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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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빈 역사의식 ‘위안부’ 두 번 죽였다

이승연 누드 수모와 치욕 상처 건드려 … 성 상품화 전 국민 분노 일파만파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4-02-19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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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 빈 역사의식 ‘위안부’ 두 번 죽였다

    2월12일 영상제작 신규사업을 발표하고 있는 이승연.

    ”우리는 칼에 찔리고 배를 갈라서 옷 벗으면 사람 같지 않아요. 이런 할머니들을 속여서 그 여자(이승연)가 옷을 벗고 사진을 찍고,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요?”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던 악몽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들은 끝내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손자, 손녀뻘 되는 젊은이들이 무능한 조국과 남자들 대신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수모와 치욕을 사진으로 되살려 ‘서비스’하겠다는 데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이미 법원에 누드 동영상 제공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황모 할머니(85)는 “기자들도 나빠. 저것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 가만있었나?”라며 울부짖었다. 2월16일 오전, 탤런트 이승연의 이른바 ‘강제위안부 프로젝트’를 추진해온 네띠앙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이 서둘러 삭발식을 하고, 공식사과문을 발표한 직후였다.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공식 사과하겠다는 발표와 달리 네띠앙엔터테인먼트 박지우 이사는 관할 형사의 설득으로 뒤늦게 나타나 “우리의 순수한 의도가 잘못 알려진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1차 촬영물에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시위에 참가한 강제위안부 할머니의 한 유족은 박이사가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사진과 비디오를 내 눈앞에서 불태워라”라며 울먹였다.

    ‘강제위안부 프로젝트’의 주인공인 이승연은 소기 목적 중 하나는 이렇게 달성했다. “꼭 짚어봐야 할 역사적 사건, 그것을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이 함으로써 더 큰 영향력을 낼 것”이라던 그녀의 호언장담도 적중했다. 그러나 이렇게는 아니어야 했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내 눈앞에서 불태워라” 울먹여

    골 빈 역사의식 ‘위안부’ 두 번 죽였다
    이승연은 사업 파트너인 네띠앙엔터테인먼트와 로토토에 맞춤형 쇼핑몰 등 인터넷 콘텐츠 사업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다른 연예인 누드와 차별화하기 위해 자신을 ‘일본군 위안부’로 연출하는 파격적 컨셉트를 제안함으로써 ‘대박’을 터뜨리고 ‘신규사업’에서 주도권을 쥐려 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승연은 ‘강제위안부’라는 컨셉트가 강간의 포르노를 표현하기에 적당한 소재라는 점을 알았다. 한 톱스타 누드 촬영을 맡았던 사진작가는 “모바일 서비스 콘텐츠로는 감히 생각하기도 어려운 설정”이라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이승연은 전략적으로도 큰 실수를 했다. 그녀의 ‘위안부’ 영상물을 사주어야 할 소비자들, 즉 모바일 서비스나 웹 서비스를 이용하는 익명의 남성 네티즌들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경우 매우 민족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이라는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한일, 한미 관계나 페미니즘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는 곳은 어디나 논리보다 감성이 이기는 무시무시한 전쟁터가 되곤 한다. 이승연의 ‘위안부’ 영상물의 경우, 사이버 공간의 두 뇌관을 건드림으로써 변명의 여지 없이 최악의 대접을 받고 있다. 이승연이 기대했던 남성 네티즌들이 설사 ‘강간’의 컨셉트를 마음에 들어한다 해도 ‘강제위안부’로 연출한 그녀의 사진에 대해서는 돈 때문에 부정한 누이, 간통한 아내를 보는 듯한 배신감을 느끼는 듯하다.

    한편 이승연의 말대로 ‘성 상품화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하는’ 여성주의적 네티즌들은 강간의 포르노를 돈 내고 사지 않는 집단이다.

