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9

2000.01.27

꽉다문 ‘강철 입술’이유 있었다

‘라이벌’ 하영옥씨 의식 결정적 증언 거부… 법원의 엄격한 법적용도 한몫

  • 입력2006-06-27 10:5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1월7일 서울지법에서는 민혁당 사건 연루자 하영옥씨(37)와 ‘강철’ 김영환씨(37) 사이에 치열한 ‘사투’(思鬪·사상투쟁)가 벌어졌다. 경직 일변도로 진행되던 공안재판 풍속도가 크게 바뀐 것이다. 며칠 뒤인 1월10일 부산고법은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한 영남위 사건 일부 관련자들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려 새삼 세상이 변했음을 환기시켰다. 공안사건의 풍속도가 이렇게 바뀐 연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변화의 저변에는 김영환씨와 하영옥씨 사이의 갈등이 숨어 있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인 두 사람은 주사파의 대부로 활동하다 86년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김씨보다 먼저 풀려난 하씨는 89년 3월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했고 김씨는 뒤늦게 합류했다.

    반제청년동맹은 김씨와 하씨, 그리고 서울대 법대 1년 후배인 박모씨(현재 변호사)로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이끌었다. 그리고 울산지역을 무대로 한 영남위원회와 성남 지역을 본거지로 한 경기남부위원회, 전주 지역의 전북위원회 등 3개 지방조직을 구성했다. 이중 하씨는 영남위와 경기남부위, 김씨는 전북위를 이끌었고, 박모씨는 기관지 ‘주체기치’의 편집을 담당했다.

    89년 7월 북한 노동당 대외연락부는 제5과장 윤택림(57)을 남파시켜 반제청년동맹과의 접촉을 시도했는데, 이때 실제 리더인 하씨를 제쳐놓고 김씨와 접촉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91년 2월 노동당은 김씨에게 추후 통신업무를 담당할 사람을 데리고 밀입북하라고 지시했다. 김씨는 하씨에게 밀입북을 제의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이에 대해 민혁당 관계자들은 “통신연락책은 북한 암호 지령을 풀어 김씨에게 전달하는 자리다. 하씨는 김씨의 부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동행을 거절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91년 5월 김씨는 서울대 1년 후배인 조유식씨(전 ‘말’지 기자)와 함께 강화도 해안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왔다. 그 얼마 뒤 조씨는 북한 방송을 통해 대외연락부가 강화도의 드보크(무인포스트)에 공작금 40만달러를 갖다 놓았다는 지령을 받고 이를 찾아 김씨에게 전달했다. 이때부터 반제청년동맹은 김씨에게 운영자금을 의존하게 되었다. 하씨와 김씨간의 갈등 요인이 늘어난 것이다.



    93년부터 95년 사이 반제청년동맹은 민혁당으로 변모했다. 이 무렵 중앙위원 김씨와 박씨는 주체사상의 허구성을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생각이 변한 김씨는 월간 ‘말’ 95년 4월호 인터뷰와 민혁당 기관지 ‘빛’을 통해 ‘내놓고’ 수령론을 비판했다. 또 자신이 관장해온 전북위 조직원을 상대로 주체사상은 허구라는 생각을 ‘강력히’ 전파했다. 박씨도 중앙위원 역할을 등한시하며 사법시험 준비에 몰두하였다.

    이에 따라 민혁당이 와해 위기에 처하자 97년 5월 중앙위원 세 사람은 민혁당 해체 문제를 토의하고 표결에 들어갔는데, 2대 1로 해체결론이 났다. 이렇게 되자 김씨에 대한 하씨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이후 민혁당은 하씨가 단독으로 장악하게 되었고, 하씨는 말레이시아인으로 위장 침투한 북한 공작원 진운방과 선을 연결했다. 그리고 ‘말’지 99년 7월호에 ‘너는 강철이 아니라 고철이 되었다’며 김씨를 비난하는 글을 기고했다.

    한편 민혁당 출범 이전인 93년 부산경찰청 보안수사대는 별도 첩보를 토대로 영남위원회의 존재를 알아채고 통신 감청과 비디오 촬영 등으로 증거를 수집해오다 98년 7월 울산 동구청장 김창현씨(38) 등 영남위 멤버 15명을 검거했다. 이때 부산경찰은 박모씨 집에서 영남위 활동상을 담은 디스켓을 대량 압수하는 ‘쾌거’를 올렸다. 경찰은 박씨가 보는 앞에서 디스켓을 통에 넣고 봉인한 다음, 경찰청에서 다시 박씨가 보는 앞에서 통을 개봉해 디스켓을 꺼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경찰은 디스켓을 컴퓨터에 넣어 출력했는데, 이때 자기들이 보기 편하도록 몇 개 파일의 자간(字間)과 문단 모양을 바꾸었다. 이러한 파일에는 디스켓이 경찰에 압수되고 난 뒤의 시간이 찍힌 ‘동시저장 파일’(ASV)이 생겨났다.

