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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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觀

존 크롤리 감독의 ‘브루클린’

로맨스 문법으로 그려낸 성장의 고통과 환희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6-05-03 09: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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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은 그립다. 상투적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좀 더 고민해보면 고향이란 그리운 덫이기도 하다. 집안 어른들과 관련돼 마을 전체가 어른인 곳, 사소한 소문이 발목을 잡는 곳, 어느 집 숟가락 하나가 늘어도 온 마을 사람의 뉴스가 되는 곳, 그렇게 작은 마을이 고향이라면 고향은 다정한 곳인 한편 덫이 된다. 얼마 되지 않는 구성원은 다른 사람의 작은 성공을 함께 나누기도 하지만, 그 작은 성공을 모두가 질투하기도 한다. 작은 세계는 생각보다 답답하고 힘든 공간이다.

    ‘브루클린’의 주인공 에일리스가 살고 있는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도 그렇다. 에일리스는 그 작은 마을의 유일하다시피 한 식료품 가게에서 일한다. 그런데 주인이 고약하기 그지없다. 가령 일요일에 구두약을 사러 온 고객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남들은 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식료품을 사려고 긴 줄을 서 있는데, 먹지도 못하는 구두약을 꼭 이렇게 바쁠 때 사야 하느냐고 말이다. 심지어 비싼 물건을 사는 고객에겐 새치기를 주선하기도 한다. 가게 주인이 가진 알량한 권리를 휘둘러대는 셈이다. 훤히 아는 타인의 가정 사정도 그에게는 비아냥거릴 대상 중 하나일 뿐이다.

    이야기는 에일리스가 그 좁은 동네를 벗어나 넓은 곳에 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미국 뉴욕에 가서 일하고 공부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배를 타고 아일랜드를 벗어나면서 에일리스는 심한 배멀미를 한다. 그리고 도착 후엔 배멀미보다 더 심한 향수병으로 고생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일랜드 언니들이 도움을 주긴 하지만 에일리스에게 미국은 언니와 엄마가 없는, 낯설고 어려운 땅일 뿐이다.

    영화는 이렇듯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하는 에일리스를 꽤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마치 식물을 옮겨 심듯 인간은 누구나 조금씩 더 큰 공간에 옮겨져 심길 필요가 있다. 특히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에일리스는 언니 도움으로 미국에 와서 돈을 벌고 학교에서 공부도 하지만, 머릿속은 빨리 아일랜드에 돌아가 가족을 만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그는 결국 더 넓고 큰 곳이지만 낯선 땅, 미국에 정착할 수 없는 것일까.

    에일리스의 불안함은 또 다른 이민자 토니를 만나 행복감으로 바뀌게 된다. 사랑은 뉴욕을 더는 낯선 곳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낯설고 어색하던 도로와 집은 이제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로맨틱한 장소로 거듭난다. 그는 사랑을 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집, 엄마, 언니 그리고 아일랜드를 잊는다. 고향 때문에 더는 아프지 않다.



    문제는 고향을 떠난 자가 다시 고향을 찾을 때 발생한다.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언니가 세상을 떠나며 에일리스는 다시 고향을 찾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뉴욕의 토니와는 다른 매력을 가진 남자, 짐이 나타난다. 게다가 짐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짐이 에일리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에일리스 역시 흔들린다.

    흔들리고 망설이던 에일리스는 그러나 곧 깨닫는다. 짐이 반한 여인 에일리스는 토니가 변화시켜놓은 에일리스라는 걸 말이다. 만일 뉴욕으로 떠나 토니를 만나기 전 에일리스였다면 짐이 관심을 보이고 호감을 가졌을까. 즉 에일리스가 고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의 변화는 가능했을까.

    ‘브루클린’은 성장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그럼에도 성장 앞에서 머뭇거리는 인간의 아둔함을 잘 보여준다. 결국 에일리스는 마땅한 선택을 한다. 성장의 멀미와 고통을 로맨스의 문법으로 보여주는 작품, ‘브루클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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