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2

1999.12.09

민심 등진 인사 ‘역풍’ 불렀다

DJ용인술의 문제점… ‘견제와 균형’ 무너지고 ‘내 사람 키우기’ 한계

  • 입력2007-03-21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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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심 등진 인사 ‘역풍’ 불렀다


    IMF 관리체제로 인한 극도의 불안과 새 정권에 대한 기대가 교차했던 98년 1월초. 홍콩의 한 일간지는 당시 김대중대통령당선자(DJ)의 용인술을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조조(曹操)와 비교하는 보도를 했다. 한때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을 사면한 DJ의 행보가 삼국시대를 풍미한 조조의 선견지명 있는 용인술의 현대판처럼 기묘했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가 염두에 둔 조조의 고사는 대략 이런 것이다. ‘조조가 동한(東漢) 말 화북(華北)지역 패권을 놓고 원소(袁紹)와 결전을 벌일 때 부하 한사람이 원소와 내통했다. 그러나 조조는 싸움에서 이긴 뒤 내통자를 고발하는 증거물인 편지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 없애버렸다. 감읍한 배반자는 이후 목숨을 다해 조조에게 충성했다.’

    김영삼(YS)정권의 참담한 실패에 낙담해 있던 국민은 DJ의 이런 포용력 있는 출발에 커다란 기대를 걸었다. DJ가 과거의 적들을 포용하고 자신의 품안에 들어온 적들을 ‘DJ맨’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도량을 갖춘 인물이길 바랐던 것이다.

    DJ의 ‘포용 드라이브’는 98년초 청와대비서실과 장차관급 인사에서 보다 구체화됐다. 집권자로서의 용인술을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한 당시 인사의 가장 큰 특징 역시 구여권과 보수세력을 아우르는 포용이었다.



    과거 이념적 측면에서 개혁과 중도에 가까운 색깔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아 온 DJ는 첫 조각에서 개혁- 중도-보수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껴안으려 시도했다.

    대표적인 예가 첫 인사작품인 김중권씨의 청와대비서실장 발탁이었다. TK(대구-경북) 출신으로 노태우전대통령 시절 정무수석을 역임한 인물로 97년 대선 직전에야 ‘DJ호’에 올라탄 그를 ‘2인자’(DJ의 표현) 자리에 앉힌 것.

    재야출신 이해찬교육부장관에서 대북보수파 강인덕통일부장관까지, 진보적 경제학자 김태동경제수석에서 중도보수성향의 관료출신 강봉균정책기획수석까지 진보와 보수의 결합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당시 DJ지지자들은 이런 DJ를 ‘인재의 용광로’라 찬양했다. 조선조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비유하기도 했다. “꿩잡는 게 매다” “뱀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땅꾼들이 제일 잘안다”는 표현도 등장했다. 모두 오랜 동지는 아니지만 해당 분야를 속속들이 잘 아는 이들을 활용하려는 폭넓은 리더십을 칭송한 것이었다.

    DJ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인사는 너무 한쪽으로만 흐르면 안됩니다. 과거에는 너무 한쪽으로만 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김대중정부는 용광로가 돼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제가 있습니다.”

    DJ 용인술의 또하나의 특징은 가신과 비서그룹의 철저한 배제였다. 17개부 장관과 국정원장 인선에서 충성심이 강한 동교동계 인사는 단 한명도 발탁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인맥이 들어섰다. 아태재단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된 강인덕 신낙균 임동원씨 등과 자문교수단을 대거 기용했다. 이종찬 박정수 천용택씨 등 4·11총선 전후 DJ진영에 합류한 구여권 인사들도 한 축을 이뤘다. 이들은 DJ의 핸디캡인 행정경험 부족이라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동교동계로 대표되는 구주류에 맞서는 신주류를 형성했다.

    이는 과거 야당 시절 DJ의 인사스타일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DJ는 과거 새로운 인물들을 앞에 내세워 모양새를 갖추되 핵심요직에는 충성심 강한 직계인사를 포진하는 방식을 즐겨 써왔다. 오랫동안 정권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 정치를 해온 DJ에겐 충성심이 사람을 쓰는 가장 중요한 잣대였다.

    이런 전혀 새로운 실험에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필요했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칙 속에 너무나 다양한 흐름과 세력을 완벽하게 조율-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던 것.

    결과는 어땠을까.

    DJ의 새 진용은 출범 초기부터 삐걱댔다. 우선 청와대 비서실의 핵심인 정무수석과 경제수석이 100일도 안돼 교체됐다. 주양자보건복지부장관이 낙마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박정수외교통상부장관은 같은 해 8월 외교혼선을 이유로, 배순훈정보통신부장관은 12월 빅딜 반대 발언으로 경질됐다. 올 3월에는 국민연금 파문과 관련해 당정간 혼선을 부채질한 ‘혐의’로 국민회의 김원길정책위의장을 교체했다. 이들의 시의적절한 경질은 사태의 악화를 막기 위한 ‘올바른 선택’에 가까웠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낙마시킬 사유가 충분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DJ의 고집에 있었다. 대표적 사례는 국민의 뇌리에 너무나 선명히 남아있는 김태정씨의 경우. DJ는 대전법조비리사건 수습과정에서 검찰의 항명파동이 났을 때 그를 문책하는 대신에 검찰총장에서 법무부장관으로 영전시켰다. 옷로비의혹이 터졌을 때는 ‘마녀사냥식 언론보도’라며 오히려 그를 감쌌다. 민심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런 ‘사오정식 용인술’은 내내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DJ식 용인술의 장점이었던 견제와 균형 감각도 집권 2년이 가까워지면서 무너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중권실장에 대한 총애는 ‘DJ는 절대 한 사람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는 ‘철칙’과는 사뭇 달랐던 것. 이것이 결국 권력핵심 세력간 균형을 깨고 힘의 쏠림 현상을 가져오는 부작용을 낳았다. 많은 국민이 크게 실망한 것은 DJ가 YS의 실패로부터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을 얻지 못한 데 있었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고 자신만만해 하다 ‘머리는 절대 빌릴 수 없다’는 역설을 입증하고 만 YS식 용인술보다 그리 나은 점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YS처럼 DJ 경우도 ‘인사가 망사(亡事)’가 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논자들은 YS와 DJ의 용인술을 즐겨 비교한다. 이들은 우선 YS 인사스타일의 특징으로 ‘깜짝쇼’식 인사, 지나친 측근 의존, PK(부산-경남) 편중인사, 능력보다 충성도 중시를 꼽는다. 그런데 이같은 YS의 결점 중 DJ가 극복한 것은 깜짝쇼식 인사와 측근 의존 정도뿐이라는 것.

