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8

2005.03.29

‘사랑과 섹스’ 얼마나 아십니까

KBS 감성과학 다큐 ‘사랑’에 시청자 호응 … 연인 뇌 촬영·부부 잠자리 등 다양한 실험 거쳐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5-03-24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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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섹스’ 얼마나 아십니까
    왕년에 열병 같은 사랑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일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그처럼 많은 사랑 노래와 멜로 영화로 사람들의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또한 ‘사랑’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하면, 누구나 “내 얘기를 글로 써도 책 한 권은 될 것”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이처럼 사랑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면서도 아직까지 누구도 사랑을 정의하지 못했다. 아니, 셰익스피어 같은 대문호에서부터 막 첫사랑에 빠진 ‘초딩’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정의했지만 그것은 모두 ‘그 자신의 경우’일 뿐이다. 사랑만큼 ‘그때 그때 다른’ 정신적 활동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욕망도 강렬하다. 21세기 첨단 과학기술이 의학 분야에 응용되면서 전 세계의 뇌의학자들은 경쟁적으로 사랑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어떤 정신적 활동에 의해 사랑에 빠지는가, 즉 사랑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자기공명영상(fMRI)이나 양전자방출 단층촬영(PET)이 발전하면서 사랑에 빠진 뇌는 ‘실험실의 개구리’가 되었다.

    1부 시청률 9.1% ‘기대 이상’

    뇌의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애인 사진을 볼 때의 뇌, 아이를 볼 때 엄마의 뇌, 애인과 키스할 때의 뇌, 연인이 고통당하는 장면을 보는 뇌, 심지어 포르노를 볼 때 건강한 청년들의 뇌와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의 뇌의 단면을 fMRI로 찍었다. ‘사랑’할 때 뇌의 어느 부분에 혈류량이 급격히 늘어나는지, 즉 뇌의 어느 부분이 활동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연인 사이의 사랑과 모성애는 어떻게 다른지, ‘낭만적인(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욕망’이라 부르는 것이 실제로 다른지, 인간의 사랑과 동물들의 사랑은 또 어떻게 다른지 등을 규명하기 시작했다.



    해외 언론들이 지난해 무렵부터 이 같은 결과를 쏟아냈다. BBC나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그중 하나다.

    KBS가 3월16일 첫 방송을 내보낸 3부작 감성과학 다큐멘터리 ‘사랑’도 fMRI를 통한 정신의 규명이라는 뇌과학 트렌드 위에 있는 프로그램이다. 과연 사랑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1부 ‘900일간의 폭풍(Falling in Love)’ 방송 시청률이 9.1%(AC닐슨)를 기록했다. 드라마와 맞붙은 다큐멘터리로서는 만족스러운 수치다. ‘사랑을 20자로 정의하기’라는 시청자 이벤트에도 첫 회 방송 후 1500편 가까운 응모가 몰렸다.

    ‘사랑과 섹스’ 얼마나 아십니까

    이탈리아에 있는 줄리엣의 집. 수많은 커플들이 이곳에 찾아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떠나버렸을 때 깨닫게 되는 집착’(유명옥), ‘아프지만 다시 꿈꾸게 되는 것’(이지현), ‘사는 동안 결코 풀리지 않을 숙제’(황경희) 등의 시청자 정의는 사랑에 빠질 때마다 사람들은 다른 감정적 변화를 겪으며,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야말로 사랑을 분석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을 과학으로 재단하려는 기획은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뇌 사진이나 과학적 자료만을 나열했다면 더 쉽게 제작할 수도 있었어요. 의학보고서를 영상으로 만든 건 이미 BBC나 디스커버리로 충분했다고 봅니다. 오히려 제작진이 인간의 감성과 과학 사이에서 깊이 고민했다는 것을 시청자들이 보실 수 있으면 해요.”(박수현 PD·조연출)

    ‘사랑과 섹스’ 얼마나 아십니까

    ‘사랑’팀은 만난 지 100일 된 커플들의 뇌를 fMRI 촬영하고 300일 후 다시 촬영했다.뇌의 본능 중추(왼쪽 사진 왼쪽)에서 대뇌피질(왼쪽 사진 오른쪽)로 활동영역이 옮겨갔음을 볼 수 있다.첫 번째 출산까지의 ‘900일간의 폭풍’이 지나면 열정은 급격히 떨어져 헤어지기 쉽다(오른쪽 위 그래프).