    이미 디씨인사이드 등의 ‘폐인’들 사이에서는 ‘공공의 적’이 된 이승연을 ‘처단’하는 엽기사진들과 욕설들이 게시판을 수없이 장식하고 있다. 그중에는 ‘세계 평화를 위해 이라크에서 누드 촬영을 시키자’ ‘여성부는 왜 이럴 때 가만있나’라는 힐난도 적지 않다. 또 ‘더러운 조센징’ 등 친일 카페는 호재를 만난 듯 한국인과 여성들을 비하하고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할머니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한 다음 카페 ‘안티리’의 박정옥씨(29)는 “3일 만에 4만명이 모여 이승연에 호의적 보도를 한 TV프로그램과 네띠앙, 시스윌의 서버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고 밝혔다.

    골 빈 역사의식 ‘위안부’ 두 번 죽였다

    5일 뒤인 16일 영상제작을 추진한 네띠앙엔터테인먼트 박지우 이사가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 앞에서 사과발표문을 읽고 있다.

    이승연은 우리나라 강제위안부들이 끌려가 추행을 당했던 팔라우에서 촬영하며 눈물이 줄곧 멈추지 않았다고 말하고 로토토측도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선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이라면 촬영 전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의 동의를 구했어야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를 만든 변영주 감독 등 할머니들의 삶을 작품으로 만든 많은 예술인들이 숙식을 함께하며 인내로써 진심으로 이해를 구한 사실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승연과 네띠앙엔터테인먼트 등은 협의는커녕 기자회견 사실조차 정대협에 알리지 않았다. 기자회견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정대협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진이나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있을 뿐이다. 정대협의 강주혜 홍보국장은 “시간이나 정황으로 보건대 기자회견장에 누드 사진과 함께 전시하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골 빈 역사의식 ‘위안부’ 두 번 죽였다

    네티즌들이 분노를 담아 만든 이승연과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합성사진.

    결국 할머니를 위한 누드 자원봉사가 아니라 돈 때문에 누드를 기획했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강제위안부라는 충격적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은 이승연 스스로 기자회견에서 “상업성이 없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사업을 추진한 로토토는 합병한 타이거풀스가 체육복표 비리 의혹에 휘말린 데다 영업부진까지 겹쳐 주가가 폭락에 폭락을 거듭한 회사로 위안부 누드 등 신규사업 추진공시로 잠시 상한가를 쳤으나 이후 계속 하락 16일 현재 700원대로 추락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실무 추진한 네띠앙엔터테인먼트는 로토토가 네띠앙 인수를 위해 설립한 연예기획사로 소속 가수인 ‘미시밴드’에 강금실 장관 올케가 있다고 잘못 발표하는 등 잇따라 물의를 빚었다.

    미스코리아 당선 이후 탤런트와 MC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승연은 1998년 운전면허 불법취득으로 불구속 기소된 뒤 잇따른 악재로 고전 중이었다.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2002’가 상대 배우인 이경영의 미성년자 성매매로 흥행에 참패했고, 큰손 장영자의 아들 및 계몽사 H대표와의 관계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승연과 로토토, 네띠앙엔터테인먼트로서는 예고된 비난에도 불구하고 ‘강제위안부 프로젝트’를 국내 및 일본에 팔아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친 셈이다. 그러나 파문은 홍보 효과를 넘어섰고 서비스 제공자들이 판매를 거부하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이르렀다. 네띠앙엔터테인먼트 등이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꿔 삭발까지 한 것도 사실상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된 이상 빨리 공개사과하는 방법 외에 다른 대책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승연은 늘 “난 하고 싶은 말은 한다. 솔직한 걸 제일 좋아한다”고 말해왔다. 사실 크고 작은 스캔들에도 그녀가 대중들의 호감을 얻은 건 솔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 사업추진을 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더구나 병들고 늙은 몸을 끌고 시위현장에 모인 할머니들의 분노를 회피함으로써 그녀는 실수를 돌이킬 기회마저 놓쳐버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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