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6

2006.03.14

“영규야! 아부지가 공소시효 꼭 늘릴 끼다”

개구리소년 공소시효 3월25일 만료 … 한 맺힌 부모들 “아들 원혼 달래주이소”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6-03-08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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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규야! 아부지가 공소시효 꼭 늘릴 끼다”

    우종우 씨(왼쪽)와 김현도 씨가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곳을 바라보고 있다.

    김현도(62) 씨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15년 전 죽은 아들 영규의 유골이 발견된 곳에 이르러서다. 가슴 한구석에 키워온 가냘픈 희망의 싹도 시들어버린 지 오래다. 그는 “이제 눈물도 말라버렸다”고 했다.

    3월1일 오후 와룡산(해발 299.6m, 대구 달서구 용산동). 2002년 9월26일 ‘개구리소년’의 유골이 발굴된 골짜기는 을씨년스러웠다. 잿빛으로 변한 경찰통제선을 쓰다듬는 김 씨의 눈가에 ‘말라버렸다’던 눈물이 고인다.

    “요새도 잠자리에 들면 아들 얼굴이 떠올라요. 살아 있으면 우리 영규가 스물여섯이에요. 열한 살 때 떠나보낸 그놈이 얼마나 추웠을지, 얼마나 아팠을지 떠올리면….”

    눈물을 머금은 김 씨의 시선이 하늘로 향한다. 화창한 오후의 고즈넉한 산속 풍경도 우울해 보인다. 김 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가 몹쓸 놈의 선거를 하지 않은 지 꼭 15년이 됐다”고 했다. 1991년 3월26일은 기초의회의원 선거일. 이날 오전 9시 친구 사이인 성서초등학교 남학생 5명이 “도롱뇽 잡으러 간다”며 와룡산으로 떠났다. 그러곤…, 아이들은 다시는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전 국민을 가슴 아프게 한 개구리소년 실종 및 사망 사건의 공소시효가 곧 만료된다. 경찰과 법의학 전문가들의 추정대로 5명의 소년이 91년 3월26일 살해됐다면 공소시효는 3월25일까지다. 따라서 미스터리투성이인 이 사건은 영구 미제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커졌다. 2002년 9월26일 유골이 발굴되면서 활기를 띠던 수사는 답보(踏步)를 거듭하고 있다.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은 이후 범인이 검거되더라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



    영구 미제로 마무리될 가능성

    “공소시효가 도대체 뭡니꺼? 아들 원혼은 꼭 달래야 합니더. 영규야! 울지 마라. 이 아부지가 공소시효 꼭 늘릴 끼다.”(김 씨)

    쪼그리고 앉아 유골이 발굴된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김 씨의 어깨에 고 우철원(당시 13세) 군의 아버지 우종우(58) 씨가 손을 얹는다. 이들은 15년 지기지우(知己之友)다. 김 씨는 “자기를 잘 알아주는 참다운 친구”라고 우 씨를 소개했다.

    “2~3주에 한 번씩 만나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하고 도우며 살아야지요.”(우 씨)

    우 씨의 삶은 아들의 실종과 함께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는 91년부터 93년까지 30개월 동안 아들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길거리에 뿌린 전단이 300만 부가 넘는다. 생계를 팽개치고 전국을 돌아다닌 까닭에 가정은 엉망이 됐다. 그럼에도 그는 “아들의 죽음이 확인된 2002년 9월26일 전까지는 살 만했다”고 회고한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의 다섯 가출 어린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영규야! 아부지가 공소시효 꼭 늘릴 끼다”

    ①1991년 3월 개구리소년 실종. 도롱뇽 잡으러 나간 아이들은 다시는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 <br>②1992년 3월 개구리소년 유족들은 91년부터 93년까지 아이들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br>③2002년 9월 소년들이 결국 유골로 발견됐다. 유족들의 절규가 와룡산을 울렸다. <br>④2002년11월 경북대 법의학팀 개구리소년 타살로 결론. 그러나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91년 4월10일 한 일간지 기사의 도입부다. 개구리소년은 사건 발생 초기 ‘가출 어린이’였다. “가출할 이유가 없다”는 가족들의 하소연에도 경찰은 ‘단순 가출사건’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가출’에서 ‘실종’으로 수사의 방향이 바뀐 것은 경찰이 50명 25개조로 특별수사대를 꾸린 7월5일. 소년들이 사라진 지 3개월여가 지나서다.

