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4

2005.05.10

겁먹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사이공은 ‘졸고’ 있었다

베트남 종전 30주년 마지막 특파원 회고 … 미국대사관에 몰려든 난민들 필사의 탈출

  • 안병찬/ 경원대 초빙교수·전 한국일보 베트남 특파원 ann-bc@hanmail.net

    입력2005-05-04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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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30일은 월맹군과 베트콩이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이 공산주의로 통일된 지 꼭 30주년을 맞는 날이다.
    • 한국은 1964년 이동외과병원을 시작으로 맹호·백마·청룡으로 이어지는 1개 군단급 부대를 파병했다가 73년 미군과 함께 철군했는데 이때 한국일보 안병찬 씨 등 베트남에 나가 있던 한국 특파원들도 철수했다.
    • 75년 월맹군과 베트콩의 공세로 월남이 빠르게 무너져가자 그해 3월23일안병찬 씨는 한국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다시 베트남에 들어가 월남이 패망하는 4월30일까지 현장을 취재했다. 안 씨는 이때 겪은 일을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 ‘안깡’이란 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노 기자가 ‘베트남 통일 30주년’을 맞아 주간동아 독자를 위해 사이공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왔다.
    겁먹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사이공은 ‘졸고’ 있었다

    “천천히 내려.” 사진기를 든 안병찬(등 보이는 이) 특파원이 주월 한국대사관에서 마지막으로 태극기를 내리는 장면을 찍고 있다. 주월 한국대사관의 타이피스트 고종학 씨가 찍은 사진이다(1975년 4월28일 오전 9시).

    4월28일/ 사이공 최악의 날

    사이공 최후의 모습.’ 그것은 나를 맹렬히 유혹하면서 끊임없이 괴롭혀온 과제였다. 오전 7시, 웬 후에 빌딩 앞 대로변에 주차해놓은 무개 지프에 오를 때 서쪽 하늘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베트콩 특공대가 비엔 호아 4차선 간선도로(고속도로)와 연결된 사이공 뉴포트 대교의 맞은편을 장악하며 새벽부터 시가전이 시작된 것이다.

    8시30분, 독립궁 뒷담이 끝나는 웬 주가(街) 107번지 한국대사관에 도착하자 마당은 짐을 챙겨 모여든 교민들로 혼잡했다. 공관원들이 대사 집무실에 모여 있던 9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한국대사관은 즉시 철수 준비를 하라는 미국대사관의 연락이었다. 김영관 대사가 긴급지시를 내렸다.

    “통신장치를 파괴하시오, 통신장치를!”

    교민을 철수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온 2척의 해군 LST는 상당수의 우리 교민을 태우고 26일 사이공을 떠났다. 이 LST와 교신하기 위해 대사관에 남아 있던 통신사 변종건 중사와 전자사 김형태 중사가 이문학 중령의 명령을 받고 통신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변 중사는 LST 수송분대 사령관을 향해 마지막 키를 두드렸다.



    “지급(至急·매우 급함). 사태 급변으로 주월 한국대사관, 연락장교와 통신요원 2명 긴급 철수함. 통신장치 파기함. 안전 항해와 건투를 기원함.”

    두 중사는 통신기를 밖으로 끌어내 도끼로 두들겨 부순 뒤 뒤뜰 소각장으로 들고 가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솟아올랐다.

    “국기를 내려야지, 국기를!”

    그때 김 대사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게양대 앞으로 뛰어갔다. 이상훈 참사관과 이대용 공사, 그리고 안희완 영사가 뒤따라 달려갔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게양대 앞을 겨냥한 채 소리 질렀다. “천천히 내려!”

    그러나 삽시간에 국기는 끌어내려졌다.

