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9

2006.01.17

중남미는 지금 ‘좌향 좌’ 열풍

볼리비아 대선에서 좌파 모랄레스 당선 … 멕시코·니카라과도 좌파 후보들 승리 가능성 높아

  • 뉴욕=공종식/ 동아일보 특파원 kong@donga.com

    입력2006-01-11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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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년 12월30일 쿠바 아바나는 축제 분위기였다. 12월18일 치러진 볼리비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좌파 정치인 에보 모랄레스가 첫 해외순방지로 쿠바를 방문했기 때문. 모랄레스 당선자는 볼리비아 원주민인 인디오 출신 첫 대통령으로 선거 이전부터 ‘반미’ ‘주요 기업의 국유화’ 등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던 정치인. 미국이 가장 싫어하는 정치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을 역할모델로 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볼리비아 코카(코카인의 원료) 재배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그는 코카 재배 금지를 주장하는 미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있어 미국으로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는 이 때문에 “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미국의 악몽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빈곤층 감소 안 돼 시장경제 실패 입증?

    카스트로 의장은 모랄레스 당선자를 위해 자신의 전용기까지 볼리비아에 보내는 등 극진한 정성을 다했다. 카스트로 의장은 그를 만난 자리에서 “(중남미의) 지도가 바뀌고 있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미국 바로 밑의 중남미에서 반미와 좌파 바람이 거세다. 특히 이번 좌파 돌풍은 투표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과거 ‘혁명’과 ‘무력’에 의존했던 좌파 바람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6년 한 해 동안 중남미에서 대통령 선거가 예정된 국가가 줄을 서고 있어 전문가들은 당분간 ‘선거를 통한 좌파 도미노’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 코카콜라 임원 출신의 비센테 폭스가 대통령으로 있는 멕시코에서도 올해 7월 대선에서 좌파 성향의 전 멕시코시티 의장 안드레스 오브라도르의 당선이 유력하다. 니카라과에서도 좌파인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지도자이자 전 대통령인 다니엘 오르테가가 올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오르테가는 모랄레스의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이번 볼리비아 선거에서 가장 큰 패배자는 미국”이라며 “시장경제가 빈곤을 없애줄 것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것으로 니카라과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시장경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의 효율성 경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입증된 사회주의가 중남미에서 다시 세력을 키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시장경제를 내세운 세계화와 민주화가 중남미에서 빈곤층을 줄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인종 및 빈부 갈등이 어느 지역보다 심하기 때문에 빈곤층과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좌파 후보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는 것.

    이번에 모랄레스 대통령을 선출한 볼리비아는 그동안 중남미에서 어느 국가보다도 미국의 정책에 협조해왔다. 또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처방한 경제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이 같은 처방은 오히려 인종 간 격차와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뉴욕타임스는 “볼리비아는 지난 20년 동안 국영기업의 민영화, 수출 주도의 경제정책을 시행했지만 인구의 3%에 불과한 백인의 경제력 집중은 강화되는 대신 인구의 65%를 차지하는 인디오는 좀처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개방정책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이들 국가에서 부패가 만연하고 정부가 효율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어찌됐건 빈곤층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이들 지역에서는 복지 확대, 민영화 반대 등 빈곤층 정서에 호소하는 좌파 정치인들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제2의 카스트로’를 꿈꾸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중남미에서 좌파 바람의 진앙지 구실을 하고 있다. 막대한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이 지역 좌파 정치인 후원자 구실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

    일각에서는 중국의 역할도 지적하고 있다. 중국은 자원 확보를 위해 최고위급 지도자들이 중남미 지역을 자주 순방하는 등 이 지역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중국에 대한 중남미 국가의 수출은 매년 60%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미국의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반미’를 내세우는 좌파가 중남미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최근 미국에서는 자성론이 일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볼리비아 선거 직후 ‘다른 라틴아메리카’라는 사설을 통해 “그동안 부시 행정부가 중남미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남미 국가 지도자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도 소홀했다”고 비판했다. 미국 외교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1월호도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를 놓치고 있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미국 외교정책의 주된 관심 대상이 중동이나 아시아에 집중되면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라고 지적했다.

    ‘반미’ 공통사항 … 미국에선 자성론 일어

    실제로 많은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에 대해 서운해하고 있다. 멕시코는 미국이 이민정책을 완화해 좀더 많은 멕시코인들이 미국 내에서 일하기를 원하지만, 미국 정부는 갈수록 높아지는 자국 내 반이민 정서 때문에 오히려 미국과 멕시코 간 국경 경비를 더욱 강화해야 하는 처지다.

    이처럼 중남미에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중남미가 전적으로 ‘반미’만을 고집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볼리비아만 해도 매년 미국이 지원하는 거액의 원조가 없이는 정부 재정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또 중남미 국가는 무역 등에서 미국 의존도가 워낙 높아 미국과의 노골적인 적대정책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미국이 중남미 문제에 대해 지금처럼 ‘나 몰라’ 정책을 계속하고, 중남미에서 포퓰리즘에 호소하는 좌파 정치인들이 늘어나면 결과적으로 중남미에 좌파 도미노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좌파 정치인들이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모랄레스를 포함해 많은 좌파 정치인들이 말로는 빈곤층의 삶을 개선해주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현 가능한 국가운영 모델은 아직까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빈곤 탈출의 가장 핵심은 일자리 창출이고, 일자리 창출은 결국 투자가 많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내 자본 축적이 미진한 상황에서 외국인 투자자마저 중남미를 떠나면 빈곤층의 삶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세계화의 부작용을 개선해야겠지만, 그 해결책을 반세계화에서 찾을 경우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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