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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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성추행을 무장 해제하라”

잇단 사건으로 심각성 드러나 … ‘계급 횡포’에 피해자들 분노·수치의 가슴앓이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3-07-23 15: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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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 성추행을    무장 해제하라”
    7월16일 오전 경기 의정부시 국철 의정부역 주변. 의정부역은 경기 북부지방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는 장병들이 휴가 길에 거쳐가는 곳이다. 사병 3명이 역전 맞은편 시외버스 터미널 인근의 한 부대찌개 집에서 거나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소주와 얼큰한 찌개는 휴가 나온 사병들이 갈급증을 느끼는 대상이다. 혈기왕성한 나이인 터라 술을 물 마시듯 한다. 비워버린 소줏병이 벌써 4병째. 소주 한 잔을 받아들고 “대대장이 이등병을 성추행한 사건을 아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대대장이 장난친 걸 그 친구가 과민하게 받아들인 것 같더라고요. 저희 부대에서도 차렷 시켜놓고 고추 만지는 소대장이 있어요. 다 귀엽다고 그러는 건데 신고하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요.”(K일병)

    K일병의 말에 L일병이 발끈했다.

    “너희 소대엔 이상한 고참 없어? 우린 엉덩이에다 거시기 비비지 않으면 잠 못 자고 발작 일으키는 놈도 있고, 만져달라는 놈도 있는데…, 우리 동기 한 명은 완전히 ××의 갈따구 노릇까지 하고 있다니까.”(L일병)

    소주를 들이켜던 Y일병은 고참들이 성적인 장난을 치는 일은 많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며 K일병 편을 들고 나섰다.



    “몸 만지고 그러는 고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냥 장난으로 그러는 것 같아요. 저 이등병 때도 고참 한 명이 옆자리에 데리고 자면서 예뻐했거든요.(웃음) PX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Y일병)

    “야~ 취향 독특하다, 그 인간.”(L일병)

    가해자는 ‘장난’ 피해자 입장에선 참기 힘든 ‘고통’

    “군대 성추행을    무장 해제하라”

    인터넷 채팅은 신세대 사병들이 갈급증을 느끼는 대상 중 하나다.

    7월17일 오전 의정부역 인근의 한 PC방. 인터넷 역시 사병들이 갈급증을 느끼는 대상이다. PC방에선 인터넷에 열중하고 있는 사병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외출 나온 사병들은 주로 채팅을 했는데 또래의 젊은 남자들이 그렇듯 채팅하는 목적은 ‘여자 꼬시기’다. 한 병사는 “곰팡이가 슬 지경이다”며 “채팅하다 운 좋으면 회포도 풀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신세대 병사들이 가장 갈급증을 느끼는 건 소주도 찌개도 인터넷도 아닌 ‘여자’인 듯했다.

    PC방에서 만난 김모 병장(21)에게선 군대 내 성추행과 관련한 좀더 충격적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등병으로 부대에 전입하자마자 그의 동기 1명이 고참한테서 오럴섹스를 요구받았다는 것. 김병장의 동기는 그런 요구를 거절했고 그 고참이 제대할 때까지 동기의 군생활은 시쳇말로 ‘꼬였다’고 한다. 동기한테서 이런 얘기를 전해 들은 뒤 김병장은 그 고참 병사와 함께 야간근무를 설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부동자세를 시켜놓고 장난처럼 아랫도리를 만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다행히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군대 내에서 그런 일을 겪은 병사가 한둘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꼭 우리 부대에서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게 마련이잖아요. 제 동기 같은 경우에는 충격이 컸을 겁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다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구타당하는 게 낫지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그런 일을 당하고 제 정신이겠어요.”

    “군대 성추행을    무장 해제하라”
    군대에서의 동성간 성추행은 사병들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생각보다 빈번하게, 또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취재팀이 만난 30여명의 병사 중 3분의 2 가량이 군대 내에서 ‘장난 수준’의 성추행이 벌어지고 있다고 답했고, 5명은 성기 애무 등 꽤 심각한 수준의 성추행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거나 그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고 대답했다. 성추행을 목격했다는 사병들의 대부분은 “여자 구경을 못하다 보니 생긴 조금 심한 장난이었다”는 반응을 보였고, “남자들끼리 그 정도 행동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은 다르다. 받아들이는 수준에 차이는 있겠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군대에서 성추행을 당한 충격에서 아직도 완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예비역 박모씨(28)는 “지금도 당시 일을 꿈으로 꾸곤 한다”면서 “가해자가 제대할 때까지 죽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1996년부터 98년까지 전방 모 부대 헌병대에서 복무한 노모씨(28)는 “영창에 수감되는 사병들 중 성추행으로 들어온 경우가 꽤 있었다”며 “두 번이나 군무이탈을 하는 등 영창을 제집 드나들듯 한 한 사병은 ‘고참들한테 성추행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탈영했다’고 말했다”고 군 시절 경험을 전했다.

