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동충서돌

‘꼰대’ 문화가 만연한 직장, 월급이나 사람을 선택하는 지혜

  • 박한규 자유기고가

    입력2020-01-04 11: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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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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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여의도 쌍둥이빌딩 서관 31층, H정유 인력개발부 4급 사원, 전화번호 6133, 사원번호 3194. 부장님과 과장님, 대리님 2명, 그리고 ‘미스 최’. 부장님 자리는 한쪽으로 비켜 있고 과장님과 두 대리님은 내 등 뒤에 있다. 1988년 3월 14일 첫 출근은 작은 흥분이었다. 그 직장을 처음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원인은 사소했다. 칠판지우개 진공털이를 여러 차례 총무부에 신청했는데도 수개월 동안 사주지 않는 바람에 쓸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 칠판지우개 수십 개를 털어야 했던 날인데, 몇 연도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처음 출근한 날은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처음 ‘때려치우고 싶었던’ 날은 몇 연도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월급쟁이는 계속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사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조직에 속한 대가로 생계를 영위하는 직장인이 다수가 된 것은 6·25전쟁 이후라 겨우 60년 남짓이니, 3대(代) 월급쟁이의 탄생도 최근 일이다. 그러니 ‘직장에서 상사한테 어떻게 하라’ 같은 밥상머리 교육은 아직도 어설프다. 또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30년 이상 연령차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에 원초적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필자만 해도 미스 김, 미스 박이 문서를 만들어주던 시대를 거쳐 전 직원이 노트북컴퓨터를 통해 스크린에 파일을 띄워 토론하는 시대를 겪었다. 그런데 정작 직장생활을 고(苦)나 낙(樂)으로 만드는 것은 미스 김도, 노트북컴퓨터도 아닌, 영원불변의 직장생활 3대 요소인 돈, 일, 사람에 대한 태도와 대응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인은 돈, 사람, 일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면 나머지가 최악이더라도 이 한 몸 바쳐 충성하지만, 대부분 어느 하나도 만족스럽지 않다. 

    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 2000여 명에게 이직 의사를 물었다. 58%가 ‘좋은 기회가 온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응답하면서 그 조건(복수응답)으로 연봉(71.2%), 업무적합도(69.6%), 워라밸(47.9%)을 들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먼저다. 필자가 세 번째 직장인 공무원이 됐을 때 30% 이상 연봉이 줄었는데, 첫 월급날 아내가 물었다.

    피할 수 없는 상사와 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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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너스는 몇 %야?” 

    “없는데. 매달 그만큼이야. 적어? 적자인가? 그만둬?”라고 대답하자 “아니”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사실 이 문제는 답이 없다. 석 달 이상 그 월급을 받고도 계속 만족해할 사람은 거의 없다. 여섯 번째 직장이던 외국인투자 법인에서는 전 직장 대비 30% 이상 더 받았지만 나보다 더 받는 동료, 경쟁사를 발견하는 순간 초라해졌다. 그러니 돈은 초단기 마약에 불과하다. 직무에 대한 동기 유발 요인을 조사한 허즈버그(Herzberg)에 따르면 인간은 일에 만족을 느끼는 경우 일 자체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지만, 반대로 일에 불만을 느끼는 경우에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환경에 더 큰 관심을 둔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 그러한 이론이 불필요했다. 



    직장은 일과 사람의 조합이다. 높은 수준의 목표를 더 빨리 달성하기 위한 일과 사람의 효율적 결합. 일이 벽돌이라면 사람은 모르타르다. 모르타르는 모래, 자갈, 시멘트와 물의 결합인데 이들 사이, 특히 상사와 부하의 관계가 그리 평화롭지 않다. 

