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8

2005.11.01

‘한국 명문’ 넘어 ‘세계 명문’으로

졸업생들 교육·문화 등 각계서 맹활약 … 강남서 ‘가고 싶은 학교’ 손꼽혀

  • 구미화/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5-10-26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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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명문’ 넘어 ‘세계 명문’으로

    수송동 시절 교사의 외관을 그대로 본떠 지은 현 숙명여고 도서관.

    대한민국 사교육 열풍의 진원지로 손꼽히는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하늘을 향해 치솟은 주상복합아파트에 둘러싸인 숙명여고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교정 곳곳에서 제각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조각 작품과 복도를 장식한 수십 점의 회화가 그것.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가의 이름과 함께 졸업연도가 적혀 있다.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졸업생들의 모교 사랑이 대학 입시 준비로 삭막할 것 같은 학교 분위기를 한층 아늑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년 5월22일 100돌을 맞는 숙명여고는 고종의 후비(后妃)이자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순헌황귀비(嚴純獻皇貴妃)가 희사한 용동궁 터(지금의 수송동 80번지)에 처음 세워졌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개화파 우국지사들이 앞다퉈 ‘식산’과 ‘교육’을 통한 부국강병형 근대국가 건설만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임을 강조하던 때였다. 엄황귀비는 그 무렵 양정고와 진명여고도 세웠다. 숙명여고는 진명여고와 함께 순수 민족자본에 기반한 여성교육 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초창기 숙명여고는 ‘귀족여학교’의 성격이 강했다. 개교에 앞서 신문에 광고를 내고 11~25세의 선비 집안의 딸을 모집했는데, 5명의 규수가 입학했다. 주초에 가마를 타고 등교해 일주일간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주말에 다시 가마를 타고 귀가했다. 통학이 허용된 건 그 이듬해인데, 학생들이 들고 다녔던 ‘통장표’가 당시 사회상을 엿보게 한다. 통장표는 등교 시엔 학부형이 집에서 딸이 출발한 시간을 적고, 귀가 시엔 교원이 학생의 하교 시간을 기록해 방과 후 ‘안전하게’ 집으로 곧장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등하교 확인표다.

    숙명여고는 1980년 69회 졸업식을 끝으로 수송동에서 도곡동 현 위치로 교사(校舍)를 옮겼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숙명여·중고에 다닌 안명경 교장은 “수송동 교사가 좁지만 정이 넘치는 가족적인 분위기였다면, 지금의 도곡동 교사는 강남에서 드물게 1만8000여평의 넓은 면적에 나무가 많아 계절의 변화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라고 자랑했다.

    ‘한국 명문’ 넘어 ‘세계 명문’으로

    48회 졸업생들의 졸업 30주년 기념 동창회(1989년).

    숙명여고 교사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붉은색 벽돌로 지은 3층짜리 도서관 건물. 수송동 옛 교사의 모양을 그대로 복원해 모교의 정든 옛터를 잃은 졸업생들의 향수를 달래준다. 사료관으로 쓰고 있는 3층을 제외한 1, 2층에 위치한 도서관은 5만여 권의 장서를 온라인으로 검색할 수 있는 정보화 시스템을 갖췄다. 1176명이 한꺼번에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대강당(이정숙기념관)과 국내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농구부가 실력을 키우는 체육관(윤덕주기념관)도 규모나 시설 면에서 여느 학교에 뒤지지 않는다.



    농구부는 빼놓을 수 없는 숙명여고의 자랑이다. 1929년 한국대표로 일본에 첫 원정을 갔는가 하면, 1956년엔 제1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숙명여고 농구팀은 지금까지 국내 최고의 여자 농구팀으로서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 명문’ 넘어 ‘세계 명문’으로

    2005년 10월의 숙명여고 학생들(왼쪽). 80년 5월 당시 도곡동 교정 모습.