    “사건 초기 수색 인력이 조금만 많았더라도 아이들이 묻힌 와룡산 동남쪽도 수색을 했을 텐데….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갔다는 와룡산 서남쪽 불미골과 인근 선원지밖에 수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반대편에서만 열심히 찾은 셈이지요.”(91년 당시 대구 달서경찰서 형사반장 K 씨)

    개구리소년 수사본부가 ‘서(달서경찰서)’에서 ‘청(대구지방경찰청)’ 단위로 승격된 시점은 실종 7개월 후인 91년 10월24일.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이 된 뒤에야 대구의 경찰 및 군 병력이 산악 수색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뒤늦게 유골이 발견된 와룡산 동남쪽을 뒤졌을 때는 낙엽과 흙이 유골이 묻힌 곳을 덮어버려 아이들의 시신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제보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수사는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구미·부산에서 아이들을 봤다는 신고가 들어와 형사들이 지방으로 급파되기 시작했고, 수사와 수색 인원은 더욱 부족해졌습니다. 이후에는 앵벌이 조직을 찾는 데 수사력이 지나치게 집중됐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쓸데없이 다리품만 판 셈입니다.”(달서경찰서 우상태 경사. 우 경사는 91년부터 개구리소년 수사를 해오다 지난해 11월 성서경찰서가 새로 생기면서 수사팀에서 빠졌다.)

    우 경사가 와룡산을 처음으로 누빈 것은 37세 때. 15년 세월에 잔주름이 가득한 그는 “유족들을 보면 한스럽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다”고 했다. 우 경사와 개구리소년 아버지들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우종우 씨는 “15년 동안 상태가 정말 고생 많이 했다”면서 “우 경사가 이제 가족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제보 바탕 수사 명맥만 유지

    소년들에게 현상금이 걸리면서 봇물 터지듯 들어온 제보는 수사를 미궁에 빠뜨렸다. 앵벌이 제보가 그치자 납치 신고가 줄을 이었다. “멍텅구리배에 소년들이 납치돼 있다”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섬으로 끌려갔다”는 제보에 따라 형사들은 전국의 섬과 항구를 이 잡듯 뒤졌다. 아이들을 유괴했다며 몸값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개구리소년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남해안의 섬은 물론이고 무인도까지 돌아다녔으니 당시 겪었던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목격자가 없는 데다 단서도 없어 제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우 경사)

    우 경사는 한센병 환자들한테 뭇매를 맞은 적도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센병 환자들이 아이들의 간을 빼먹고 암매장했다”는 제보를 확인키 위해 경북 칠곡군 ‘나환자촌’을 찾았을 때다. 사회에서 소외된 한센병 환자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점성술사, 무당, 심리학자들의 ‘추측’도 수사를 혼란스럽게 했다.

    “유가족에게 귀신을 씌운 적도 있었습니다. 무당이 ○○군 어머니를 찾아와 신기가 생기면 아들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유족들은 미신인 줄 알면서도 굿을 했어요. 심령술사를 자처하는 50사단 소령이라는 사람이 대구 외곽도로 밑에 아이들이 묻혀 있다고 주장해 시민들 몰래 공사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한밤중에 도로를 파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우 경사)

    유골 발견 직후 경찰은 소년들이 예리한 흉기로 타살됐다는 경북대 법의학팀의 감정 결과에 따라 광범위한 수사를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범행도구 파악과 탐문수사가 이뤄졌지만 살해범 추적은 유골이 발견된 ‘2002년 9월26일’에서 제자리걸음이다.

    개구리소년 사건 일지
    。1991년 3월26일〓개구리소년 5명 실종
        7월5일〓경찰 50명 25개조로 특별수사대 편성
    。1993년 1월〓어린이 부모들,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 제출
         9월〓어린이 부모들, 자식들에 대한 직접 수색 작업 포기
    。1995년 7월〓경찰, 실종 어린이들 전단 2만여 장 제작 배포
    。1996년 5월〓대구경찰청 수사본부 해체, 달서경찰서에 수사반 편성
    。2001년 10월22일〓 실종 어린이 김종식 군 아버지 간암으로 사망
    。2002년 9월26일〓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에서 유골 발견. 실종 사건에서 변사 사건으로 변경
        11월12일〓경북대 의대 법의학팀 타살로 결론
    。2004년 3월26일〓개구리소년 장례식 치름
    。2006년 3월25일〓개구리소년 변사 사건 공소시효 만료


    단일사건으로 사상 최대 수사인력(연인원 32만여명)이 동원된 개구리소년 사건의 현재 수사인력은 대구지방경찰청(8명)과 성서경찰서(6명)의 14명이 전부다. 주로 성서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제보를 바탕으로 수사를 하고 있다. 수사본부가 ‘팀’ 수준으로 축소돼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것. 이 사건과 관련된 서류는 가로 88cm, 세로 180cm, 폭 38cm의 캐비닛 4개에 가득 차 있는데, 타자기로 친 문서와 CD에 보관된 자료가 섞여 있어 세월의 흐름을 짐작케 한다. 수사본부가 성서경찰서로 옮긴 것은 지난해 11월15일. 이후 올 2월까지 ‘사실과 다른’ 3건의 제보가 들어온 게 성서경찰서에서 이뤄진 수사의 전부다.

