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9

2005.11.08

경기고 卒 기능공 최고 병원 실세로

  • byeme@donga.com

    입력2005-11-07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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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고 卒 기능공 최고 병원 실세로
    서울대병원 어린이병동 지하에는 ‘시체실’이 있다. 사람이 아닌 죽은 기계들로 꽉 찬 공간. 번잡하고 을씨년스런 풍경 사이사이에 사무실 몇 개가 숨어 있다. 그중 가장 작은 방이 서울대병원 의공학과 이건송(52) 기사장의 개인실이다.

    이 기사장은 인물 많기로 소문난 경기고 69회 졸업생이다. 방영주 서울대 의대 암연구소장, 왕규창 서울대 의대 학장, 정필훈 서울대 치대 학장이 동기다. 이들 셋이 ‘지상’의 서울대병원을 대표한다면, 이 기사장은 ‘지하’, 그러니까 ‘관계자외 출입금지’ 푯말 속의 보이지 않는 서울대병원을 움직이는 실세 중 하나다.

    이 기사장은 대학생활을 모른다. “700여 동기 중 99%가 대학생이 됐을 때” 그는 병든 홀어머니와 다섯 동생을 짊어지고 삭풍 이는 세상 속으로 몸 던져야 했다. 동기들이 넥타이 매고 번듯한 직장에서 최고 엘리트 대우를 받는 동안,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기름밥 먹어가며 전혀 다른 삶의 고투를 벌였다. 이제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의공학 엔지니어다. 북한 당국으로부터 많은 특권과 자유를 허락받은 ‘남조선 VIP’이기도 하다. 서해교전이 한창인 때조차 그는 아무 제약 없이 평양 땅을 밟았다.

    이 기사장은 “대학 포기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일”이었다 말한다. “교사셨던 아버님께서 운수업에 손댔다 큰 낭패를 보셨거든요. 한 1년 앓다 돌아가셨는데, 집은 빚더미에 어머님은 좌골신경통으로 거동조차 힘든 형편이었어요.”

    경기고 69회 열악한 가정 환경 대학 포기 … 기름밥 먹으며 신산한 삶



    “장학금 줄 테니 입학만 해달라”는 대학도 있었다. 하지만 장남이랍시고 가족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대신 다섯 동생을 먹이고 가르치는 일에 목숨 걸기로 했다. 군대를 안 다녀와 걸리는 일이란 모두 임시직뿐이었다. 그때 당한 설움 때문에 이 기사장은 지금도 “비정규직은 없어져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스물세 살이 돼서야 생계 문제를 사유로 군복무 면제가 확정됐다. 어렵게 들어간 곳이 대한전선. 견습 기능공인 그가 ‘의사, 검사, 교수 될 사람들이나 다닌다는’ 경기고 출신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력서에 분명 경기 졸업이라고 써놨는데 사람들은 그저 경기공전이려니 하더군요.”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들여온 최첨단 계측기들을 아무도 작동시키지 못한 것. 영어 설명서를 해독할 줄 아는 이가 없는 탓이었다. “대학 출신들도 슬슬 꼬리를 빼더군요. 뭐가 그리 어렵나 싶어 들여다봤더니 별거 아니에요. (설명서에서) 시키는 대로 툭툭 건드리니 윙 하고 기계가 돌더군요.”

    경기고 卒 기능공 최고 병원 실세로

    2001년 2월 첫 방북 당시 북한 당국자로부터 선물을 전달받고 있는 이 기사장(왼쪽에서 세 번째).

    그는 일약 회사가 주목하는 인물이 됐다. 수많은 영어 설명서들을 번역했고, 스스로 배우며 공학적 상상력을 키웠다. “운이 좋았던 거죠. 하필이면 그때 일본 기계가 들어올 게 뭐예요, 하하.”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공장이 구미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실력이 우수하다지만 고졸 출신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 서울대에서 의료기 엔지니어를 찾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국립대병원이니 차별이 좀 덜하지 않을까 싶었다.

    “의료기라는 것이 그야말로 첨단공학의 결정체거든요. 지금도 서울대병원을 빼곤 자체 고장 수리가 가능한 곳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나마 요즘은 국내 지사라도 있지, 그땐 기계가 고장 나면 독일·일본·미국 등지에 있는 본사 엔지니어들을 불러들이느라 수천만 원씩 돈이 들곤 했어요.”

