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7

2005.01.04

어려울수록 더 커가는 사랑과 나눔의 실천

사랑의 체감온도 탑 3주 만에 64.1℃ … 익명 거액 기부 급증·능력 제공하는 사람도 부쩍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4-12-29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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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불황의 그늘이 짙게 배인 가운데에서도 기부와 자원봉사의 손길이 부쩍 늘었다.
    • 정치권을 향했던 기업 기부금은 우리 이웃들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끝 간 데 없이 대립하던 노사는 ‘함께 잘살자’며 두 손 굳게 잡았다. 법적으로 성매매 피해자로 인정받게 된 여성들은 새 삶을 위한 기지개를 활짝 폈다. 새해를 가장 먼저 밝히는 것은 희망의 빛이리라. <편집자>
    어려울수록 더 커가는  사랑과 나눔의 실천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체감온도 탑.

    지구온난화의 영향일까. 사랑의 체감온도가 역대 최고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2000년부터 해마다 12월과 1월 두 달간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하는 ‘사랑의 체감온도 탑’은 목표한 모금액을 달성하면 100℃가 되는, 이웃사랑의 바로미터다. 그런데 올해는 탑을 세운 지 3주 만인 12월22일, 사랑의 체감온도가 무려 64.1℃ 까지 치솟았다. 전국 총 모금액이 628억원에 달한 덕분이다(2005년 1월31일까지 목표금액 981억원). 이는 역대 최고 수준의 모금 속도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보다 경기가 더 꽁꽁 얼어붙었다는 2004년이었는데도 말이다.

    요즘 서울 광화문 일대엔 ‘나눔의 빛’이 한밤중 어둠까지 환하게 밝히고 있다. 12월15일부터 열리고 있는 자선기부 대축제 ‘2004 우리이웃 서울 루미나리에’가 그 주인공. 주최 측은 사회복지법인 굿네이버스와 손잡고 광화문 일대와 온라인을 통해 결식 피학대 북한 아동을 돕기 위한 기부금 모금에 나섰다.

    꽁꽁 얼어붙은 경기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훈훈’



    이번 겨울은 유난히 익명의 거액 기부자를 많이 볼 수 있었다. 8월17일에는 빈민들에게 창업자금을 빌려주는 사회연대은행 계좌로 1억5000만원의 거액이 전해졌다. 이 금액은 저소득 가정의 가장 15명이 창업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규모다. 사회연대은행 측은 30대 중반 남성으로만 알려진 이 기부자에게 감사 인사를 꼭 하고 싶다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으나, 그는 끝내 연락해오지 않았다. 12월16일 ‘아름다운 재단’ 사무실에 찾아온 30대의 한 아주머니는 1000만원이 든 봉투를 내놓고 이름 석 자도 알려주지 않은 채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22일 전북 전주시의 한 동사무소 앞에는 500만원이 든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우리 동네만이라도 불우 이웃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적힌 메모와 함께.



    어려울수록 더 커가는  사랑과 나눔의 실천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자선기부 대축제 ‘2004 우리이웃 서울 루미나리에’를 찾은 시민들.

    몇 년째 구세군이 거리에 나올 때마다 서울시청 지하보도의 자선냄비에 100만원이 든 봉투를 넣고 가는 ‘얼굴 없는 천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100만원짜리 돈 봉투를 냄비에 넣었다. 12월 초순 부산의 구세군 자선냄비에서도 2000만원이 든 봉투가 나오기도 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도 익명의 거액 기부자가 급증했다. 지난겨울 캠페인 때 두 달간 1000만원이 넘는 기부자가 9명이었는 데 반해, 올해에는 캠페인 시작 3주 만에 익명의 기부자가 모두 7명에 달했다. 이들이 기부한 액수도 모두 합치면 1억5500만원이나 된다.

    12월17일 익명의 노부부가 서울대병원에 암 연구를 위해 써달라며 88억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는 또 한번 따뜻해졌다. 그 주인공은 나중에 한 중견기업의 회장으로 알려졌는데, 이 회사의 한 직원은 “뉴스를 접하고 직원들 모두 ‘역시 우리 회장님답다’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말했다.

    “아들인 사장님도 거액 기부에 흔쾌히 동의했을 분입니다. 회장님만큼이나 검소하시거든요. 고급 승용차도 싫어해서 국산 RV 차를 타고 다니십니다. 사장실도 일반 사무실과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예요.”

    어려울수록 더 커가는  사랑과 나눔의 실천

    세탁소를 운영하며 ‘1% 나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김광호씨.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위하는 ‘작은 천사’

    그러나 올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한 나눔의 정은 이 같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에만 기댄 것이 아니었다. 넉넉하지 않은 사람이, 몸 불편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는 이야기가 2004년을 가득 채웠다. 동아일보가 2003년 12월31일부터 시작해 총 50회에 걸쳐 실은 ‘2004, 이 천사’ 시리즈의 주인공 대부분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뼈가 부러지는 희귀병에 시달리면서도 20년째 생면부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써 보내는 오아볼로씨,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열댓 명의 저소득층 가정 자녀들을 무료로 가르치는 김표남씨, 급성 뇌출혈로 쓰러진 뒤 불편해진 몸으로 독거노인과 소년가장을 돌보고 있는 경찰관 박정미 경사….