    형사소송법 개정안 국회 법사위 계류 중

    “유골 발견 직후 대구지역 공구상만 1400여 곳을 탐문하며 소년들의 두개골에 난 외상 흔적과 유사한 공구를 찾아 나섰지만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수사를 더 할 곳이 없어요. 제보가 들어오면 확인하는 수준으로 수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성서경찰서 개구리소년 수사팀장 길상갑 경위)

    길 경위는 이따금 유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한다. 유족들의 삶은 옹색하기 그지없다. 일부는 아이를 잃은 슬픔과 생계를 제대로 꾸릴 수 없는 가난에 신음한다. 고 김종식(당시 9세)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는 아들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병을 얻어 2001년 10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건서 씨는 폐지를 모아 하루 1만원을 번다. 박 씨는 “이제 와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말을 아끼면서도 “공소시효가 꼭 연장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씨는 2월23일 서울 여의도 국회를 다녀왔다. 박 씨를 비롯한 유족들은 지난해 11월과 2월2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살인사건 공소시효의 연장 및 폐지를 요구했다. ‘강력범죄의 공소시효를 지금보다 5년 연장하도록’ 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지난해 8월 국회에 발의돼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시간이 없습니더. 3월 초 국회에 가서 ‘우리 좀 봐주소’하면서 ‘물리적인 행동’을 할 겁니다. 공소시효가 끝나면 내 아들 원한은 어떻게 풀어줍니까.”(우 씨)

    유족들은 2004년 3월 장례식을 치른 뒤 소년들의 머리 유골을 경북대 법의학팀에 기증했다. 뼈를 화장해 낙동강에 뿌리면서도 머리 유골만은 남겨둔 것. 범인을 잡아 원혼을 달래주겠다는 바람에서다.

    “온전히 하늘나라에 보내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니겠습니까. 어금니 꽉 깨물고 증거인 머리 유골을 남겨놓았습니다.”(김 씨)

    공소시효가 만료됐다고 해서 수사가 반드시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경찰서는 사건 일체를 밝혀낼 때까지 수사를 계속할 계획이다. 길 경위는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법안이 통과됐으면 좋겠다”면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범인을 찾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소년들의 죽음에 깃든 진실은 무엇일까? 와룡산의 리기다소나무는 범인을 알고 있을까? 91년 ‘묘목’이던 소나무는 어느새 ‘청년’이 되었다. 기자는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라서도 한동안 김현도 씨의 절규가 귓전을 때렸다.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영규야! 울지 마라. 이 아부지가 공소시효 꼭 늘릴 끼다.”

    공소시효 논란

    반인륜적 범죄 공소시효 폐지나 연장 여론


    “영규야! 아부지가 공소시효 꼭 늘릴 끼다”
    범인의 인권이 먼저인가, 피해자 인권이 우선인가. 한국은 현재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15년,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는 10년 등 범죄의 경중에 따라 다른 공소시효를 적용하고 있다.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당시 일본 법을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정해졌는데, 범죄자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취지에서다.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폐지하거나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힘을 얻고 있다.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영원히 범인을 처벌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물론 법적 안정성을 위해서는 강력범에 대해서도 공소시효가 필요하다는 반론도 없지 않다. 범인이 공소시효 기간 동안 심리적으로 일부 처벌을 받았고, 시간이 경과하면 피해자의 감정이 누그러져서 처벌 이유가 약화된다는 것이다.

    문병호 의원(열린우리당·사진 )이 국회에 제출한 살인죄 공소시효 기간을 15년에서 20년으로 연장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2월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3월2일 비정규직법과 관련한 민주노동당의 법제사법위원회 점거 농성으로 결국 처리되지 못했다. ‘개구리소년 변사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3월25일 이전에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문 의원은 “개구리소년의 부모들은 자식들의 한을 못 풀어줬다는 상처가 오히려 커지고 있다”면서 “일본은 2003년 살인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25년으로 변경했다. 우리도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공소시효를 연장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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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소시효란? 범죄 행위에 대해 일정 시간이 경과되면 법 집행을 하지 않는 제도다. 공소시효가 만료되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더 이상 그 범죄로 인한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다. 현행 법에서는 개구리소년 변사 사건의 경우, 3월26일부터는 범인이 나타나 자신이 진범이라고 자백하고 증거를 내놓아도 처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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