    영남위 사건 공판이 열리자 피고측은 “동시저장 파일이 생긴 것은 경찰이 디스켓을 조작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동시저장 파일과 본 파일(HWP)의 내용이 똑같으므로 조작하지 않았다” 고 대응했다. 1심은 검찰 편을 들어 영남위를 반(反)국가단체로 판시했으나, 2심은 국가변란을 모의한 반국가단체로 볼 수 없다며 이적단체로 판시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한발 더 나아가 ‘경찰이 손댄 파일을 증거로 인정하는 판결은 잘못’이라는 새로운 판례를 만들며 2심 판결을 파기해 버렸다.

    이렇게 돼 부산고법에서 파기환송심이 열리자, 검찰은 민혁당 사건으로 검거된 김영환-하영옥씨를 출두시켜 영남위가 실존하는 반국가단체라는 것을 증언토록 하는 ‘마지막 뒤집기’를 시도했다. 민혁당 존재를 부인해온 하씨는 ‘당연히’ 영남위의 존재를 부인했다. 검찰이 기대를 건 쪽은 김씨였다. 그러나 구인장을 받고서야 겨우 출석한 김씨는 증인선서를 거부해버려 증언이 이뤄지지 않았다. 검찰의 마지막 희망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자 부산고법은 대법원의 새 판례에 따라 경찰의 증거 수집 방법에 문제가 있다며 이적단체 부분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하게 되었다. 이러한 판결을 내린 부산고법의 이영동판사는 “영남위가 실존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의 증거 수집과 관리에 문제가 있어 무죄판결을 내렸다. 새 판례가 나온 만큼 국가보안법 사범에 대한 수사기관의 증거 수집은 보다 철저하여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전향했다는 김씨는 왜 증언을 거부했을까. 김씨의 한 측근은 “영남위는 하씨가 관장했기에 김씨는 간접적으로만 알 뿐이다. 직접 관장한 하씨가 모른다고 하는데 안다고 할 수도 없고, 또 하씨와의 인간적인 갈등도 있어 증언을 거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남위 재판과 별도로 1월7일 서울지법에서는 하영옥씨가 피고인이 된 재판이 열렸다. 이날 하씨는 증인으로 출석한 김씨를 향해 “너는 목숨을 걸고 지키자던 ‘당헌’을 어겼다”며 공격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하씨가 ‘당헌’ 운운한 것은 “민혁당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평소 주장과 완전 배치된 것이기 때문이다.

    김씨가 관장해온 전북위는 전원 자수해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영남위 멤버는 대부분 무죄판결을 받았으므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남은 것은 경기남부위뿐이다. 민혁당을 수사해온 국정원은 경기남부위 명단을 완전 파악했으나, 영남위 사건 재판에서 나온 새 판례 때문에 아예 수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작금의 공안사건 풍속도는 이런 상황에서 빚어진 것이다.

    항상 ‘한발 앞서 간’ 김영환씨와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던 하영옥씨 간의 인간적인 갈등, 이러한 하씨에 대한 김씨의 인간적인 배려, 그리고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엄격히 법 적용을 하려는 법원의 변화된 자세가 어우러져 만든 것이 작금의 공안 사건 드라마인 것이다.

    오판에 웃고 오판에 울고

    ‘안기부 조작’으로 알고 ‘진짜 간첩’신고… 언론보도 뒤 영남위 존재 알아내


    부산지방경찰청이 영남위를 내사할 때인 97년 7월의 일이다. 북한 노동당 대외연락부는 남한내 지하당 조직과 ‘선’을 만들기 위해 부부간첩 최정남과 강연정(사망)을 남파했다. ‘선’을 찾아 헤매던 이 부부는 97년 10월 영남위 멤버 정모씨에게 “북에서 왔다”며 접근했다.

    당시는 15대 대선 직전이라 정씨는 ‘안기부가 공안사건을 꾸미고 있다’고 오판했다. 그래서 안기부에 간첩 출현을 신고하고, 안기부가 공안사건을 만들지 못하도록 기자회견을 통해 간첩 출현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나 안기부는 정씨의 신고로 간첩 출현을 처음 알았던 것이다. 안기부는 간첩 조직을 일망타진할 생각으로 각 언론사에 정씨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야당이던 국민회의 캠프에 알려졌다. 국민회의측도 ‘안기부가 야당에 불리한 공안사건을 꾸민다’고 오판했다. 그래서 각 언론사에 이 사실을 알려 간첩 출현 사실은 보도되고 말았다.

    이러한 오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부산경찰청은 더 쉽게 영남위의 존재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후 압수한 영남위의 디스켓을 방심하고 다뤘다가 재판에서 패배한 것이다. 오판이 영남위와 수사당국, 정치권을 웃기고 울린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