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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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는 北-美, 힘 못 쓰는 햇볕

부시 ‘惡의 축’ 이어 연이은 강경 발언 … “아쉬우면 굽혀라” 對北 무시정책 여전

  • < 이흥환/ 미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4-11-12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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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29일 연두 국정연설에서 이란·이라크를 포함해 북한을 ‘악’의 한 축으로 규정하자, 한국 정부는 ‘부시 대통령의 강경 발언은 우려할 필요 없다’는 쪽으로 해석하고 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2월2일 뉴욕에서 열린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과의 외무회담에서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는 대화’라는 점을 확인했고, 부시 대통령도 하루 전 백악관에서 압둘라 요르단 왕을 만난 자리에서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걱정할 필요 없다는 태도다. 게다가 2월20일 서울에 올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 지지를 재확인하리라는 기대까지 섞여 있다.

    한국 정부의 정세 판단대로라면 부시 대통령의 강경 발언은 그저 해본 소리고, 항상 했던 소리를 되뇐 것뿐이다. 부시의 발언이 나온 뒤 여기저기서 비판하는 소리가 한국 정부에는 반갑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근거나 상황을 적용했다면 모를까, 부시 대통령의 강경 발언을 염려할 필요 없다는 해석의 근거로 들이댄 ‘미국 대북정책의 기조 불변’이라는 정세 판단은 그 근거를 찾기가 힘들다.

    현 공화당 정권의 대북정책은 민주당 정권인 클린턴 행정부 때의 대북정책과는 기본 발상에서부터 접근방식이나 정책 결정자들의 면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지금까지 북한을 파트너로 상대한다는 조짐이 전혀 없다. 부시 행정부 출범 직후 김대중 대통령도 직접 워싱턴까지 가 공화당의 이런 대북정책을 확인했다. 미국, 아니 공화당의 대북관은 이미 바뀐 지 오래고, 전례 없이 대화의 문을 닫지 않는 등 북한의 대미 자세도 변했는데 오로지 한국 정부만 미국의 정권이 바뀌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강경 발언을 평가절하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악의 축’ 발언이 나온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대테러 전쟁의 분위기가 누그러진 시점에 이루어졌다. 한 여론조사기관이 국정연설 1주일 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은 테러보다 미국 내 경제침체를 더 우려한다는 결과가 집계되었다. 거의 두 배 차이였다. 특히 의료보험 수가 문제가 최대 이슈였다.

    그러나 부시는 국내 최대 현안인 의료보험 수가 문제를 건강문제에 포함해 그저 한 문단 정도로 축소했다. 국정연설을 하는 날 아침 보도된 ‘워싱턴포스트’의 여론조사도 유권자들이 테러 위협보다는 국내 문제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 정계와 경제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엔론사 파산 문제도 부시는 비켜갔다. ‘엔론이라는 이름이 들어갈 자리에 북한과 이란이 거명되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또 9·11 테러사태 이후 대테러 전쟁이라는 모자를 공화당과 같이 쓰고 있던 민주당이 다시 공화당을 상대로 정치판을 가열시키고 있다.

    부시는 이런 분위기를 대테러 전쟁의 최전선으로 다시 몰아넣는 데 국정연설을 활용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시 대통령은 업무수행 능력에서 역대 어느 대통령도 얻지 못한 80% 이상의 지지도를 확보하고 있다.

    둘째는 ‘악의 축’이라는 어휘 선택의 문제다. 부시의 어휘 사용이 지나쳤다는 지적이다. 악마의 나라로 거명된 이라크, 이란, 북한 가운데 적어도 이란과 북한은 미국이 아직도 군사력이 아닌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나라다. 한국 정부가 부시의 발언을 ‘우려할 필요 없다’고 한 것은 미국의 이 같은 외교 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레이건 대통령도 20년 전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몰아세운 적이 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악의 제국’과 협상을 재개했다. 외교가 군사보다 앞선 경우다.

    ‘축’(axis)이라는 용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으로 불린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연상시켰다. 이 가운데 독일은 현재 이란과 유대관계를 모색하고 있고,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은 북한과 화해를 추진하고 있다. 또 미국이 치르는 대테러 전쟁의 선전국 구실을 하는 영국은 지난해 7월 평양에 대사관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잭 스트로 외무장관은 지난해 9월 관계 증진을 위해 이란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부시가 사용한 ‘악의 축’이라는 용어는 모난 구석이 많았다. ‘나쁜 놈들’이라 불린 당사자 3국은 물론, 러시아 등 여러 나라가 나서서 미국에 몰매를 안기고 있다.

    국정연설 발언이 역풍을 만나자 백악관은 다음날인 1월30일 하루종일 이를 진화하느라 애썼다. ‘뉴욕 타임스’ 등 일부 언론도 ‘아프가니스탄의 승리로 오만해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백악관도 겉으로는 “대화하겠다는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위험을 돌리기 위한 행동의 필요성을 지적한 것”이라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말은 사뭇 다르게 들린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 보수 외교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이 1월31일 미국보수연맹 모임에서 한 발언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세계 제일의 탄도미사일 장사꾼이다. 미사일을 사는 사람들이 어떤 못된 짓을 하려는지에 상관없이 누구한테나 미사일을 판다. 미국은 북한이 이런 태도를 바꾸면 대화하겠다는 계획과 구상을 제안했는데도 평양으로부터 아무런 대꾸도 들은 바가 없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태도에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은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이 있기 직전에도 두 차례 확인되었다. 하나는 국무부 존 볼튼 군축 담당 부차관의 제네바 발언이고, 또 하나는 북미간 미군 유해 협상 결렬이다.

    존 볼튼 부차관은 지난 1월25일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군축회의에서 북한과 이라크를 지목, 핵확산방지조약(NPT) 위반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관(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는 종전 입장을 강경한 어조로 재확인했다. 볼튼은 ABM조약 등 중요 국제조약에서 미국이 탈퇴하거나 비준을 거부하는 등 부시 행정부의 대외조약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이며, 그의 대북 강경 발언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워싱턴은 화학무기 국제회의(CWC)를 통해 협약 위반국들에 대한 사찰을 밀어붙일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태국 방콕에서 1월23일부터 열린 북미간 미군 유해 협상이 협상 재개에 대한 아무 결론 없이 26일 결렬된 것도 북미간에 열려 있던 중요한 대화통로 하나가 막힌 것이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총 27건의 합동 발굴작업을 통해 150기의 유해를 발굴한 이 유해 협상은 북미간 대화 진척과 경색의 시금석 같은 구실을 해왔다.

    부시 행정부는 ‘아쉬운 쪽이 먼저 굽혀라’ ‘볼은 너희 쪽에 넘어가 있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른바 ‘느긋한 무시’(benign neglect)로 불리는 외면정책이며 이 정책은 부시 정권 출범 이후 요지부동이다. 이런 판인데도 한국 정부는 공화당 정권을 상대로 설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으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에 변함이 없으며 우리를 지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미국의 대북 ‘무시정책’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백악관의 한 참모는 ‘부시 대통령의 언급은 신중하게 준비된 것’이라고 했다. 미 대통령의 한마디가 모든 것을 좌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시할 필요는 없되 새겨들을 필요는 있다. 김대중-부시의 첫 정상회담 때 이미 비싼 값을 치르고 배운 교훈인데도 벌써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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