    신입사원 시절 모셨던 임원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 문상을 갔는데 나를 형제들에게 ‘동료’라고 소개했다. 단어를 애써 골랐을 상황은 아니니 평상시 생각의 발로였을 텐데, ‘부하’가 아닌 ‘동료’라는 그 한 마디가 이후 그분에 대한 나의 태도를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으며, 그것을 닮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늘 그런 동료(상사)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우호적인 사람이 있으면 적대적인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직장에서는 동료, 특히 상사에 대한 선택 권한은커녕 기회도 거의 없다. 그러니 답은 명확했다.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생의 반려자는 완전한(?) 자유 의지로 선택(?)했지만, 직장에서는 성에 안 차는데 하물며 내 의지와도 무관한 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필자가 직장에서 처음 맡은 일은 사보편집이었다. 없으면 허전하지만 딱히 주목받는 일도 아닌, 오탈자 없이 읽을 만한 내용을 담아 예쁘게 만드는 일이었는데 ‘읽을 만한’ 것을 발굴하는 것이 요체였다. 그 일을 즐기기 위해 사회 초년생은, 범접할 수 없지만 굴지의 정유회사 사보 담당자는 가능한 한 사회 저명인사의 원고를 싣기 시작했다. ‘퐁당퐁당’ 같은 동요를 작사한 윤석중, 4컷 만화의 비조(鼻祖) 김성환,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고 김일성의 백내장 수술을 집도한 공병우 같은 분들인데, 지금도 육필 원고 여러 개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매월 그런 분들을 만날 설렘으로 ‘딱히 주목하지 않는 일’을 즐겼다. 

    직장(직업)은 목적일까, 수단일까. 정답은 없다. 산업화 과정에서 큰 족적을 남긴 기업가 1세는 사업 성취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고, 그들 뒤에는 같은 생각을 하는 직장인이 많았다. 그들은 밤낮, 주말, 휴가 없이 일했으며 또 가정보다 직장이 우선인 적도 많았다. 필자만 해도 한 달 반 만에 퇴근한 경우도 있고, 다섯 번째 직장에서는 첫 휴가를 가는 데까지 4년이 걸렸다. 선택은 각자의 몫인데 최근에는 무게중심이 점점 수단으로 옮아가는 느낌이다. 틀렸다고 깎아내릴 일도, 옳다고 강변할 일도 아니다. 다만 목적으로 생각하는 이와 수단으로 생각하는 이의 태도는 다르니 결과도 다를 수밖에.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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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태도와 성과에 대한 다른 평가와 보상을 받아들일 각오 역시 필요하다. 연말연시는 인사철이다. 승진하는 이도, 떠나는 이도, 좌천되는 이도 있다. 불이익을 받은 사람 중에는 좋은 보상을 받은 이들을 두고 학연, 지연이나 가끔 ‘손바닥’을 논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직장을 목적으로 삼고 일한 이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기억이 더 많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직급이 인생 계급이나 성적표는 아니니 직장이 목적이든 수단이든 재미있게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50년 동안 음향기기를 수리하고 있는 분을 소개했다. 일흔 넘은 나이에 하루 4시간씩 걸려 출퇴근한다는데, 자신이 조립한 음향기기로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청음실’을 만들어 주변에도 개방하고 있다는 그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조직에서 사람은 선택할 수 없고, 급여의 만족은 순간이지만 일을 즐길 방법은 아주 많다. 

    한 20대 직장인과 직장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 나이 때 내 모습과 너무 닮아 뜨끔했던 적이 있다. 50대 후반 꼰대가 된 요즘, 예전 꼰대들이 쓰던 표현을 불쑥불쑥 입에 올리는 나를 발견하고 많이 놀란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거나 나 역시 그들보다 나은 부분이 없기 때문일 테다. 부디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4300년 묵은 수메르 점토판에 ‘요즘 젊은이들은 문제야’라는 문구가 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꼰대들의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다. 꼰대들 눈에 젊은이는 늘 문제지만 그들이 세상을 이끌고 나면 또 다른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허나 2500년 전 동양에서는 후생가외(後生可畏)를 외친 사람도 있었으니, 새 시대의 주인인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두고 볼 일이다.

    박한규는… 자유기고가로, 1988년부터 31년간 중소기업, 공무원, 외국 회사, 공공기관 등 7개 직장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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