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8

2002.01.17

‘문화상품’ 달러 박스로 떴다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입력2004-11-05 15: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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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상품’ 달러 박스로 떴다
    1999년 한국의 공연물 ‘난타’가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공연할 때만 해도 이 작품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일반인은 물론 공연 관계자들조차 ‘돈 짊어지고 나가 다 쓰고 돌아오는 공연’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의외로 호평받은 ‘난타’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발판 삼아 해외 무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은 축제인 동시에 전 세계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모여 될 만한 작품을 ‘눈도장 찍는’ 아트 마켓 역할도 한다. ‘난타’는 이곳에서 ‘눈도장을 찍히는’ 데 성공했고 이후 15개국 70여개 도시로 진출했다. 개런티 외에 항공료와 체재비 등 경비를 제공받는 공연이었다.

    지난해 가을 마침내 ‘난타’는 400만 달러(약 52억원)의 파격적인 개런티를 받고 전미 순회공연에 나섰다. 비록 미국 9·11 테러사태 여파로 중단되었지만 이 공연은 올 가을에 다시 이어질 예정이다. 미국 외에 올해만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 8개국 공연이 확정된 상태다. 이제 ‘난타’ 제작진이 “궁극적 목표는 뉴욕 브로드웨이 입성이다”고 말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난타’의 성공은 공연 관계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특히 언어보다 노래와 춤으로 승부하는 뮤지컬의 해외 진출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원작이 탄생한 나라인 독일에 이어 일본 3개 도시에 진출했으며, 역시 독일 뮤지컬인 ‘갬블러’도 6억원의 개런티를 받고 올해 5월 일본 13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갖는다. 또 ‘도깨비스톰’ ‘두드락’ 등의 해외 진출이 가시화되고 있으며 국악 그룹인 ‘공명’ 역시 호주 시드니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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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물긴 하지만 음악과 무용, 연극 쪽에서도 해외 진출 소식이 들려온다. 국립무용단은 지난해 한 회당 1만 달러(약 1300만원)씩의 개런티를 받고 베를린 부퍼탈 등 독일 4개 도시에서 공연을 가졌다. 또 실내악단인 바로크 합주단이 베를린에서, 극단 목화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독일 브레멘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공연했다. 극단 쎄실의 ‘산씻김’도 올해 열리는 독일 에센연극제 무대에 선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의 공연물들이 해외 무대에 선 횟수는 수없이 많다. 카네기홀 등 유수의 공연장을 통째로 빌려 공연한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이 공연들은 거의 현지인보다는 교민을 겨냥한 공연이었다. 왕복 항공료나 체재비 등의 경비는 물론, 극장 대관료까지 모두 한국측에서 지불했다. 당연히 한번 해외공연을 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은 막대했으며 정부의 지원 없이는 해외공연 자체가 불가능했다. 반면 현지의 홍보 등은 미흡해 객석은 대부분 알음알음으로 온 교민들로 채워지곤 했다.



    ‘문화상품’ 달러 박스로 떴다
    ‘난타’ ‘지하철 1호선’ ‘갬블러’ 등의 해외공연은 이들과 달리 적은 돈이라도 정당한 개런티를 받고 해외로 진출했다는 데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자동차나 반도체를 수출하듯 공연을 수출한 셈이다.

    일본과 6억원이라는 적지 않은 개런티에 공연계약을 체결한 ‘갬블러’는 원래 1996년 독일에서 초연된 뮤지컬이다. 이 작품을 신시뮤지컬 컴퍼니가 라이선스를 주고 사들여와 다시 일본에 수출하게 된 것이다. 이 공연을 기획한 신사뮤지컬 컴퍼니측은 “독일팀의 공연보다는 같은 동양권인 한국에서 만든 ‘갬블러’가 일본인들의 감성에 더 맞다고 판단한 것 같다. 또 월드컵 경기 등의 특수 여건도 호재로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지난해 9월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공연한 바로크 합주단은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에 진출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성과로 꼽힌다. 이때 바로크 합주단이 받은 개런티는 300만원 정도. 바로크 합주단은 2000년에 UN 본부의 초청을 받아 개런티를 받고 공연한 전례가 있다.

    특정 예술가와의 친분이 현지 진출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지난해 독일 4개 도시에서 공연한 국립무용단이 그 사례다. 지난 99년 한국에 왔던 독일 무용가 피나 바우쉬가 국립무용단의 공연을 보고 초청의사를 밝힌 것. 이후 바우쉬의 주선으로 베를린 등 독일 4개 도시에서의 공연이 성사되었다. 이 사례는 예술가, 기획자들 사이의 네트워크 형성이 국제 교류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립무용단의 독일 진출로 자신감을 얻은 국립극장은 현재 국립창극단, 국립국악관현악단 등의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공연물의 해외공연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공연시장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아예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목표로 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짜기도 한다. ‘난타’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갈 때까지 10억원을 투자했다. 시드니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타악그룹 ‘공명’ 역시 싱가포르 아트 마켓에서 자신들의 공연을 선보였다. 이때 아시아권 공연 관계자, 프로모터들이 공명의 공연을 보고 접촉을 시작했다. 올해 공명은 호주 외에 일본,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초청을 받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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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가시적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한국 공연물의 해외 ‘수출’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이제 시작 단계일 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의 결과로 많은 이익을 남긴 단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연예술은 얼마든지 복사물을 만들어 상영할 수 있는 영화와는 다르다. “아직은 상거래가 아니라 문화교류의 상황”이라는 것이 ‘지하철 1호선’을 제작한 극단 학전 김민기 대표의 말이다. 그는 “지하철 1호선이 일본에서 9회 공연하는 동안 들어간 경비가 10억원 선이다. 그 경비를 지불한 일본측에서 그에 상응하는 매표 수입을 얻었겠느냐”고 반문했다.

    하나의 연예술이 문화상품으로 탄생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은 또 있다. 한 작품을 해외로 진출시키려면 작품의 수준 못지않게 해외 매니지먼트사와 교섭하고 현지에서 작품을 홍보하며 좋은 극장을 잡는 등 기획과 마케팅 인력이 그에 상응하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 부분에서 한국의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해외에 진출하는 뮤지컬이라고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프라가 너무 취약해 비감에 빠질 지경”이라는 것이 강창일 한국공연매니지먼트협회 부회장의 표현이다. 공연계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일수록 근래 떠들썩한 한국 공연의 해외수출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공연물이 해외의 문을 자꾸 두드려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해외에서 한국의 인지도는 겨우 ‘올림픽’이나 심지어 ‘보신탕’ 정도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많은 경비와 노력을 들여 월드컵을 왜 하느냐는 질문에 정몽준 월드컵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은 ‘나중에 기업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한국의 공연물들이 해외에 나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 역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 공연 매니저의 말이 모든 대답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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