    순식간에 대사관 뜰은 고요해졌다. 나는 사이공의 최후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공관원들이 떠난다 해도 함께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굳힌 터였다. 오후 5시 안쾅 불교도를 등에 업은 두옹반민 장군이 독립궁 회의실의 샹들리에 밑에서 새 대통령에 취임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웬반티우가 사임하고 늙은 부통령 짠반후옹이 뒤를 이었는데, 후옹도 물러나고 두옹반민이 새 대통령이 되었다. 5시50분, 나는 지프를 에덴 건물 앞에 세워놓고 4층에 있는 AP통신 사무실로 갔다.

    그 직후인 6시, 돌연 ‘꽝, 꽝!’ 하는 폭발음이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동시에 ‘탕, 탕, 탕, 탕’ ‘따, 따, 따, 따’ 하는 대공포화가 지축을 흔들었다. AP통신 지국장 조지 에스퍼가 몸을 숙인 자세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뭐, 탄손누트 공항 폭격이라고? 왜 그래, 누가 그래? 뭣 때문에 그러는 거야?”

    겁먹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사이공은 ‘졸고’ 있었다

    4월26일 사이공의 뉴포트 항에 들어온 한국 해군의 LST는 상당수의 교민을 싣고 베트남을 떠났다.

    그는 전화에 대고 악을 썼다. 나는 카메라를 메고 창문 쪽으로 기어갔다. 혼다 오토바이 한 대가 텅 빈 레 로이 대로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는 경주를 하는 것처럼 납작 엎드린 자세로 죽자꾸나 하고 도망쳐 갔다. 질린 얼굴을 한 조지 에스퍼가 타이프라이터 앞으로 달려가더니 ‘지급’으로 기사를 두들겼다.

    “지급. 28일 오후 6시 몇 대의 제트기가 탄손누트 공항을 폭격하고 있다. 무슨 비행기인지, 왜 탄손누트를 공격하는지 아직 확인할 수는 없다.”

    나는 AP통신 사무실 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6시15분이 되자 폭격과 기총 소리가 뚝 멈췄다. 길에 나와 있는 사람은 철모 쓰고 방탄조끼를 입은 외신기자들뿐이었다. 월남군인 두 명이 군모를 벗어 쥔 채 해병 동상 밑을 뛰어서 달아났다. 그 뒤로 카메라맨이 셔터를 누르며 그들을 추격해갔다.

    월남 공군의 F-5 전투기와 A-37 공격기 등 세 대가 반란을 일으켜 새로 취임한 두옹반민 대통령을 겨누고, 탄손누트를 공격한 것이었다. 얼마 뒤 사이공엔 두 번째로 24시간 통금령이 내려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28일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나는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사이공 최악의 날’이라는 제목으로 이날 겪은 일을 찍어나갔다.

    4월29일 항복 전야/최후의 본사교신

    사이공은 숨쉴 구멍도 없이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남중국 해역에는 44척의 함정으로 구성된 미 해군 기동함대가 미국인 구출 작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기사를 작성한 나는 사이공의 중앙우체국 기계실로 가면 ‘최후의 기사’를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 대성당이 있는 케네디 광장 한쪽에 위치한 중앙우체국으로 달려가자 텅 빈 기계실에는 다행히 당직 기술자가 남아 있었다.

    극성스러운 각국의 특파원들이 어지간하면 기계실에 나타날 법한데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사이공의 절망을 암시해주는 확실한 징후였다. 오전 9시30분, 테이프가 돌아가자 기사문이 토닥토닥 운율을 타고 한국의 한국일보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테이프의 마지막 꼬리가 텔레타이프 속으로 사라지기까지는 32분이 걸렸다. 그 순간 ‘탁, 탁, 탁, 탁’ 하고 급한 타자 음이 울렸다. 본사의 조순환 외신부장이 나에게 보낸 것이었는데, 이것이 내가 사이공에서 본사와 한 마지막 교신이었다.

