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4

2003.03.06

사시 23회 급부상 눈에 띄네

300명 시대 다양성·경쟁력 갖춘 1세대 … 강금실 양인석 황덕남 임영철 변호사 특히 주목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02-27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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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시 23회 급부상 눈에 띄네
    최근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는 사시 23회(사법연수원 13기)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이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두 집단 출신이 노무현 정권의 인재풀로 급부상했기 때문. 일각에서는 “사시 23회 출신 민변 소속 변호사가 노무현 정권 ‘진골’이 됐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 또 문재인 민정수석이 민변 출신인 점을 들어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민변’수석실이 됐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민변이 노무현 정권의 인재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본인이 민변 창립 멤버인 데다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법조계 인사들이 대부분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었기 때문. 현재 민변 회장을 맡고 있는 최병모 변호사는 대선 당시 ‘노무현을 지지하는 변호사 모임’(노변모) 회장을 맡기도 했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외에 박주현 국민참여수석, 이석태 공직기강비서관, 최은순 국민제안비서관 등이 민변 출신이다.

    그러나 사법연수원 13기의 부상은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통령의 법률 자문을 맡은 황덕남 법무비서관, 권력 주변 비리 차단을 총괄하게 될 양인석 사정비서관 등이 13기 동기이고, 2월24일 현재 법무부장관 후보 1순위로 거론되고 있는 강금실 변호사도 13기다. 또 이들과 동기인 임영철 변호사는 공정거래위원장 후보 물망에 오른 상태다.

    ‘매머드 기수’ 임용 당시부터 화제

    이들이 부상할 수 있었던 데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사추천위원으로 활약한 김종훈 변호사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관측. 실제로 양인석 변호사와 강금실 변호사는 김변호사와 절친한 사이다.



    김종훈 변호사가 인사추천위원이 된 것은 노무현 정권이 그의 개혁성을 높이 산 때문으로 보인다. 김변호사는 1988년 서울지법 판사 시절 동료 법관 300명과 함께 ‘법원의 독립과 사법부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전개하는 등 사법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

    강금실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75학번으로 김변호사의 대학 1년 선배. 두 사람은 판사 시절 시국사범에 대한 소신 있는 판결과 사법개혁 요구로 유명했고, 법복을 벗은 후에는 민변 운동에 투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인연으로 요즘도 김변호사가 강변호사의 빚보증을 서줄 정도로 남다른 교분을 나누고 있다.

    김종훈 변호사와 양인석 변호사의 인연도 남다르다. 각각 법원과 검찰에서 활동하다 비슷한 시기에 개업한 두 변호사는 서로가 막역한 친구로 첫손에 꼽는 사이. 양변호사가 1999년 옷로비 특검보를 맡은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김종훈 변호사의 친구 양인석”이라고 소개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두 변호사는 아가동산 사건으로 구속된 교주 김기순씨를 함께 변호하기도 했다.

    김변호사는 또 양변호사의 사정비서관 내정 사실이 알려진 후 민변 등이 양변호사가 타이거풀스 송재빈 사장 등 권력형 비리 사건 연루자의 변론을 맡은 데다 독선적 성격의 사람이라는 점 등을 들며 임명을 반대하자 ‘온몸을 던져’ 이를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양변호사가 사정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그 뜻을 이루게 된 셈.

    사시 23회 급부상 눈에 띄네
    법무비서관 황덕남 변호사와 강금실 변호사의 인연도 남다르다. 강변호사의 경기여고, 서울대 법대 1년 후배인 황변호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강선배는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연수원에서 함께 공부하게 됐을 때 가슴이설레ㅆ다”고 말할 정도.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세월은 25년이 넘는다.

    여성 연수생이 3명에 불과했던 13기 여성 트로이카의 다른 한 축은 김덕현 변호사. 김변호사는 강변호사나 황변호사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여성변호사협회 회장,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 등을 맡으며 역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 법조인의 대표주자. 13기의 유일한 동기 커플로, 서울지법 부장판사인 황한식 판사와 연수원 입소 후 바로 결혼해 화제를 모았다.

    이들 3명의 여성 법조인은 연수원 시절 항상 뭉쳐 다녔지만 서로 다른 캐릭터였다고 전해진다. 한 동기 변호사는 “굳이 구별하자면 강변호사는 사회의식이 강한 보스 스타일이었고, 황변호사는 야심이 많았으며, 김변호사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평했다.

    실력 있고 독특한 인물 많아

    강변호사는 판사 시절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즉심에 넘어온 대학생들을 잇따라 석방해 5공 정권의 미움을 샀을 정도로 소신이 뚜렷하고 개혁적인 인물이다. 민변 등이 그를 법무부장관 후보에 강력 추천했던 것도 그의 이런 ‘강단’과 ‘능력’이 사법부에 미칠 파급효과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각영 검찰총장이 사시 12회인 상황에서 23회인 강변호사가 유력한 법무부장관 후보로 거론됐다는 것 자체가 파격인 만큼 강변호사는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이와 비교할 때 황변호사는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등 ‘개혁성’ 측면에서는 강변호사와 성격을 달리한다. 하지만 기혼여성들의 종중 땅 상속 소송을 맡는 등 여성문제에 적극적이고 언론 관련 소송 등 사회적으로 관심을 모으는 사건을 많이 맡았다. 황변호사는 민변 색깔이 짙은 민정수석실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된다.