    최근 군대 내 성추행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킨 A일병 사건도 한 극단적 사례다. 선임병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괴로워하던 육군 모 부대 소속 A일병은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일에 2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일병 사건이 잊혀질 즈음 또 다른 성추행 사건이 ‘군대 밖으로’ 알려졌다. 이번엔 장교가 사병을 성추행한 사건이었다. 육군 모 부대 대대장 손모 중령이 소속 부대 B이병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바지 속에 손을 넣어 성기를 만지는 등 성추행한 혐의로 군 사법기관으로부터 조사받고 있다고 국방부가 밝힌 것.

    2년6개월간 성범죄 통계 666건 … ‘빙산의 일각’ 지적 많아

    그러나 이 두 사건은 겨우 빙산의 일각을 드러냈을 뿐이다. 군대 내 동성간 성폭력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거의 없다. 이는 동성간의 성추행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는 군대와 사회 분위기 탓이다.

    군내 성추행과 관련한 몇몇 통계자료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2000년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998년 이후 2년6개월 동안 발생한 현역장병들의 성범죄 건수는 항문 성기 삽입 244건, 동성간 추행 133건을 포함해 모두 666건이었다. 휴가사병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10.5%가 강압적으로 성적 요구를 받거나 그런 장면을 목격하거나 주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응답했다. 유형별로는 △성행위 흉내내기 30.2% △신체 애무 15.9% △성 경험담 말하기 14.5% △동침 행위 12.7% △자위행위 9.5% △성기 애무 3.2% △오럴섹스 1.6% 등의 순이다.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들은 군 관련 자료 통계에 잡힌 성추행 사례는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성추행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정식 처벌을 받기보다는 다른 명목으로 징계입창(징계를 목적으로 영창에 수감하는 것)되거나 군기교육대에 끌려가는 선에서 마무리된다는 것. 한 변호사는 “지휘를 잘못해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는 질타를 듣게 될 것을 우려한 지휘관들이 사건을 무마하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80년부터 91년까지 군법무관으로 복무한 이기욱 변호사는 수십년 묵은 군대 내 성폭력 문제가 왜 이제 와서야 드러나기 시작하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이변호사는 최근 터져 나오고 있는 군대 내 성추행 사건을 지켜보면서 군 시절에 목격했던 ‘불쾌한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고 한다.

    “군 시절, 군 성직자가 군종병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사건을 접했습니다. 당연히 가해자가 형사입건 돼야 하는 사건이었지만, 가해자인 성직자가 다른 부대로 전출되는 선에서 마무리됐어요. 군대에서 고참병으로부터 성관계를 강요당한 전역병이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며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군대 내 성폭력을 양지로 끌어내 심각하게 얘기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군대 성추행을    무장 해제하라”

    여가시간에 장기(왼쪽)와 컴퓨터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병들.

    올 초 군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변호사 사무실을 연 김모 변호사도 군법무관 시절 성추행 관련 사건을 허다하게 접했다고 한다. 김변호사는 “군대 내 성추행 사건은 군 당국의 통계에 잡히는 것보다 훨씬 많다”고 말했다. 김변호사가 모 사단에서 군법무관으로 일할 때 현역으로 입소한 친동생이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변호사는 “형이 군법무관이라는 것을 고참병들이 알고 있었는데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며 “하물며 보통 사병들의 경우는 어떻겠느냐”고 되물었다.

    “동성간의 성추행은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후임병이 신고를 하더라도 부대장들이 쉬쉬하며 덮는 경우가 많고, 기소가 되더라도 부대장의 강요 등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제추행은 친고죄라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거든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군대에서의 동성간 성폭력 후유증을 앓고 있는 남성들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상담을 의뢰한 사례는 지난해 모두 4건에 불과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10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다” “결혼한 뒤에도 정상적으로 부부생활을 할 수 없다”는 등의 괴로움을 호소하며 “어떻게 하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군대 내에서 발생하는 남성간의 성추행은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동성애자의 경우를 제외하면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가하는 일종의 ‘계급 폭력’이라는 얘기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후임병을 억제된 성욕을 발산하는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윤가현 교수는 저서 ‘동성애의 심리학’에서 한 남성 성폭력범의 말(“나는 섹스에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내가 그를 상처 입히면서 힘을 느끼는 것이 더욱더 나를 흥분시켰다”)을 인용하면서 “동성간 성폭력 사건의 가해 남성은 상대방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심리 상태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남성이 남성한테 성적인 폭력을 당했을 경우 피해자의 후유증이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아직도 완고한 가부장제 사회인 한국에서 장차 가부장이 될 남성으로서 성적으로 지배당하는 굴욕감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군내 성폭력은 A일병의 경우에서 보듯 평범한 장병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이명숙 변호사는 “군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쉬쉬해왔던 군내 성폭력은 이처럼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며 “군이 적극적으로 대응해 이번 사건들을 계기로 군 성범죄가 근절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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