    2000년 화재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었을 때 도와준 이웃들이 고마워 동료들과 함께 ‘집수리 자원봉사단’을 꾸린 정순영씨(54·서울 은평구청 청소과 차량 운전사)는 한 달에 60만∼70만원이나 되는 자비를 털어 어려운 이웃들의 집을 고쳐주고 있다. 수도꼭지 고쳐주러 갔다가 어둠침침한 백열등과 빗물 새는 지붕이 마음에 걸려서, 이름 모를 후원자가 보내준 쌀을 전해주러 가는 길에 라면 한 박스를 더 얹어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렇게 많은 돈이 든단다. 정씨는 “처음엔 시큰둥했던 가족들도 이젠 같이 나서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경기 수원에 있는 SK케미컬 중앙연구소 직원 15명으로 꾸린 자원봉사단체 ‘줄란’의 대장 이현수씨(40)는 근육이 점점 굳는 질병을 앓는 중증장애인이다. 이씨는 혼자 일어서는 것조차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나마 병의 진행속도가 느린 게 다행이라면 다행. 그런 그가 지난여름 발벗고 나서서 꾸린 이 봉사단체가 사내에서 따뜻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외손자와 함께 단 둘이 사는 한 할머니를 후원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줄란에 동참하는 직원들의 손길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 매달 후원금을 내겠다는 직원이 40명이나 생겼고, 과장급 직원들이 송년회 2차를 하지 않겠다며 50만원을 전해왔다. 이에 질세라 부장급 직원들도 2005년 초 열리는 진급 파티로 올해 송년회를 대신하겠다며 100만원을 쾌척했다. 지난 여름부터 직원들이 종이저금통에 동전을 모았는데 그게 15만원이나 됐다. 12월11일 이씨와 동료들은 이 돈으로 연탄 300장을 사서 수원에 사는 독거 노인들에게 전했다.

    “몸이 불편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운전하는 것과 노인들 말벗이 돼주는 것이 전부예요. 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이웃을 도울 때 내 마음부터 충만해지기에 그냥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어요.”

    어려울수록 더 커가는  사랑과 나눔의 실천

    저소득층 여성 가장들에게 애완 의류 기술을 전수한 ‘노바독’의 두 사장.

    매달 꾸준하게 성금을 기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상류층보다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오히려 남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게 모금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1% 나눔’ 운동을 펼치고 있는 아름다운 재단에서는 이러한 작은 천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매달 사무실을 찾아와 2만원씩 놓고 가는 한윤학씨(49)는 매달 정부에서 지원받는 20만원이 수입의 전부인 중증장애인. 20년 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반신 불수가 된 한씨는 “남들에게 사랑만 받고 살았지 줘본 적 없는데, 기부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경기 남양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김광호씨(46)는 매달 7일이면 한 달 수입의 1%를 정확히 떼내 직접 은행에 가서 재단으로 성금을 보내고 있다. 학원을 운영했던 그는 98년 외환위기로 학원 문을 닫은 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에 세탁소를 열며 어려운 이웃을 돕기로 결심했다. 손님들이 맡긴 옷에서 1000원짜리 지폐나 동전이 나올 때마다 “기부하시겠습니까?”라고 전화를 건다. 동대문에서 아동복 매장을 운영하는 이성호씨(45)는 8년 전 머지않아 시력을 완전히 잃을 것이란 진단을 받은 뒤 ‘기부 운동가’로 변신했다. 3년째 아름다운 재단에 매달 3만원씩 기부하는 것은 물론, 불교에서 운영하는 복지재단과 교회에도 매달 기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장기 기증 서약도 맺었다. 아버지가 전립선암을 앓다 돌아가시고 경기불황으로 가게를 닫을 처지지만 이씨는 “기부는 끊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려울수록 더 커가는  사랑과 나눔의 실천

    경기침체에도 올해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액은 지난해에 비해 6% 많아졌다.

    “작은 내 것 쪼개 내놓으면 더 큰 충만함”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내 생의 의지입니다. 시력을 잃게 됐을 때 자살도 여러 번 시도했죠. 하지만 이젠 기부를 통해 내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장기 기증 서약을 한 것도 내 장기를 이어받을 사람을 위해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열심히 살자는 각오의 뜻이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제공하는 것 또한 훌륭한 기부의 한 방법이다. 애견의류업체 노바독(www.novadog.co.kr)을 운영하는 김홍지 백영선씨는 사회연대은행에서 소개받은 애견의류업을 창업하고 싶어하는 저소득층 여성 가장 4명에게 애견의류 디자인이나 바느질뿐만 아니라 애견사업 현황, 시장구조, 전망 등까지 가르쳤다. 여성 가장들이 창업한 뒤에도 수시로 자문해주고 주문받은 일거리를 나눠 하기도 한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은제품 도매상을 하는 선혜련씨(41) 또한 2004년 여름 5명의 여성 가장에게 실버 공예를 가르쳤다. 선씨는 “여성들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고, 가족들을 부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게 가장 큰 보람이다”면서 “제자들이 요즘에도 종종 가게에 놀러 와 자신이 만든 제품을 자랑하곤 한다”며 흐뭇해했다.

    어려울수록 더 커가는  사랑과 나눔의 실천

    SK케미컬 중앙연구소의 자원봉사단체 ‘줄란’의 회원들. 뒷줄 왼쪽 첫 번째가 이현수씨.

    따뜻한 눈으로 보는 세상은 따뜻하다. 우리 사회의 숨은 작은 천사들은 그렇게 말한다. 내 작은 것을 쪼개 내어놓으면 더 큰 충만함이 내게 돌아온다고. 구세군 임민영 간사는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구세군 냄비에 300원을 넣은 이름 모르는 할아버지를 꼽았다.

    “광화문 새문안교회 앞 자선냄비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아서 매일 구걸하시는 한 할아버지가 있어요. 아침마다 항상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들고 제 앞을 지나가시곤 하던 분인데, 어느 날 300원을 자선냄비에 넣으셨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커피 한 잔 값을 아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고 말씀하시면서요. 우리 둘이 서로 한참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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