    서울대병원 면접일, 그는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면접을 맡은 교수님께서 ‘지금 이러저러한 기계가 고장 났는데 일본 기술자의 도착이 늦어져 큰일’이라시더군요. 회로도가 있냐고 물으니 그렇데요. 저도 몰래 ‘그런데 왜 못 고쳐요?’ 하고 반문했죠.”

    그는 기계를 가뿐히 고쳐버렸다. 1000원짜리 부품 두 개를 갈아끼웠을 뿐이었다.

    그의 입사는 서울대병원에 큰 힘이 됐다. 외국에서 기술자를 불러들이는 일이 현저히 줄더니 어느새 딱 끊어졌다. 고장 원인을 몰라 기판 하나만 갈면 될 걸 통째로 교체하는 일도 사라졌다. 병원 당국은 그를 전국의 각 병원에 ‘빌려주는’ 대가로 70만~80만원의 사례비를 받았다. 당시 그의 월급은 19만원이었다.

    북한에 중고 의료기계 보내기 ‘남조선 VIP’ 대접

    81년 엄명숙(49) 씨와 결혼한 그는 아내와 함께 성심으로 가족을 돌봤다. 남동생 하나, 여동생 넷 중 공부 잘하는 두 여동생은 대학(연세대) 졸업까지 시켰다. 남동생 또한 형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공부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어느새 이 기사장 부부는 동네의 ‘구경거리’가 됐다.

    “어머님께 순종하고 동생들 건사하는 모습이 좋게 보였나봐요. 딴 동네 사람들까지 와서 대문 안을 기웃거리며 ‘저 사람이 장남이래, 저이가 맏며느리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죠.”

    일을 하면 할수록 그는 의공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때로는 연구에 골몰하느라 열흘씩 집에 안 들어가기도 했다. 그저 기계를 수리하는 수준에서 점차 근본적인 결함을 찾아내고, 마침내는 아예 새 기계를 발명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외국어 공부 또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사무실 책꽂이엔 공학전문서와 함께 20여권의 영어 학습서, 중국어 교본과 일본어 교본이 나란히 꽂혀 있다.

    의료기계는 적게는 수억 원, 많게는 30억, 40억원을 호가한다. 거래에 뒷돈이 없을 수 없다. 이 기사장은 그런 거래에 한 번도 끼지 않았다. 때로는 외부 의뢰를 받아 의료기기 개발을 해주기도 한다. 자동차 관련 발명에도 여럿 관여했는데, 2차 공기흡입방식 특허가 대표적이다. 용역비는 1000만원 이상 받지 않는다. “전 월급쟁이 하기로 결심한 사람이거든요. 돈 욕심 내고 좌고우면하면 정한 길로 어찌 갈 수 있겠어요.”

    경기고 卒 기능공 최고 병원 실세로

    경기고 졸업식 때 은사와 함께 찍은 사진.

    97년 방송통신대 독학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한양대 공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내친김에 서울대 전기공학부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치렀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붙었어요. 동기들이 다 아들뻘이지요, 허허.”

    북한에 중고 의료기계를 보내는 일을 시작한 건 2001년이다. 두세 달에 한 번씩 북한에 가 짧게는 4박5일, 길게는 15일씩 머물며 기계를 설치한다. 좁고 낡은 병원에 거대한 설비를 집어넣는 일만도 고역이다. 그래도 북한행을 미루거나 마다한 적은 없다.

    “주로 김책공대생들하고 일하는데 그 친구들이 참 똑똑해요. 영문 설명서를 주면 금세 익혀 작동은 물론 수리까지 척척 해내니까요. 지금껏 한번 설치한 기계에 대해 고쳐달라, 못 다루겠다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의사들도 실력 있고요.”

    그는 “기술자들이 달러 무서운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5년 쓸 것 어떻게든 10년 쓸 수 있게 만드는 게 애국이에요. 그러려면 근성을 가지고 공부부터 열심히 해야죠.”

    이 기사장은 “동기들과 날 비교하며 상심한 적은 없었다. 솔직히 교수도 부럽지 않다”고 했다. “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지만 전 자부심이 있습니다. 개척자이고 새 지평을 열어가는 사람이니까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니지요.”

    평생 열심히 모은 돈으로 서울 강북지역에 40평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고, 중간 정산한 퇴직금으로 늙어 농사지을 땅 몇 평도 마련한 지금, 그의 꿈은 “계속, 열심히, 보람 느끼며 일하는 것”이다. “정년퇴직 후에도 자원봉사 하며 살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아직 의료기의 안전도나 성능을 검사하는 기관 같은 게 없거든요. 제가 그 일의 초석을 닦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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