    부부 섹스와 건강의 관계도 연구

    1부 ‘900일간의 폭풍’에서 제작진은 가톨릭의대 정신과 채정호 교수팀과 함께 세계에서 처음으로 6개월의 시간 간격을 두고 사랑에 빠진 다섯 쌍의 뇌를 fMRI 촬영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2부 ‘SEX 37.2-사랑하면 건강해진다(Being in Love)’(3월23일 방송 예정)에서는 정기적으로 섹스를 하는 부부와 섹스리스 부부의 면역력을 비교한 결과를, 3부 ‘사랑의 방정식 5:1(Staying in Love)’(30일 방송 예정)에서는 결혼한 지 20년 넘는 부부를 대상으로 애정이 부부 개인의 삶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랑에 빠진 뇌와 신체를 최첨단 의료 장비로 분석하는 ‘과학 다큐멘터리’이긴 하지만, 과학은 사랑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과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감성과학 다큐멘터리 ‘사랑’의 진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만든 KBS 송웅달 PD는 “2003년 처음 기획했을 땐 KBS로서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보류되었다가 방송위원회 대상프로그램 기획부문에서 수상함으로써 태어날 수 있었던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2004년 4월 ‘사랑’팀은 각 대학 캠퍼스에 ‘100일 전후의 커플을 찾는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찾아낸 20대 초반 100쌍의 커플 중 심리테스트 등을 통해 5쌍을 선발했다. 제작진은 사귄 지 100일 된 커플의 fMRI를 촬영하고, 이후 6개월 동안 이들의 변화를 추적했다. 그 결과 100일 무렵 연인들의 뇌는 본능의 중추인 미상핵에서 혈류량이 급격히 늘어나지만, 300일 무렵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대뇌피질 부위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간에 따라 사랑이 변한다는 것을 과학이 입증한 셈이다. 채정호 박사는 이에 대해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열정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위로(?)한다.

    ‘사랑과 섹스’ 얼마나 아십니까
    그렇다면 열정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2편에서 제작진은 신혼 초에서 결혼 15년차 부부들을 대상으로 섹스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사한다. 분석 결과 주 1, 2회 정기적으로 섹스를 하는 사람들의 면역글로불린A, 노화방지호르몬 DHEA 수치가 모두 섹스리스 부부보다 2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주 3회 이상 섹스를 하는 커플의 면역력은 섹스리스 커플과 비슷하다는 결과도 제시한다. 즉 ‘적절한’ 섹스가 질병을 예방하고, 젊음도 유지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3편은 결혼한 지 20년이 넘은 부부들의 생활행동 분석을 통해 열정 이후 사랑을 유지하는 길이 무엇인지, 그것이 ‘애착과 안정’이라면 그런 감정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험 대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과학자들이 진공실험실에서처럼 다른 변수들을 제어할 수도 없고, 심지어 실험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실제로 ‘사랑’팀은 1편에 등장한 다섯 커플이 헤어질까봐 6개월 동안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랑과 섹스’ 얼마나 아십니까

    \'사랑\'팀이 100일 된 커플을 찾은 현수막(왼쪽)과 다큐멘터리 인터뷰에 응한 여러 부부들의 모습.

    “프로그램 제작이 마무리됐을 때 다섯 커플 중 한 명의 여자가 헤어졌다며 프로그램에서 빼달라고 졸라댔어요. 헤어진 이유는 현실적 고려, 말하자면 뇌 활동이 ‘미상핵’에서 ‘대뇌피질’로 넘어갔기 때문이랄까요? 너무나 난감했지만 그 커플이 워낙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매일 그들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눈치를 봤죠. 어느 날 ‘다시 만나기로 했다’며 홈피 대문에 두 사람의 다정한 사진이 다시 걸려 있더군요. 어찌나 기쁘고 다행스럽던지요.”(박수현 PD)

    현대의 ‘사랑’ 분석에서 뇌과학과 호르몬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를 밝힌다면, ‘왜’ 저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지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이 진화심리학이다. 사람의 마음을 다윈의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과학 이론으로도 사랑 설명하는 덴 부족”

    섹스의 쾌락 덕분에 인간(혹은 동물)은 여러 가지 위험과 출산의 고통 등에도 유전자 증식을 위해 노력한다든가, ‘이해타산적’이라며 비난받는 배우자 선택의 기준이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게 전하기 위해’ 자식을 함께 양육하기에 최적인 상대를 고르는 진화의 결과라는 설명이다. 같은 원리로 ‘무모한 사랑’도 설명된다. 물불 안 가리는 것처럼 보이는 열정도 짝짓기에서 당장의 이익보다 장기적으로 자식을 낳아 키우기 위해 서로에게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하게 하는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된 복잡한 정신현상이라는 것이다.

    진화이론의 약점은 이미 일어난 현상을 분석하는 데는 유용하나, 실제 인간들의 삶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삶을 조건 짓는 복잡하고 돌출적인 요인들을 변수로서 모두 고려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일, 예를 들어 애인의 무심한 재채기 한 번에 이별하여 다른 유전자 결합을 낳고 인류의 진화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사랑에도 ‘카오스 이론’이 적용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을 뇌과학이나 진화이론, 호르몬의 작용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19세기의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불규칙적인 우주를 규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과학으로 열정이나 애착 같은 사람의 감성을 분석하는 것은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소개한 여러 과학 이론은 현재까지 나온 가설 중 가장 받아들일 만한 것이지 사랑을 설명하는 덴 부족하죠. 수백 쌍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건 분석보다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박수현 PD)

    감성과학 다큐멘터리 ‘사랑’이 이야기하듯 상대를 아끼는 노력처럼 감동적인 건 없다.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보다 사랑에 빠져 상대를 바라보는 평범한 연인의 행복한 눈물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이 프로그램은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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