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4

2006.05.09

“기죽지 마라” … 청년 백수 주연 시대

최근 영화들 다양한 실업자 등장 … 코미디·노래 통해 백수들 응원도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6-05-04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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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죽지 마라” … 청년 백수 주연 시대

    4월12일 홍대 앞 클럽에서 열린 ‘백수들의 저녁식사’.

    4월12일 밤, 서울 홍대 앞 클럽 ‘배추가게’에 트레이닝복 차림의 젊은이들이 모였다. 14일 ‘자장면 데이’를 앞두고 ‘백수들의 저녁식사’ 파티가 열린 것이다. 자장면 데이는 ‘싱글’들이 자장면을 먹는 날이지만, 자장면은 백수들의 보양식인 까닭에 의미를 확대시켜 열린 파티였다. 그러니까 이날의 ‘드레스코드’는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현대생활백수의 유니폼인 ‘추리닝’이다.

    파란색 추리닝, 주황색 추리닝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가(후렴구에 ‘대~한민국’ 믹스 버전) 제창, 국민체조를 마친 뒤 공짜로 받은 ‘전표’를 내고 컵자장면과 맥주를 타 먹었다. 그들은 ‘신나고 빛나는 밤’을 만들었다.

    “청년실업 40만명 시대랍니다. 백수들은 집에서 뒹굴어도 배고픕니다. 외롭게 혼자 밥 먹기도 지쳤습니다. 혼자 방바닥 긁지 말고 공짜 기회가 있을 때 즐겨보자는 뜻에서 모였습니다.”

    “직업이 아니라 꿈이 없으면 백수”

    이번 행사를 주최한 것은 ‘주인장닷컴’(www.juinjang.com)이란 인터넷 쇼핑몰이지만, 홍보용 행사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장’ 김도형(30) 씨부터가 ‘오리지널 백수’처럼 보이는 데다 쇼핑몰에서 파는 물건이란 게 ‘1인용 사탕기계’처럼 실용성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다닐 때는 연극을 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비누 만들기 등 황당한 사업을 벌여 종종 실업자 신세를 겪었던 그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 백수가 아니라, 꿈이 없으면 백수”라고 주장한다.



    “기죽지 마라” … 청년 백수 주연 시대

    KBS ‘개그콘서트’에서 ‘현대생활백수’ 코너로 스타가 된 고혜성 씨. 실제로 그는 오랫동안 백수였다.

    백수가 조연이 아니라 주연인 시대다. 선진국의 청년 실업률은 10%를 육박한다. 미국의 MBA 10명 중 4명은 놀고 있으며, 프랑스 청년들은 ‘최초고용제’라는 정부 주도형 백수 양산제를 막느라 고군분투했다. 우리나라의 청년 실업률이 떨어지는 이유는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청년층 비경제활동인구’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어도 다 안다.

    이 같은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듯 최근 영화들에 다양한 백수들이 등장한다. ‘뻔뻔한 딕 앤 제인’은 천부적 코미디언 짐 캐리가 나오는 코믹물이지만, 실상 내용은 비극에 가깝다. 너무 ‘리얼’하기 때문이다. 적자생존의 야만성만이 존재하는 대기업 조직, BMW와 벤츠, 수영장 딸린 집과 가정부를 유지하는 대신 일생을 담보로 잡아주는 할부금 제도, 회삿돈을 빼돌린 뒤 잠적해버린 최고경영자, 실직한 중산층이 범죄자 혹은 마약중독자로 추락하는 사회구조 등이 사실적으로그려진다. 딕과 제인 부부도 결국 도둑질에 맛을 들인 뒤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퇴직금으로 주식을 해서 돈 좀 버는데, 이게 도둑질과 비슷해!”

    마지막 장면, 딕과 함께 실직했던 거즈가 새 차를 몰고 나타나 “‘엔론’에 취직했다!”고 외친다. 이 영화의 엔딩 타이틀에는 엔론, 월드콤처럼 부도덕하게 파산한 회사들에 바치는 ‘특별한 감사 문구’가 들어 있다.

    “기죽지 마라” … 청년 백수 주연 시대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위). ‘뻔뻔한 딕 앤 제인’

    5월에 개봉하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3국이 합작해 만든 백수 영화다. ‘나, 일 좀 하면 안 되겠니?’라는 코믹한 카피를 달고 있지만, 내용은 위험하다. ‘뻔뻔한 딕 앤 제인’이 최고경영자의 의도적 파산에 의한 실직이라면 ‘액스’의 주인공 브뤼노 다베르는 구조조정의 희생자다. 브뤼노는 2년간 백수생활 끝에 유령회사를 만들어 경쟁자들을 모은 뒤 하나씩 없애고 그들 대신 재취업하려는 ‘아이디어’를 고안한다.

    ‘액스’의 영화감독 코스타 가브라스가 누구인가. 그의 대표작 ‘제트’(1961)는 더러운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칸영화제를 휩쓸었고, 아르헨티나 군부독재를 파헤친 ‘실종’으로 그는 거장의 대열에 올랐다. 이번 작품에서 가브라스는 21세기에 군사독재, 부패권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 글로벌 경제가 낳은 실직자임을 보여준다.

