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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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고 부수고 막가는 ‘주먹 사회’

신고식-생일빵-게임 등 폭력 얼룩…모방범죄도 급증 “도덕 공백현상 심각”

  • 입력2006-05-04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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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리고 부수고 막가는 ‘주먹 사회’
    새벽 1시경, 을지로2가의 포장마차 한 곳에서 20~40대 남녀 대여섯명이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행은 별로 취한 기색이 없었고,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말소리는 이들이 사장 이하 직장동료임을 짐작케 했다. 잠시 후 갑작스런 고함과 함께 20대 중반 남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사장님’이라 불리던 40대 초반 남자는 욕설과 함께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바닥의 직원을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네 번째 구타가 이어지자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멀뚱히 상황을 지켜보던 일행 가운데 두 명이 마지 못한 얼굴로 사장을 제지하고 나섰다. 동료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일어난 20대 남자의 얼굴은 온통 코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동료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포장마차 밖으로 나가자 술자리는 금새 평온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계속해서 술잔이 오가는 동안 일행 중 어느 누구도 사장의 폭력 행사에 대해 비난하거나 항의하지 않았고, 살벌했던 폭력 장면은 ‘없던 일’처럼 사라졌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상계동 아파트 단지에 살던 주부 김명희씨(38)는 한 달 전 예정에도 없던 이사를 해야 했다. “옆집에서 밤마다 부부싸움을 하는 통에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다. 물건 깨지는 소리, 비명 소리 때문에 우리 아이들도 덩달아 잠을 못자고 벌벌 떨었다. 그대로 계속 살다간 가족 모두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는 김씨. 그녀에 따르면 옆집 주부와 아이는 걸핏하면 피멍든 얼굴이었다고 한다.

    두 사례와 유사한 폭력 상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광경이다. 그만큼 우리사회 깊숙이 크고 작은 폭력문화가 고질병처럼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정신과 김광일교수는 “병원 응급실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 주변 사람들에 의해 폭행당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폭력은 어떤 이유로든 용납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폭력이 마치 문제 해결의 훌륭한 수단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폭력이 출세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며 눈살을 찌푸린다.



    김교수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방송을 통해 국회의원들이 멱살잡이에 주먹까지 휘두르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아 왔다. 이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저럴 수가…’라는 생각보다 ‘또 시작이구나. 지겹다’는 반응을 먼저 보인다. 어떤 이유로든 ‘폭력은 심각한 범죄행위’라는 인식이 엷은 까닭이다.

    사회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은 한결같이 “폭력이 또다른 폭력을 낳는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너무나 많은 폭력과 마주치고 또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 사회는 일면 폭력을 조장하는 측면이 없을까.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무감각하게 길들여진 건 아닐까. 한국사회병리연구소 소장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백상창박사는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21세기가 시작된 지금까지도 폭력이 난무하는 후진사회의 원시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충격적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폭력불감증’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다시금 일깨운다. 대표적 예가 지난 3월 발생한 여중생 살인사건이다. 하교길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살해된 송모양(12)을 흉기로 찌른 범인은 다름아닌 중학 3년생 최모군(15). 경찰에 붙잡힌 최군은 “아버지가 매일 술에 취해 엄마를 때리는 게 화가 났다. 아무나 찔러 죽이고 싶었다”고 진술해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불과 15세에 불과한 최군이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된 배경에는 ‘가정폭력’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자리잡고 있었다.