    10시, 기계실을 나온 나는 카메라와 가방을 메고 텅 빈 거리로 뛰었다. 케네디 광장 한가운데 서서 가톨릭 대성당의 마리아상을 겨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마리아의 어깨 너머로 잡은 사이공우체국의 시계는 10시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시간이 나의 사이공 취재를 증명해줄 것이다.

    겁먹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사이공은 ‘졸고’ 있었다

    4월26일 한국 해군의 LST를 타기 위해 주월 한국대사관에 모인 교민들. 주월 한국대사관 마당에서 열린 교민회의(위부터).

    아무도 바라보는 이 없는데도 사이공시청 앞의 분수는 솟아오르고, 비둘기 떼는 한가롭게 도시의 지붕 위를 맴돌고 있었다. 사이공시청은 더욱 창백하게 보였다.

    “사이공 기온은 화씨 105도. 점점 뜨거워진다. 나는 꿈꾼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미국은 긴급철수 작전의 개시를 알리는 이 암호를 사이공에서 송출하는 ‘아메리칸 라디오서비스’ FM 라디오로 방송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방송국이 빙 크로스비의 노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내보내면 긴급 피난 대상자들은 약속한 ‘집결 지점’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러니까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20년간 계속된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침략적 개입’에 종지부를 찍는 ‘달콤한 노래’였다.

    10시35분, 모든 공관원들이 모여 있는 한국대사관저로 미국대사관 1등서기관 톰슨이 전화를 걸어왔다.

    “철수 작전이 시작되니 즉시 집결하시오.”

    나는 무개 지프에 정영순 무관과 이달화 무관 보좌관을 태우고 미국대사관으로 달려가, 이미 주인을 잃고 버려져 있는 수십대의 자동차 사이에 지프를 세웠다. 두 사람은 재빨리 짐을 끌어내린 뒤 미국대사관 안으로 먼저 뛰어 들어가 버렸다. 나는 정문이 닫혀 있어 철책 사이로 증명서를 내보인 뒤에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시각 워싱턴은 4월28일 밤 10시45분이었다. 포드 대통령은 네 번째 탈출 계획인 ‘프리퀀트 윈드(Frequent wind)’의 개시를 명령했다고 한다. 그때 김영관 대사가 미국대사관 발전실 앞으로 한국인 몇 사람을 데리고 나타나 소리쳤다.

    “이봐요, 누가 (한국)대사관하고 교민회에 가서 (한국인들을) 이리로 모이라고 좀 하지.”

    대답이 없었다. 내가 소리쳤다.

    “내가 나갔다 오지요.”

    나는 마지막 사이공 거리를 카메라에 담을 욕심으로 선뜻 나선 것이다. 김만수 기사가 운전하는 김 대사의 캐딜락을 타고 사이공 시내를 달리며 나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오후 12시30분쯤 한국대사관에 도착하니 교민과 그들의 월남인 가족 100여명이 남아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사관 구내를 돌며 소리쳤다.

    “한국 사람은 모두 미국대사관이나 유세이드(USAID·국제개발처) 앞으로 가서 여권을 제시하시오. 알았지요? 빨리들 가세요.”

    겁먹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사이공은 ‘졸고’ 있었다

    4월29일 미국인 등을 태우고 주월 미국대사관을 이륙하는 미 해병대의 치누크 헬기(오락센터 담 너머에서 찍었다).

    그러고 나서 재빨리 미국대사관으로 가려는데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한 짐 가득 실은 폴크스바겐을 세워놓고 있던 한 월남 공군장교가 소리를 질렀다. “뒤 좀 따라가도 되겠소?”

