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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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美軍기지는 ‘공사중’

시설 노후 이유 고가도로·아파트 신축 계속 … 이태원 관광특구 상인들은 자구책 마련 골몰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03-06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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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 美軍기지는 ‘공사중’

    한미 양국이 용산 미군 기지 이전에 원칙적으로 합의하면서 ‘한국 안의 미국’ 용산기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가롭게 부대 안을 걷고 있는 미군 장병들.

    2월26일 오후 4시10분, 서울 용산 미군기지 앞은 한 무리의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미군이 2월3일 시작한, 기지 북쪽 메인 포스트와 남쪽 사우스 포스트를 연결하는 고가도로 건설 공사에 항의하는 시위대였다.

    “미군은 우리 정부와 기지 이전을 협의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고가도로를 놓고 아파트 건설 공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전 요구가 높아지니까 당장 면피만 하고 결국 용산에 눌러앉으려는 것 아닙니까.”

    시위대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피켓을 흔들었지만 기지 안의 미군들은 일상적인 일인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기지와 시위대 사이를 가로막은 한국 경찰 수십명이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당장 한국서 나가라” vs “미군 없으면 다 죽는다”

    같은 시각 이곳에서 불과 5분 거리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는 ‘이태원 관광특구 연합회’의 비상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미군기지 이전이 현실화되는 데 놀란 상인들이 “이러다 이태원이 다 죽게 생겼다”며 급히 만든 자리였다. 이곳에 모인 100여명의 상인들은 “우리라도 나서서 기지 이전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격렬한 토론 끝에 3월부터 ‘이태원 살리기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본격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당장 한국에서 나가라’는 주장과 ‘미군 없으면 용산이 다 죽는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현실, 용산기지 이전 논의의 현주소다.

    한미 양국이 내년부터 용산기지를 이전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하면서 용산지역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곳은 1952년 미군기지가 들어선 뒤 50여년간 ‘한국 속의 아메리카’로 남아 있던 곳이다. 주한미군 기지 ‘용산 개리슨’은 한국지도에서는 찾을 수조차 없는 지워진 땅. 지도상에서 서울 용산구 남영동과 이태원동, 동빙고동 사이 공간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백지다. 이 여백처럼 용산기지의 실상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한 기밀이었다. ‘노터치 공화국’으로 불렸던 용산기지는 과연 이전 논의 한가운데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용산 美軍기지는 ‘공사중’
    미군측에 따르면 용산기지의 면적은 630에이커로 약 78만평에 이른다. 6만9000여평에 ‘불과’한 여의도공원의 11배에 이르는 크기. 동서로는 한강대교, 동작대교, 반포대교 3개 대교에 걸치고 남북으로는 한강 이북에서 숙대 전철역에 이르는 넓이다. 이 거대한 규모 안에 군사시설이 주로 들어선 메인 포스트(23만9000평)와 숙소, 위락시설이 밀집한 사우스 포스트(51만700평), 미8군 인사 행정 사령부와 카투사 등이 자리한 캠프 코이어 등이 있다. 미군 관계자는 “이곳은 군사기지가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사회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문했다.

    기지 안에 들어가려면 먼저 입구의 출입증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미군과 미 군속, 카투사 등 제한된 이들에게만 발급되는 이 출입증은 한때 정치인, 경제인 등 고위층 인사들이 앞다투어 구하려고 했을 만큼 인기가 높았던 패스. ‘용산기지 패스는 신분증명서’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던 인기는 최근 많이 시들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용산기지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기지로 통하는 문은 크고 작은 것을 합쳐 30여개. 이중 메인 포스트와 사우스 포스트로 바로 통하는 5번, 10번이 주 출입구 구실을 한다.

    5번 게이트를 통해 기지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이국적인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쭉 뻗은 포장도로와 정돈된 잔디 한편으로 저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미군들이 “봄이면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자랑할 만큼 잘 보존된 녹지 사이로 연병장과 한식 기와지붕의 한미연합사령부, UN군사령부, 각종 참모부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산 美軍기지는 ‘공사중’

    용산기지 안에 있는 1급 호텔 드래곤 힐 랏지. 슬롯머신 게임룸이 있는 이 호텔에는 방한한 미국 주요 인사나 미군 관계자들만 묵을 수 있다. 아래는 한국전 참전 기념탑.

    용산기지는 한미 연합 방위체제의 핵심 본부가 들어선 곳. 유사시 지휘부가 들어가 한반도 전쟁을 총지휘하는 지하 벙커도 이곳 메인 포스트에 있다. ‘CC 서울’이라고 불리는 이 벙커는 9·11 테러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들어가 작전을 지휘한 곳으로 한반도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첨단장비가 설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사기지가 밀집돼 있는 메인 포스트를 지나 사우스 포스트로 들어가려면 일단 기지 밖으로 나가 이태원로를 가로질러야 한다. 이곳은 미군 차량과 일반 차량이 뒤엉키며 출퇴근 시간이면 상습적으로 정체되는 곳. 5km에 불과한 거리를 지나기 위해 20여분을 차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미군은 두 포스트를 연결하는 이 지역에 현재 시민단체 등에서 반대하는 고가도로를 건설중이다. 미군 관계자는 “기지 이전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문제도 아닌데 건설공사에 대해 왜 그리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며 “당장 내일 기지를 옮겨도 오늘 고가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게 미군측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미군이 치외법권이라도 가진 것처럼 말하는데 문 두 개를 통과하는 데 30분씩 걸리는 걸 참다가 이제야 건설공사를 시작하며 눈치보고 있는 걸 봐라. 미군이 잘나간다는 말은 다 옛말 아니냐”고 자조 섞인 푸념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우스 포스트의 풍경은 ‘끈 떨어진 미군’ ‘곧 떠날 미군’이라는 이 관계자의 말과는 사뭇 달랐다. 메인 포스트의 2배가 넘는 사우스 포스트는 이곳이 단순한 군대가 아니라 거대한 사회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 초·중·고등학교와 병원, 1급 호텔과 슬롯머신을 갖춘 게임룸 등이 모여 있다.