    ‘달콤한 백수와 사랑만들기’의 남자 주인공 트립과 친구들은 전형적인 ‘캥거루족’이다. 트립과 사랑에 빠지는 여성의 직업은 이런 캥거루족을 독립시키는 전문 컨설턴트. 영화의 원제는 ‘독립 실패(Failure to Launch)’다. 서른다섯 살에 핸섬한 외모, 요트 브로커 명함을 가진 트립은 험한 세상에 나가느니 차라리 여자 없는 생활을 택한다. 그는 “자식은 부모의 기쁨 아니냐”며 늙은 부모에 기생한다.

    이 영화들 전에는 팔자 좋은 실업자가 등장하는 ‘어바웃 어 보이’(2002)가 있었고,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등장하는 ‘풀몬티’(1997)가 있었다. ‘풀몬티’는 현대화한 제철소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스트립쇼를 감행하는 과정에서 실직의 상처를 치유해간다는 줄거리다.

    우리나라의 경우 백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처음 선보인 영화가 ‘위대한 유산’(2003)이다. 단벌 추리닝, 잔돈에 목숨 걸기, 백화점 시식코너 돌기와 형제 등쳐먹기 등 오늘날 현대생활백수의 원형을 그린 ‘고전’이다.

    영화에서 백수들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유럽이든 국적 불문하고 매우 ‘뻔뻔하다’. 미국 백수 딕과 제인은 밤에 남의 잔디밭을 잘라오고, 남의 집 스프링쿨러로 샤워를 한다. 트립은 다른 사람의 요트에서 다반사로 데이트를 한다. ‘풀몬티’의 영국 신사들은 돈 때문에 옷도 벗는다.

    “인내력으로 뻔뻔하게 살아라”

    사회가 ‘뻔뻔한’ 백수들을 받아들이는가, 혹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가에 따라 영화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백수가 여전히 가족이고 친구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라면 ‘쥐구멍에 볕 드는’ 해피 엔딩이 가능하지만, 가족도 친구도 탈출구도 없는 백수는 ‘인간 폭탄’이 된다.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일수록 백수들은 살아남기가 어렵다.

    우리 고전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은 백수로 책을 읽으며 지내다가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애석하다, 10년 책읽기로 했는데 지금 7년이로다’고 한탄하며 집을 나선 뒤 서울 최고 부자를 찾아간다. 이 뻔뻔한 백수는 부자에게 만 냥을 꿔 시세차익을 올리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 백수의 꿈을 후원하면 사회는 다이내믹해진다.

    ‘풀몬티’와 ‘위대한 유산’ 때까지도 백수 주인공들은 꿈을 갖고 있었지만 최근 개봉한 ‘딕 앤 제인’이나 ‘액스’의 실직한 주인공들은 정상 궤도에 다시 진입하지 못한다. 부도덕한 경영자 이상으로 부도덕하고 영악해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청년 백수들이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실업 처방이지만, ‘백수들의 저녁식사’에서 공짜 컵라면을 얻어먹는 ‘자발적’ 백수들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까진 알바하면서 백수로 살 생각”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아직은 살 만하다는 뜻이 아닐까?

    KBS ‘개그콘서트’에서 ‘현대생활백수’ 코너로 스타가 된 개그맨 고혜성 씨 역시 오랫동안 가난한 백수로 전전해왔다. 파란 추리닝을 입은 채 ‘공짜로 안 되겠냐’고 우기는 그의 백수 개그는 당시의 눈물과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집이 가난해 17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봤으니 인생 대부분을 백수로 보낸 셈이죠. 대리운전, 퀵서비스, 춤 선생, 레크레이션 강사 등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 10원도 없어서 야산에 비닐 치고 산 적도 있죠. 하지만 그런 시절에도 대부분 뭔가를 구상하며 지냈어요. 산에서 살면서도 공기 좋다, 새소리 좋다고 말할 만큼 긍정적인 게 백수의 장점이죠.”

    가끔 인터넷 ‘백수카페’에 강사로 나가는 그는 백수들에게 “뻔뻔하게 살라”고 충고한다.

    “자꾸 사업안을 만들고 친척이나 친구들을 설득해서 돈도 꿔야 해요. 그 돈으로 책도 사 읽고, 멋도 내봐야 백수도 발전하거든요. 저도 꾼 돈으로 헌책 많이 사 봤어요. 물론 다 갚았죠.”

    그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형이야, 형이 능력은 없어도 인내력은 좋아’란 자신의 개그다. 백수에게 필요한 미덕은 인내력과 뻔뻔함이다. 백수였던 그가 지금 스타가 된 것을 보면 과연 대한민국은 ‘안 되는 게 없는 나라’ 같다.

    가수 서수남 씨도 최근 14년 만에 낸 앨범에서 백수들을 응원한다. 고물차를 타고 가던 백수가 스포츠카를 타고 가는 멋진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는 노랫말을 그가 썼다. 노래 제목은 ‘오! 멋진 세상’. 작가 게오르규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는 ‘잠수함의 토끼’는 시인이 아니라 백수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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