    김만수 기사는 속력을 내 미국대사관으로 내달렸다. 월남 공군장교의 폴크스바겐은 죽자꾸나 하고 뒤쫓아왔다. 미국대사관 앞 통냐트 대로는 아우성이 일고 있었다. 어느 결에 내 꽁무니에 따라붙은 교민 지동준 씨가 옷자락을 움켜잡으며 “기자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 이거 야단났군. 이거 큰일났어” 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그의 안달에 미칠 것 같아, 나는 “좀 가만있어요. 침착해요”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7번 집결 지점인 오락센터 후문 앞은 아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가 한국 특파원임을 밝히자 미 해병대원이 틈을 열어 안으로 들여넣어 주었다. 내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지 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자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1시, 오락센터의 담 안은 3000명이 넘는 각국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여러 대의 제트기가 뜨고, 대공포화가 하늘을 갈랐다. 월남군끼리의 싸움인지, 월남군과 월맹군 간의 전투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3시, 베트남 인근의 남중국해에 포진해 있던 미 해군의 구식 항공모함인 핸코크함 비행갑판에서 제463 중(重)헬리콥터 비행중대의 헬기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포드 대통령이 발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사이공의 아메리칸 라디오 서비스는 계속해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3시45분, 미국대사관 본관 옥상에서 붉고 노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중국해에서 날아오는 구조 헬기에 위치를 알리는 신호였다. 미 해병대 통신병이 송신탑에 기어 올라가 통신선을 절단했다.

    4시10분, 첫 번째로 치누크 헬기가 요란한 바람을 일으키며 오락센터 담 뒤편 본관 마당에 내려앉았다. 오락센터의 철문이 열리며 줄지어 서 있던 피난민 중 60명이 선착순으로 나갔다. 이어 치누크 떼가 본격적으로 날아왔다. 그러자 대사관 담 밖에서 잇따라 총소리가 울렸다. 해병대원이 월남인의 쇄도를 견제하기 위해 발사하는 공포였다.

    그렇게 한 무리가 가고, 7시가 되자 또 한 떼의 치누크가 왔다. 그러나 미국 대사관에 몰려든 행렬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헬기를 타지 못할까 불안해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중앙정보부 소속의 이대용 공사가 한국인 그룹의 진두에 나서서 큰 소리로 군기를 잡았다.

    7시30분, 어둠 속에서 세차게 빗줄기가 쏟아졌다. 탄손누트 공항 쪽에선 대공포화가 붉은 궤적을 그리며 치솟고, 컴컴한 하늘에선 번갯불이 요동쳤다. 무서운 밤이었다. 모두 주저앉은 채 비를 흠뻑 맞았다.

    겁먹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사이공은 ‘졸고’ 있었다

    4월30일 새벽 극적으로 미군 치누크 헬기를 탄 안병찬 기자는 미 해군 서전트 밀러함에 내렸다(왼쪽).이 배를 타고 필리핀의 수빅만까지 가는 동안 안 기자는 취재한 것을 타이핑해두었다.

    밤 10시, 본관 담 위에서 미 해병대원이 동료를 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 소리를 신호로 철문 앞을 지키던 해병대원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치누크 헬기 떼는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아직 한국대사관원과 교민은 한 사람도 헬리콥터 탑승장으로 나가지 못했다.

    사이공 시간으로 자정을 맞을 무렵, 워싱턴에서는 포드 대통령이 사이공에 있는 모든 미국인의 철수를 완료하라고 명령했다. 포드 대통령은 사이공 주재 미국대사인 마틴에게 강경한 메시지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19대의 헬리콥터만 더 보낸다. 더 이상은 없다.”

    4월 30일/운명의 시간

    시각은 운명의 4월30일로 접어들었다. 헬기를 기다리던 행렬은 이미 질서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러한 난민 틈에서 안창국 씨의 월남인 아내가 산기(産氣)를 일으켰다. 14개월짜리 아들을 안고 사람들 속에 끼여 있던 안 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산모는 남편의 허리를 꽉 껴안고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초인적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머린(해병)한테 얘기해요. 빨리! 산모가 있다고 말해요!”

