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9

2006.06.13

한국 소설 시장에 ‘日流’가 있었네

지난해 391권 번역 출간 … 문학상 작품·베스트셀러 판권 경쟁 ‘전쟁 수준’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6-06-07 1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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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소설 시장에 ‘日流’가 있었네

    교보문고 광화문 매장에 설치되어 있는 일본 소설 코너.

    일본 소설을 애독하는 송희경(34) 씨는 지난 주말, 새로 사온 일본 소설집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수록된 네 편의 중·단편 중에서 두 편이 미완성작이었다. 송 씨는 책 겉표지에 있는 저자 소개를 꼼꼼히 읽어봤다. 한국계 일본인인 작가가 돌연히 자살해 미완성작으로 유고집이 출간됐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유고집’이라고 해서 미완성작이 줄줄이 실린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완결도 되지 않은 소설을 출간한다는 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요?”

    이 해프닝은 그만큼 일본 소설 출간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난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일본 소설은 총 391권. 2004년 252권, 2003년 208권에 비해 급상승했다(교보문고 총계). 한 일본 소설 전문 번역가는 “1년에 번역할 수 있는 양이 최대 10권인데 지금 이미 10권 이상이 밀려 있다. 그래서 새로 들어오는 번역 의뢰는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벨상보다 나오키상 더 쳐준다”

    출판계 인사들 사이에는 ‘한국 출판계에서는 노벨상보다 나오키상을 더 쳐준다’는 우스갯소리도 떠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일본에서 ‘한류’를 이끌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일본 소설이 ‘일류(日流)’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인기 작가들에 이어 최근에는 ‘공중그네’의 오쿠다 히데오, ‘퍼레이드’의 요시다 슈이치,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가네시로 가즈키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 소설의 번역 출간이 급속도로 늘어나다 보니 옥석이 뒤섞이기도 하고, 엉뚱하게 젊은 작가의 ‘작가선집’이 출간되기도 한다. 이제 40대 초반인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현재 국내에 11권이나 번역돼 있다. 출판칼럼니스트 한미화 씨는 “일본 소설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출판계가 일본 소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 작가가 뛰어나다고 해서 그가 쓴 모든 작품이 다 뛰어난 건 아닙니다. 수준작도 있고 범작도 있지요. 그런 점에서 마치 작가선집을 내듯, 한 일본 작가가 잘 팔리면 과거에 쓴 단편까지 모두 모아 출간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



    일본 소설 한 권을 출간하는 데 드는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톱 클래스 작가는 선인세(판권 계약을 위해 저자와 원출판사 측에 미리 지불하는 인세)만 억대에 이른다. 지난해 나오키상을 수상한 한 추리소설은 선인세 280만 엔에 계약됐다. 특히 대중성이 강한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나오키상 수상작의 경우는 선인세가 훌쩍 올라가고 경쟁도 치열하다. 이에 비해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뱀에게 피어싱’ 같은 작품을 배출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아쿠타가와상은 신예 소설가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신인상이기 때문.

    일본 소설을 많이 출간하는 한 출판사 관계자는 문학상 못지않게 일본 아마존의 베스트 소설들의 판권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한다. 이 관계자는 “일본 아마존의 베스트10에 오른 소설은 선인세 100만 엔 정도에서 경합이 시작된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문학상 수상작이나 일본 내 베스트셀러에 대한 판권 경쟁은 거의 전쟁 수준”이라고 말했다.

    사실 ‘철도원’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러브레터’ 등이 큰 인기를 끌었을 때만 해도 출판 관계자들은 ‘소설 일류’가 잠깐 불다 말 유행일 거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2004년을 전후해서 일본 소설의 인기는 잠시 주춤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지난해를 기점으로 일본 소설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가파른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국 소설 시장에 ‘日流’가 있었네

    최근 일본 소설들은 ‘감동’과 ‘가족애’에 집중하고 있다. 일견 진부해 보이는 이런 키워드가 우리 독자의 감성에 맞아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왜 일본 소설의 인기는 해가 갈수록 더 강세를 보일까? 최근 급격하게 달라진 일본 소설의 경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듯싶다. 과거의 일본 소설들은 ‘러브레터’ 류의 순애보나 첫사랑을 주로 다루었다. 그런데 2, 3년 전부터 ‘감동’과 ‘가족애’를 강조하는 소설들이 일본에서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2005년 말, 일본의 한 문학잡지는 한 해의 소설 경향을 정리하면서 “‘눈물을 쏟았다’가 2005년 일본 소설의 키워드였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 같은 ‘감동’ 키워드는 국내 독자의 감성에도 딱 들어맞았다.

    일본 소설 번역가인 양윤옥 씨 역시 일본 소설의 경향이 순애보에서 개인에 대한 성찰로, 그리고 다시 가족애로 계속 바뀌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 작가들은 정치나 통일, 민족 같은 외부 상황에 민감한 듯해요. 하지만 독자들은 일견 진부해 보이는 가족 같은 주제를 오히려 선호하거든요. 최근 번역한 일본 소설 중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는 가족의 고뇌 등 소소한 가족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았어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은 앞으로도 일본 소설은 계속 강세를 띨 수밖에 없다고 예측했다. “일본 소설들이 개인 감정에 함몰되어 있긴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에 나가야 하는 젊은이들이 갖는 공포를 위로해줄 만한 한국 소설은 사실 드뭅니다. 또 현재 일본은 ‘단카이 세대’가 몇 년 후면 정년퇴직을 맞아 그에 대한 위기감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데, 한국 역시 386 세대가 ‘사오정’ 현상을 걱정하고 있지요. 이런 공통분모들이 일본 소설 인기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봅니다.”

    일본 소설이 가장 대접받는 해외시장이 한국이라고 한다. ‘일본 소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한국에 그만한 소설이 없기 때문’이라는 한 평론가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영화로 이어지는 ‘소설 일류’

    연애시대·플라이 대디 … 어느새 영향력 막강


    한국 소설 시장에 ‘日流’가 있었네

    ‘플라이 대디’

    ‘소설 일류’의 힘이 아무래도 만만치 않다. 단순히 소설로만 잘 팔리는 게 아니라 드라마, 영화에까지 영향력이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감성적인 대사로 큰 인기를 끌었던 SBS 드라마 ‘연애시대’가 일본 작가 노자와 히사시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소설 역시 대형서점의 문학 베스트 10을 오르내리고 있다.

    ‘왕의 남자’의 이준기가 출연한다고 해서 화제가 된 영화 ‘플라이 대디’ 원작도 일본 소설 ‘플라이 대디 플라이’다. 2003년 한국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이준기가 세 번이나 읽었다는 말이 화제가 되면서 올해 급작스럽게 판매가 늘어 현재 10만 부를 돌파했다. ‘플라이 대디’는 현재 촬영을 마치고 8월 초 개봉을 목표로 막바지 작업 중이다. 영화의 배경이 일본이 아닌 한국이기 때문에 원작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재일한국인의 고뇌 부분은 사라지게 된다. 제작사인 아이엠픽처스 측은 “원작이 일본 소설이라고 해도 가족애를 주제로 하는 내용은 한국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또 나오키상 수상작인 ‘어깨 너머의 연인’은 이미연, 이태란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며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철도원’의 작가 아사다 지로가 쓴 ‘프리즌 호텔’, 기시 유스케의 호러소설 ‘검은 집’ 등도 영화화가 확정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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