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5

2000.08.03

90년대 문화현장의 생생한 기록

  • 입력2005-08-08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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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문화현장의 생생한 기록
    90년대 초반 시작된 신세대 논쟁은 N세대로 대체됐고, ‘빨간 마후라’의 충격은 ‘O양 비디오’ 사건으로 잊혔다. ‘국제’라는 간판을 단 온갖 문화행사판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인디문화의 등장, 동성애 집단의 커밍아웃, 스타크래프트와 채팅 열풍 등 일련의 문화현상이 90년대를 요란스럽게 관통했다.

    지식인들은 문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했고, 이전의 사회분석 틀이나 문화개념이 별 소용이 없음을 인정했다. 80년대와 너무 달라진 문화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개입할 것인지 고민하고 새롭게 등장한 ‘문화비평가’ 그룹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삐라에서 사이버 문화까지’(현실문화연구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들의 고민을 한데 모은 90년대 문화현장 기록이다. 90년대 후반 각종 저널이나 전시회 도록 등에 발표된 글을 주제별로 묶어 정리했기 때문에 필자마다 글의 색깔이나 방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다름 속에도 일관성은 있다.

    게재된 24편의 글은 90년대 문화에 대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평가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 작업의 1차 목적은 90년대 문화 지형을 살펴보고 그동안 문화로도 취급되지 못했던 주변문화 혹은 하위문화까지 포함해 문화가 사회적 조건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 UC얼바인대학의 최정무 교수(동아시아 어문학), 호주 라트로브대학의 크리스 베리와 프랜 마틴 교수(영화이론) 등 해외 필진의 참가로 국내에서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문화현상을 파악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여덟 가지 주제별로 분류된 글을 조금씩 맛보기로 하자.

    ‘제국주의, 식민주의, 포스트식민주의’ 편에는 김종엽 이성욱 최정무의 글이 실려 있다. 김종엽 교수(한신대 사회학)가 주목한 것은 어린이의 세계를 지배하는 ‘디즈니 왕국’의 음모다. “해로운 것은 단지 폭력이나 섹스만이 아니며, 흥건한 피의 선홍색이 아니라 고운 보라색 혹은 환한 병아리색이라도 그것을 벗겨내면 오히려 계급적 인종적 성적 편견이 흐르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최정무 교수는 ‘경이로운 식민주의와 매혹된 관계들’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식민후기적 삶에 대해 기술했다. 역사적으로 식민체험을 했던 민족들은 과거와 현재의 식민지배자들을 끊임없이 의식 밖으로 밀어내려 하지만, 이미 구 식민 종주국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상태에서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 시각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옛것은 죽어가고 새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남과 북, 역사의 재해독’ 편에는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분석한 김정란씨의 글과, 사진작가 박찬경씨의 ‘블랙박스’, 지난해 ‘6·25삐라전’ 도록에 실렸던 김진송씨의 ‘전쟁 삐라와 슬로건 사회’가 실려 있다. 특히 김씨는 ‘삐라’를 통해 지배자의 담론이 어떻게 전사회에 유포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삐라의 선전 선동적 기능과 일방적인 이념 전달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땅에 슬로건 문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또 ‘청년 하위문화와 저항의 언어’ 편에서는 영턱스클럽을 분석한 서동진씨의 ‘개날라리들의 정다운 합창’과 서태지 스타일에 주목한 이동연씨의 ‘헤드뱅잉에서 스노우 보드까지’가 흥미롭다. 이들은 그동안 평론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하위문화를 분석함으로써 90년대에 가장 두드러진 청소년문화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고자 했다. ‘사이버 공간의 새로운 문화’ 편에서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채팅과 웹진을 분석함으로써 사이버 문화가 가져온 새로운 문화 양태를 보여주고자 했다.

    나머지 ‘일상-공간의 문화정치’ 편이나 ‘대중문화와 청중’ ‘사이버 공간의 새로운 문화들’ ‘젠더와 섹슈얼리티’ ‘포르노그라피, 욕망, 그리고 검열’ 편도 꼭 읽어두기 바란다. 어차피 이 책은 기록과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90년대를 공백으로 남기지 않아야 문화의 세기 21세기도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삐라에서 사이버 문화까지/ 현실문화연구편/ 520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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