    사시 23회는 ‘매머드 기수’로 임용 당시부터 줄곧 화제가 됐던 기수. 우리나라 사법시험 사상 처음으로 합격 인원이 판·검사 임용 정원을 초과한 기수다. 12기까지 100여명대에 불과했던 사법시험 합격자가 이때(1981년)부터 300명으로 급증하면서 이들은 연수원 시절부터 임용을 위한 ‘무한경쟁’에 내몰렸다. 때문에 이 안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어디에서나 실력 있다는 평을 들었다.

    특히 검찰의 13기는 ‘특수통’이 많은 기수로 검찰 내에서 ‘고시 8회 이후 최고의 기수’로 꼽힌다. 2001년 6월 서울지검 특수1부장에 부임한 후 언론사 세무조사 사건, 안기부 예산 총선자금 불법지원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도맡아 처리한 박영관 서울지검 특수 1부장, ‘윤태식 게이트’와 ‘최규선 게이트’, 김홍걸씨 비리 사건 등을 맡은 차동민 서울지검 특수2부장 등이 13기. 특히 차부장은 재학시절 사시에 합격한 ‘수재형 머리’뿐 아니라 준수한 외모로도 13기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80년대 초 진주에서 시보 생활을 할 때는 ‘잘생긴 시보 한번 보자’며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있었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는 후문. 이들 외에도 정선태 마약수사부장과 황교안 공안2부장 등이 검찰 내 13기의 선두 그룹이다. 100명 가까운 인원이 한꺼번에 임용돼 지금도 검찰에 57명이나 남아 있다.

    법원의 13기도 법조 문화에 한 획을 그은 기수로 평가된다. 93년 사법부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잡지에 실었다가 법관 재임용 탈락 1호가 된 신평 변호사가 바로 13기. 신변호사는 연수원 시절에도 평범을 강요하는 연수원 문화에 반발하며 “정장 대신 자유복을 입게 해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을 만큼 괴짜였다. 그는 법관 임용에서 탈락한 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회복을 신청하는 등 복직을 추진했다가 실패하고 현재는 대구가톨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역시 13기인 서울 행정법원 한기택 부장판사가 법관 인사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글을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려 화제를 모았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법원의 불문율을 깨고 내부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이들에게는 ‘소신파’라는 찬사와 ‘돈키호테’라는 비난이 함께 따라다닌다.

    ‘300명 시대’를 연 첫 세대답게 13기에는 독특한 인물들도 많았다. 한 13기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시절 교수들이 ‘너희는 윗 기수와 달리 생기발랄하고 개성이 강하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며 “인원이 많아서였는지는 몰라도 무색무취한 법률가의 이미지와는 다른 동기생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한국의 ‘존 그리샴’으로 불리는 김&장 법률사무소의 이민희 변호사도 13기의 괴짜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이변호사는 1999년 변호사로 재직하며 법정 추리소설 ‘무한변론’을 펴낸 소설가. 그는 고교시절 화동 문학상을 두 차례나 받았을 만큼 문학적 자질을 인정받았고, 연수원 시절에는 화통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인간관계가 폭넓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민변 대표 등으로 활동하며 임수경양 방북사건 당시 문규현 신부를 변호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 뛰어든 김형태 변호사도 13기다.

    역시 13기인 임영철 변호사는 1996년 서울고등법원 판사(1급 대우) 자리를 박차고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법무심의관(3급)으로 자리를 옮겨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당시 탁월한 인화 능력으로 ‘Mr.공정위’로 뽑힌 것이 계기가 돼 임변호사는 새 정부의 공정위원장 물망에 오르고 있다.

    이처럼 13기가 사회 각지에서 부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시기적으로 찾아온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들을 사법연수원 13기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으려는 시도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13기는 법조인의 ‘다양성’을 보여준 첫 세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들은 동기생 상당수가 판·검사 경력 없이 바로 변호사를 시작한 첫 기수였고, 100명에 불과하던 선발인원이 300명으로 급증하면서 사시 합격생 특유의 ‘특권 엘리트’ 의식이 ‘직업의식’으로 변화하는 계기를 만든 세대였다. 그래서 법조계의 권위의식에 반발하며 사법개혁의 목소리를 높였고, 연공서열보다는 실력으로 평가받았다.

    70년대 중반 대학생활을 거쳐 80년대 초반 민주화 운동이 거세던 당시 법조에 뛰어든 시대적 상황과 임용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던 연수원 시절의 경험이 이들을 단련시킨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연수원 13기 돌풍에 대해 ‘시대적 요구’라는 평을 내린다. ‘개혁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테크노크라트의 출현이 요구되는 시기에 이들의 전문성이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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