    가정폭력을 비롯한 직접적 폭력행사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는 말 중에 폭력을 은연 중 조장하는 것들이 있다. “치고 받고 싸우면서 정든다” “맞고 그만둘래, 그냥 그만둘래?” “매를 번다” “말로 안되면 패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야 한다” 등이 그것. 뿐만 아니라 자녀를 상대로 부모가 무의식 중에 폭력을 촉구하는 경우도 있다. “병신같이 왜 맞고 다니느냐. 너도 같이 때려라”는 부모 말에 아이는 폭력이 범죄임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10대가 되면서 놀이를 빙자한 폭력을 즐긴다. 요즘 10대들 사이에 한창 유행하는 놀이가 폭력을 동반한 ‘인디언밥’ ‘007빵’이다. 이는 여럿이 둘러앉아 게임을 하다가 한 아이가 자신의 순서를 놓치게 되면 벌로 주먹세례를 퍼붓는 놀이다. “너무 맞아서 등이 시퍼렇게 멍들었던 적도 있다”는 중학 3년생 이형준군(15). 이군은 “맞을 땐 아프지만 때릴 땐 짜릿하고 재미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많이 맞을수록 오래 산다’는 터무니없는 속설을 빙자해 청소년과 대학생 사이에 유행하는 또다른 폭력적 문화가 바로 ‘생일빵’이다. 생일을 맞은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뭇매를 퍼붓는 생일빵이 마침내 살인을 부른 경우도 있다. 지난 2월 생일을 맞은 대학 2년생 김모군(19)이 친구들에 둘러싸여 집단 구타를 당한 뒤 심장출혈로 사망한 것. 뿐만 아니라 캠퍼스를 둘러싼 ‘군기잡기’나 ‘신입생 신고식’ 역시 심각한 폭력을 동반하는 고질적 대학문화가 된 지 오래다.

    10대들의 학교폭력은 교사들조차 “살벌하다”고 할 정도로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최근의 학교폭력 실태를 묻는 질문에 교육부 관계자는 “요즘 한창 예민한 사안이라 전화로 말하기 곤란하다”며 대답을 피했다.

    청소년들을 폭력불감증에 물들게 하는 주요인으로 영상매체와 컴퓨터게임의 부정적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아이들이 중독되다시피 몰두하는 컴퓨터게임은 싸움이나 전쟁을 매개로 한 폭력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게임 도중 폭력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달 전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두 명의 남학생에게 폭행당했다는 고교 1년생 임성환군(가명·16)은 그 뒤로 PC방 출입을 삼가고 있다고 한다. “일곱 명이 함께 스타크게임을 했는데 나 때문에 무기를 잃고 게임을 망쳤다며 시비를 걸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도 주먹으로 때렸다.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고 해서 무서워서 못간다.”

    지난해 말에는 10대들의 주유소 습격 사건이 잇달아 발생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바로 영화 ‘주유소습격사건’을 본뜬 모방범죄가 서울을 비롯한 경기, 전북 등을 휩쓸었던 것.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안수경간사는 “최근 드라마에서 조직폭력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예가 두드러지고 있다. 더구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강해 매우 염려된다. 영화 역시 10대들 사이에서 폭력이 빠지면 재미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폭력에 노출되면 될수록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지기 때문에 문제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 “특히 게임에 빠진 청소년들을 만나면 상대를 죽이면서 갖는 쾌감이 엄청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게임은 여타의 영상매체에 비해 심의가 느슨하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다”고 덧붙인다.

    요즘 중-고등학교 주변 전자오락실에서는 학생이 교사를 집단 구타하는 ‘캠퍼스블루스’라는 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2인1조로 패싸움을 벌이는 내용도 있다. 매일 방과후 오락실에 들른다는 고교 1년생 강성우군(16)은 “게임이지만 교사를 실컷 두들겨 패주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이야기한다. 공교롭게도 지난 3월 중순 지방의 한 대학1년생이 중3 때 자신을 체벌한 교사를 부모와 함께 학교로 찾아가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진술에서 홍모군(19)은 “선생님이 전혀 때린 기억이 없다고 말해 홧김에 발로 찼을 뿐이다”고 털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홍군에게 폭행당한 교사는 전치 2주의 상처를 입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백승한상담팀장에 따르면 “집단따돌림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이 거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한다. “가해자는 한결같이 상대가 맞을 만한 행동을 하니까 때린다는 식이다. 반면 피해자는 힘이 세거나 강한 아이들한테 돈을 빼앗기거나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에 대한 아이들의 불감증은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김광일교수는 “가정폭력이 사회폭력을 낳고 사회폭력은 또 가정폭력을 낳는 악순환이 우리 사회에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가정폭력에 길들여지면 자연스레 폭력을 구사하거나 반대로 폭력에 짓눌려 자신감이 결여되는 등 폭력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폭력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어릴 때부터 폭력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회에 나와서도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폭력을 절제하면 손해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폭력적 사회 분위기를 띠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폭력에 대한 응징이나 인식 또한 느슨한 편이다.”