    10번 게이트를 들어서면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드래곤 힐 랏지 호텔’은 기지 내에서 보기 드문 고층건물(7층)이다. 우리나라 1급 호텔 수준으로 실내수영장과 쇼핑센터, 인공폭포와 산책로 등까지 갖추고 있는 이곳에는 우리나라에 입국한 미국 주요 인사나 미군, 미 군속들만 묵을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150여대의 슬롯머신 게임기를 갖춘 게임룸이 있는 호텔로 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드래곤 호텔을 제외하고는 사우스 게이트 안에서 높고 화려한 건물은 찾기 힘들다. 대신 자연녹지 곳곳에는 붉은 벽돌과 나무 등으로 지어진 펜션 형태의 주택들이 자리잡아 미군의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울타리가 없는 집들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학교, 체육관, 도서관 등의 시설은 군복을 입은 채 거리를 지나는 군인들만 없다면 한가한 시골마을로 오해할 만한 정경.

    그러나 이 평화로운 외관 곳곳에서는 논란을 빚고 있는 미군용 아파트 신축과 병원 건물의 증축 등 각종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실 미군들은 용산기지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 “기지가 너무 낡았고,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 불평의 핵심이다.

    한 미군은 “기지 내 건물들은 대부분 40~50년씩 된 것들로 외관만 멀쩡할 뿐 엉망진창이다. 용산에서 기름 유출 사고가 자꾸 일어나는 것은 송유관이나 가스 탱크가 노후한 때문이지 미군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

    주한미군 관계자도 “53년 한국전 휴전 직후 지어진 수십동의 퀀셋 막사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것”이라며 “한국의 근무여건이 외국에 비해 지나치게 낙후돼 한국 배치를 명령받은 미군의 절반 가까이가 전역을 신청할 만큼 기피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말했다.

    주한미군측은 이를 근거로 사우스 포스트 안에 아파트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미군측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주장은 “당장 기지 이전을 시작한다 해도 수년이 걸릴 텐데 그동안 살 곳이 필요하다”는 논리. 그러나 한 관계자는 “어차피 기지 이전은 주한미군뿐 아니라 미국 본토의 군사계획에 따라 진행될 것 아니냐”며 “앞으로 북핵 사태의 추이에 따라 주한미군 인원 문제 등이 전면 재검토될 수도 있는데 성급하게 기지를 이전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배경에서든 ‘기지 이전’이 논의되고 있는 한편에서 ‘용산기지는 공사중’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기지 풍경과 달리 용산기지 8번 게이트에서 불과 5분 거리인 이태원 상가에서는 기지 이전이 이미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과 녹사평역 일대 약 1.4km의 도로 양쪽에 2100여개의 상점이 밀집해 있는 이태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가 거리로 내국인 대 외국인 비율이 3대 7에 이를 정도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

    용산 美軍기지는 ‘공사중’

    용산기지 이전을 앞둔 이태원 거리 풍경(왼쪽). 상인들은 ‘미군이 떠나면 이태원 상권도 죽을 것’이라며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이곳 상인들에게 미군기지 이전은 악재 중의 악재다. 최근 여행 경기가 악화된 데다 기지 이전까지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이곳 상인들은 ‘장사가 안 된다’며 울상을 지었다.

    이태원에서 한국 기념품 상점을 하고 있는 김영은씨는 “여중생 장갑차 사망 사건 이후 미군기지 이전 시위가 많아지면서 미군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요즘은 평일에 가격을 묻는 이가 하루 종일 2, 3명에 그칠 정도로 장사가 안 된다”며 “그래도 좀 매상을 올리는 게 주말인데 미군이 아예 떠나고 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한 상인은 “자꾸 미군을 시골로 옮기라고 하는데 도심 가까이에 있어야 우리 경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인들은 “미군기지 이전이 기정사실화됐다면 그 후에도 이태원이 살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태원 관광특구 연합회 박한근 사무국장은 “이태원은 ‘한국은 몰라도 이태원은 안다’는 외국인이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쇼핑의 명소”라며 “미군이 떠난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 지역을 국제교류지역으로 지정하거나 관세 혜택 등을 주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 대책 없이 미군기지 이전을 추진할 경우 상인들이 앞장서 ‘기지 이전 반대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상인들도 있지만, ‘이태원 살리기 대책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요구할 사항은 ‘미군기지 이전 지연’ ‘그동안 대책 마련’이다.

    한국 속의 아메리카인 용산기지 이전에 대한 대비는 오히려 기지 밖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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