    DJ가 당선자 시절 정무수석 후보로 문희상 이강래 김정길씨 등 3명을 지목한 뒤 이들을 차례로 발탁한 것은 주도면밀한 인사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또 가신과 비서출신을 멀리해온 것도 비교적 높이 평가받는 대목이다. 반면 DJ의 호남출신 중용을 YS의 PK편중인사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라고 좋게 봐주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민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 것은 문제가 생겼음에도 과감한 인사로 이를 풀려고 하지 않는 DJ식 용인술이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비교 분석한 ‘문민정부 국민정부 문제인사 처리 비교’라는 자료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YS는 첫 개각에서 자녀특례입학 또는 재산공개 등과 관련해 문제가 생긴 박희태법무-박양실보사-허재영건설부장관, 김상철서울시장 등 4명을 바로 해임했다. 그러나 DJ는 첫 내각에서 김선길해양수산, 강인덕통일, 주양자보건복지, 신낙균문화관광부장관 등이 과거 및 재산문제로 파문을 일으켰으나 주장관만 경질했다.

    측근들의 처리도 달랐다. YS는 최형우신한국당사무총장, 전병민청와대정책수석 등을 해임 또는 구속시켰다. 반면 DJ는 김태정장관은 물론 고관집 절도사건으로 구설수에 오른 유종근전북지사를 도청 순시 때 오히려 격려했다.

    YS는 자치단체장선거 연기 문서 파문이 일자 당시 김덕안기부장을 즉각 해임했다. 하지만 DJ는 야당총재 비난사건, 안기부 홍보문건사건, 총풍사건, 문서유출사건 등 수많은 사건이 있었음에도 이종찬국정원장을 문책하지 않았다.”

    물론 ‘한번 택한 사람을 끝까지 밀어준다’는 DJ식 용인술은 정부의 안정성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임지지 않는 행정은 신뢰의 상실을 불렀고 민심의 이반을 재촉하는 요인이 됐다.

    결국 DJ는 ‘끝까지 믿었던’ 김태정씨로 인해 최대의 위기를 맞았고, 또한번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과해야 했다.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하다. 책임있는 사람에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책임을 엄중히 물어서 단호한 조치를 내리겠다.”

    그리고 DJ는 김중권체제를 한광옥체제로 바꾸는 다소 과거회귀적인 인사 속에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김태정전법무장관과 박주선전청와대법무비서관에게도 단호한 조치가 취해질 전망이다. DJ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정치까지 배워 용인의 귀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부메랑되어 돌아온 ‘해외파’

    DJ 美망명 때 ‘인연’ … 유종근-이영작씨 등 되레 ‘부담’으로


    인적 자원에 관한 한 DJ가 전직대통령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하나는 이른바 ‘해외파’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DJ는 82∼85년 미국망명 중 일단의 지지자 그룹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체가 미 워싱턴의 한국인권문제연구소다.

    DJ가 83년에 세운 이 단체는 망명 때뿐 아니라 귀국후에도 DJ와 미국내 인권지도자 및 정치인을 이어주는 창구역과 교민지지자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어려웠던 시절에 만든 단체인 만큼 연구소에 관여했던 인사들 중에는 DJ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들이 많다.

    문동환목사 이영작박사 등은 연구소의 초창기 이사들이다. 박지원문화관광부장관, 유종근전북지사, 김경재 정동채의원, 조한용익산시장, 장한량국민회의충북지부장 등은 연구소 멤버들.

    이들은 분명 대통령 DJ를 있게 한 공신들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는 것일까. DJ에겐 한결같은 원군이었던 ‘해외파’의 존재가 집권후 부담으로 작용하는 일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유종근지사는 고관집 절도사건과 관련,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서울사택에서 나온 거액의 돈과 당국의 조사에 응하는 뻣뻣한 태도 때문이었다.

    이영작박사는 경기은행 로비사건의 연루 여부로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박지원장관은 청와대 대변인 시절의 대언론 관계로 한나라당의 비난을 받았다.

    최근 김태정전검찰총장 집무실에서 사직동팀 최종보고서를 입수한 것으로 알려진 신동아그룹 로비스트 박시언씨도 DJ의 미국생활과 관련있는 인물이다.

    미국시민권자인 그는 DJ 망명시절 직접 만나기도 했고, 일부 재정지원을 하기도 했다. 현 여권 실세들과의 교분도 그때 이루어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에 대해 박씨는 이렇게만 말했다. “DJ는 80년대 망명시절 미국에서 한번 봤다. 그러나 내가 무슨 재정지원을 담당했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아주 부끄러울 정도로 한번 도왔을 뿐이다. 그리고 대통령당선자 시절인 지난해 초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 동생인 로저 클린턴 방한시 에이전트 일을 하고 있어서 로저 클린턴과 함께 일산 자택으로 찾아가서 뵌 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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