    지난 98년 5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측이 실시한 ‘가정폭력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의 약 113만 가구에서 가정폭력이 자행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폭력으로 가벼운 상처나 타박상은 물론이고 골절상이나 실명, 고막 이상 등 심각한 신체적 피해를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고서를 낸 사회학 박사 김승권팀장은 “가정폭력을 막으려면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문화 규범부터 개선해야 한다.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적 환경과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 불식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더불어 인간을 존중하는 가치체계가 확립될 때 비로소 가정폭력이 줄어들 것이다”고 강조한다. 김박사는 “술 주는데 안먹는다고 싸우는 나라는 아마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는 말로 비뚤어진 기성세대의 폭력문화를 꼬집는다.

    재미로 일삼는 폭력과 살인을 부르는 폭력을 비롯해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우리 사회 폭력 실상에 대해 백상창박사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이 높을수록 상대 의사나 질서를 존중하는 문화가 발전되어 있다. 이런 사회는 당연히 폭력과 거리가 멀다. 반면 퇴행적 또는 후진적 사회일수록 폭력 등의 원시적 행태가 난무한다. 우리 사회는 지난 세기 동안 대학생과 지식인이 꾸준히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폭력과 관련한 행태는 아직 원시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근대화-서구화 과정에서 전통적 윤리관이나 도덕심은 후퇴한 반면 성숙한 선진 윤리는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도덕 공백현상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폭력은 폭력에서 그치지 않고 불신과 또다른 사회 불안감을 조성한다. 뿐만 아니라 살인으로 이어지는 폭력은 사회 근간을 뒤흔들 만큼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너나 할 것 없이 폭력불감증을 앓고 있다. 棟

    이혼상담 27%가 “폭력 때문에…”

    집단 따돌림-교권 침해도 급증… “폭력 갈수록 저연령층화”


    ‘폭력학습의 장’이 되고 있는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몇몇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서울 본소에서 99년 한해 동안 이혼과 관련해 상담한 건수는 총 5190건에 달했다. 이중 ‘폭행 등 배우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이혼 상담을 청해 온 경우는 1373건으로 이혼 관련 상담의 약 27%를 차지했다. 한편 법원 통계에 따르면 98년 한해 동안 가사사건 중 이혼과 관련해 재판상 이혼에 이른 건수는 총 3만8855건에 달했다. 이중 ‘배우자 폭행을 포함한 부당한 대우’로 발생한 이혼건수는 5381건에 달했으며 이는 재판상 이혼건수의 15%를 웃도는 수치다. 재판상 이혼사유 3호에 해당하는 ‘배우자 본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흔히 가정폭력을 포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피고가 남자인 경우는 4406건으로 여자의 3배 이상을 차지했다. 또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99년 한해 가정폭력피해자 상담건수가 4만1000여건에 달했다.

    지난 99년 서울시 교육청 산하 12개 청소년상담센터에 접수된 상담사례는 총 5만 5563건이었다. 이중 집단 따돌림이나 교우관계 등 학교생활 부적응을 호소한 경우가 2만1688건으로 약 39%를 차지했다. 이는 98년의 1.2배, 97년에 비해 무려 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교권침해현황분석’ 자료에 의하면 학생이 교사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폭력을 행사한 경우가 97년 36건, 98년 70건에 이어 99년에는 77건으로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 따르면 98년 한해 동안 전체 상담건수는 952건으로 드러났다. 이중 신체적 피해를 호소한 경우는 50%를 차지했다. 또 중복응답 결과 모욕이나 따돌림 등의 정신적 폭력을 호소한 경우도 43%에 달했는데, 이는 따돌림을 당할 때 흔히 폭력이 수반되는 예를 참고할 때 폭행 피해는 더욱 늘 수밖에 없다. 특히 피해자는 13~16세가 가장 많아 50% 이상을 차지했다. 관계자는 폭력이 갈수록 저연령층화되고 있음을 우려했다.

    또다른 자료를 보자.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에 따르면 99년 전체 상담건수는 255건에 달했으며 이중 신체적 학대로 상담한 경우는 160건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자녀에 대한 성적 학대도 19건이나 됐는데 신체적 학대의 80% 이상이 부모나 계부-계모에 의해 행해진다고 관계자는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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