 전 총장을 ‘신중한 외교관’의 전형으로, 포르투갈 총리 출신인 구테흐스 총장을 ‘과감한 정치인’ 스타일로 구분한다. 구테흐스 총장이 반 전 총장의 측근이자 아시아 여성인 강 특보를 중용한 데 대해 “원활한 업무 인수인계뿐 아니라 양성평등이나 다양성 존중 같은 유엔의 중요 가치를 동시에 충족하려는 정치 감각이 탁월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공들인 인권 탑 무너뜨린 시리아 내전

    ▼ 구테흐스 총장의 연설은 확실히 외교관보다 정치인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런 측면이 있다. 지난해 12월 12일 취임 연설에서 ‘유엔 직원 1명을 현장에 배치하는 데 9개월씩 걸린다면 그런 조직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연설문 사전 독회 과정에서 몇몇 참모가 ‘9개월은 최악의 경우이고, 2~3개월밖에 안 걸릴 때도 있다. 표현이 너무 강한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구테흐스 총장은 ‘유엔 내부 개혁을 강하게 천명할 필요가 있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사회주의자인 구테흐스 총장은 지난해 12월 16일 유엔출입기자협회(UNCA) 송년 만찬 행사에 불참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나비넥타이를 매는 화려한 만찬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사회주의자로서 나의 정치적 소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 유엔에서 10년간 근무하면서 여성과 인권 업무를 주로 담당해왔다. 인권 문제의 핫이슈가 무엇인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국제사회가) ‘사람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가던 인권 탑이 시리아 내전으로 우르르 무너진 기분이다. 최근 3년간 매일 시리아 상황을 리포트로 받아봤다. 그때마다 땅속에 머리를 처박은 채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분쟁을 빨리 끝내고 잔악한 짓을 저지른 사람 가운데 단 몇 명이라도 역사의 본보기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워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나라의 정부들이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 법 위반을 지적하고 처벌하는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인데도, 러시아 같은 일부 상임이사국이 반대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강 특보는 “세상은 갈수록 글로벌화되는데 사람들은 국제사회의 심각한 이슈에 점점 더 관심이 없어지는 것 같다. 인권 탄압이 심각한 지역의 인근 휴양지에는 관광객이 넘쳐난다. 테러의 일상화, 위기의 일상화가 ‘뉴 노멀(New Normal)’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 시리아 내전이 조만간 해결될 기미는 여전히 안 보이는 것 같다.

    “불행히도 그렇다. 시리아 정부군은 탈영하는 군인의 등을 향해 총을 쏘고, 반군의 10대 아이들을 고문해 죽이기도 했다. 반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정부군이 저격수를 배치해 임신부 배에 총을 쏘기도 했다. 잔악상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의 해결에 앞장설 ‘도덕적 권위(moral authority)’를 갖춘 나라가 없는 게 국제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미국조차 (백인) 경찰의 (흑인) 민간인 살해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은가.”

    강 특보는 바지 정장을 즐기고 반백인 머리를 염색하지 않는다. 그런 자신만의 스타일 덕에 유엔 안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있어도 눈에 확 띈다. 한국의 한 중견 여성 외교관은 “강 특보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인 내가 봐도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세련된 외모, 매끄러운 업무처리 능력, 원활한 대인관계와 함께 강 특보의 가장 큰 무기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탁월한 영어실력이다. 그는 초등학생 때 KBS 아나운서 출신인 아버지(고(故) 강찬선 씨)를 따라 미국에서 3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한 덕에 학창시절 내내 ‘영어 잘하는 학생’으로 불렸다. 이화여고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매사추세츠대에서 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인의 틀린 영어를 고쳐주는 한국인

    ▼ 외교관이 되고 싶어 정치외교학과에 간 것으로 아는데, 왜 외무고시를 안 봤나.

    “헌법 등 고시 과목이 너무 골치 아팠다. 책을 사놓고 몇 주 공부하다 집어치웠다. 그다음 ‘교수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고, 서울로 돌아와 보따리 장사(시간강사 생활)를 하다 국회에서 국회의장의 영어 연설문 작성과 통역을 맡게 됐다. 그러면서 ‘이왕 외교를 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생각에 외교부 문을 두드렸다.”

    ▼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통역을 맡으면서 유명해졌다.

    “당선인 시절 DJ의 통역을 몇 번 도와드린 적이 있다. 1998년 외교부에 특채된 뒤 대통령 통역과 외교부 장관 연설문을 주로 담당했다. DJ와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대화를 7번이나 통역했다. DJ의 말씀은 내용이 확실하고 풍부해 비교적 통역하기가 쉬웠다.”

    ▼ 영어실력이 유엔 진출이나 유엔 활동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나.

    “한국 유엔대표부의 공사참사관으로 근무하던 2004년에는 유엔여성지위위원회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할 일이 많았다.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는 보수정권답게 여성 낙태 등에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여성 인권 이슈 전체가 표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의장인 내가 회의장에서 그런 미묘한 부분을 상세히 설명하고 미국과 다른 국가의 견해 차이를 조율해야 했다. 당시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그런 나를 눈여겨봤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강 특보는 대학 시간강사 시절 영문법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까다로운 질문에 자세히 답하고, 모르면 연구하면서 영문법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영어가 모국어인 유엔 직원이 써온 보고서에서 틀린 문법을 바로잡곤 했다. 반드시 ‘왜 틀렸고, 맞는 표현이 무엇인지’를 알려줬다. 그러면 아시아인인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달라진다”고 말했다.

    ▼ 자기 나름 터득한 영어 공부의 왕도(王道)가 있나.

    “특별한 건 없다. 굳이 말하라면 수준에 맞는 영어책을 많이 읽으라는 것이다. 외국어는 아무래도 일찍 시작하는 편이 좋은 것 같다. 내 연배엔 나처럼 초등학생 시절 해외에서 생활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덕에 운이 좋았다.”

    그는 지갑에서 자신이 돌 때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애틋하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참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지’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절대 크게 잘못되는 일이 없다. 사고 치다가도 사랑의 힘으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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