    너도나도 한 마디씩 떠들기만 했지 아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새벽 0시20분. 가장 무서운 순간이 밀어닥쳤다. 7~8명으로 줄어 있던 미 해병대원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더니 ‘철커덩’ 철문이 잠긴 것이다. 난민 대열이 일시에 허물어지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쇠창살 두드리는 소리가 사이공의 새벽하늘을 날카롭게 찢어놓았다. 머릿속으로 어머니와 아내, 아이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그러고는 사고 기능이 정지하며 갑자기 멍한 상태가 되었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은 포기 상태에 빠진 듯 초점을 잃었다. 나는 공터 위를 무턱대고 우왕좌왕했다. 그러한 나를 보고 김상우 목사가 내 목적의식을 일깨워주었다.

    “이 장면 사진 찍었어요? 하나 찍어두세요.”

    김 목사의 자극으로 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0시30분, 정신을 차린 공관원들이 클럽의 빈 식탁에 모여 급히 구조요청 전문을 작성했다. 이대용 공사가 구술하는 내용을 순흥통상의 이순흥 씨가 서둘러 영문으로 기안했다.

    “대한민국 대통령께. 미국 측은 구출 비행을 중단, 거부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공관원을 비롯해 많은 교민이 남아 있습니다. 즉각적인 구조 조치를 바랍니다….”

    그러나 전문 수신인은 곧 김영관 대사로 바뀌었다. 나는 플래시를 터뜨려 비장한 극적 순간을 두 커트 잡았다. 그렇지만 전문을 어디로, 그리고 어떻게 보낼 수 있겠는가.

    0시50분, 미국 해병대원이 철문 안쪽에 나타났다.

    “진정하라. 조용하라. 우리가 여러분을 도와주겠다. 여러분 모두를 구출할 테니 질서를 지켜달라.” 지휘관인 미국 해병 대위가 손확성기를 들고 소리쳤다. 월남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겁먹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사이공은 ‘졸고’ 있었다

    4월25일 주월 한국대사관에서 교민들에게 해군의 LST를 타고 한국으로 철수하라고 독촉하는 조남신 영사(가운데).

    1시40분, 마지막 기회의 철문이 겨우 열렸다. 철문 틈을 한 사람씩 통과한 피난민은 착륙장에 수용됐다. 총성이 울리고 신호탄이 계속해서 올랐다. 종이를 태우는 봉화의 불이 대사관 본관 옥상에서 피어올랐다. 종이 재가 자욱하게 날아왔다. 지상 착륙장은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빙 둘러 밝혀놓고 있었다.

    3시15분 전, 처음으로 한 대의 치누크가 밤하늘을 날아와 굉음과 함께 대사관 옥상에 착륙했다. 최종 탈출을 위한 치누크 편대의 파동이었다.

    새벽 4시, 나는 여덟 번째의 치누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자동차 전조등의 조명 속에 치누크는 날개를 ‘윙윙’ 돌리고 있었다. 그 폭풍과 열에 진동하는 공기가 물체들을 신기루처럼 어른거리게 만들었다. 마침내 헬기 블레이드의 풍압(風壓)을 뚫고 맨 먼저 치누크의 뱃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순간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기관총수 옆에 자리 잡으면 사이공의 최후를 굽어볼 수 있지 않은가.’

    치누크에 탑승한 사람들은 누구도 한 마디 말이 없었다. 떠오르기 위해 힘을 더하는 블레이드의 강렬한 금속음이 소리의 전부였다. 치누크는 지체 없이 솟아올랐다. 정확히 새벽 4시10분이었다.

    그 밑으로 4월30일 새벽의 사이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서도 포화나 섬광은 보이지 않았다. 사이공은 뜻밖에도 별처럼 초롱초롱한 외등 속에 졸고 있었다. 가로등의 행렬이 텅 빈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미국대사관 옥상에서 피어오르는 봉화(烽火)만이 사이공의 절명(絶命)을 알리고 있었다. 이것이 기관총 창구 너머로 내려다본, 사이공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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