    숙명여고는 1960, 70년대부터 발빠르게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세계시민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1968년 조직된 국제이해반 활동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국제이해반은 1학년 말 희망자에 한해 영어 시험을 치른 뒤 40명 정도를 선발해 자매결연한 일본 오사카 이즈미가오카 고교의 학생들과 편지를 교환하고, 일본 방문의 기회도 갖는다. 교사들 또한 1990년부터 동남아시아와 미국, 캐나다, 일본 연수를 다녀왔다. 내년엔 동문회 후원으로 개교 100주년 기념 중국 연수를 계획하고 있다.

    100년 앞을 내다보고 한다는 교육의 결실을 숙명여고는 3만5775명의 졸업생(숙명여중 포함 시 6만5000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숙명여고 졸업생은 특히 문화·예술계에서 활약이 두드러진다. 월북 무용가인 최승희, 소설가 박화성·최정희·박완서·한말숙·권지예, 조각가 김정숙, 서양화가 황주리, 피아니스트 장혜원, 성악가 이경숙 등이 숙명여고 출신. 비교적 최근에 졸업한 신애라·나현희·정선경·명세빈·김민정 등은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나운서 오유경·강수정도 숙명여고 졸업생이다. 학계에선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이 숙명 출신이다. 장상 전 총장은 “한국 사회가 가난하고 우울하던 시절, 숙명은 따뜻한 인간성 함양에 정성을 기울여 학생들이 씩씩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며 “내 꿈과 잠재력이 성장한 비옥한 토양이었다”고 말했다.

    개교 100주년 기념 찬가를 작사한 박완서 씨는 ‘숙명90년사’에 기고한 ‘진실에 대한 허기증으로’라는 글에서 하나같이 명강의였던 학교 수업이 자신의 글쓰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했다.

    “창작 시간에 (박노갑) 선생님한테 칭찬받은 기억은 내가 사십의 나이에 소설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니 그 시절 박 선생님과의 만남은 나에겐 운명적이랄 수도 있다. 그분이 담임했던 문과반 한 반에서 소설가 두 명(한말숙·박완서), 시인 두 명(박명성·김양식)이 탄생했으니 그만하면 그분의 제자 농사도 과히 흉작은 아니라고 위로해드리고 싶다.”

    올해 동인문학상 수장자인 권지예 씨 또한 숙명여고 졸업생(68회)이다. 권 씨는 2002년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 시상식이 내가 다니던 숙명여고 강당에서 열렸다. 그때 김승옥 선생이 수상하는 걸 보면서, 내 생애에 저런 상을 받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그가 몸담았던 신문반 담당 교사였으며 현재 ‘숙명100년사’를 집필 중인 한진 전 교감은 “숙명여고는 청소년 시절 꿈을 키우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안명경 교장은 “지난해 7명의 사법시험 합격자를 배출하는 등 근래에 졸업한 학생들은 법조계와 의학계로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숙녀회’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100주년 기념행사 기금 마련을 위한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운동’이 한창이다. 1인당 100만원씩 기부하는 이 행사는 1998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700여명이 참여했다. 숙녀회는 또 ‘숙명 동문 100인 문집’을 준비하고 있다. ‘숙명은 나의 인생에 어떠한 의미로 내재되어 있는가?’를 주제로 한 이 문집에는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문들의 회고가 담길 예정이다. 미술계 동문 모임인 ‘숙란회’는 100주년 기념전시회 ‘숙란전’을 열고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은 모두 학교에 기증할 계획이다.

    숙명은 여전히 강남 지역 예비 여고생들에게 ‘가고 싶은 학교’로 손꼽힌다. 숙명여고 학생회장 한혜원 양은 “숙명여고에 배정이 안 돼 안타까워한 친구들이 많다”며 “숙명여고에 들어오기 위해 다른 학군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전학 온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숙명인으로서 느끼는 자부심도 선배들의 그것에 못지않다.

    내년 5월22일엔 지금의 ‘숙명’을 만든 중·고교 재학생과 졸업생, 전·현직 교사, 학부모가 올림픽홀에 모여 뜻 깊은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며 ‘숙명’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기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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