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0

2016.01.06

경제

요주의! 영구채로 부채 물타기

두산인프라코어 발행 이후 기업들 너도나도…대한항공도 3억 달러 발행

  • 김수빈 객원기자 subinkim@donga.com

    입력2016-01-05 16: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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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선수들이 제재 조치에도 약물 복용의 유혹을 느끼는 이유는 각고의 노력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운동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 약물인 스테로이드는 손쉽게 근육량을 늘릴 수 있게 도와주지만 과용할 경우 심근경색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기업도 비슷한 유혹을 느낀다. 분식회계 등 회계부정이 대표적인데, 최근에는 영구채(perpetual bond·만기 없이 이자만 지급하는 채권)라는 새로운 아이템이 화제다. 기업 재무구조를 합법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중도상환 기한이 도래할 때쯤 기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이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과 닮았다. 특히 재무구조가 좋지 않은 기업들이 최근 들어 영구채를 발행하고 있어 우려를 자아낸다.
    2015년 12월 중순, 20대 신입사원도 희망퇴직 대상에 포함시킨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두산인프라코어. 회사 재무구조를 악화시킨 가장 큰 원인은 중국 건설기계 시장의 침체지만 영구채로 인한 부담 또한 한몫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2012년 5억 달러(약 5500억 원)의 영구채를 발행하면서 금리를 처음에는 3.32%, 발행일로부터 5년 후에는 8% 이상, 7년 후에는 10% 이상으로 지급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직장인 신용대출도 금리가 4~5% 수준인 시대에 왜 대기업이 이토록 높은 금리를 걸고 채권을 발행한 걸까. 영구채가 가진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영구채는 채권과 주식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정해진 기간마다 일정한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채권과 비슷하나 만기가 없거나 매우 길다. 미국 월트디즈니나 코카콜라 같은 회사는 100년 만기 채권을 발행한 바 있다.



    부채 같으면서도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

    무엇보다 기업들이 영구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영구채가 회계상 자본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한 기업의 ‘자산’은 그 기업이 가진 ‘자본’과 ‘부채’를 더해 산정한다. 자산이 10조 원인 기업이라도 부채가 9조9000억 원이면 누구도 투자할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기업은 자신이 보유한 자본과 부채의 비율(자기자본비율)에 신경 쓰기 마련이다. 이미 부채비율이 높은 회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만약 외부로부터 돈을 끌어올 수 있는데 그것이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분류된다면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영구채를 발행하면 그만큼 자본이 늘어나 부채비율은 낮아지고 자기자본비율은 높아져 재무구조가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게다가 영구채는 주식이 아니어서 기존 주주의 지분을 희석하지 않는다. 일반 대중에게 추가로 주식을 공모하는 유상증자의 경우, 기존 주주의 지분이 희석되므로 반발이 크고 주가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영구채에는 의결권이 없어 경영권 방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영구채의 장점들은 뒤집어 투자자 처지에서 보면 단점이 된다.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받는 대신 채권에서도 후순위로 밀리기 때문에 만일 기업이 부도를 맞으면 다른 채권에 비해 손실을 입을 위험이 훨씬 높다. 의결권이 없으니 회사 경영에 참여할 수도 없다. 만기가 100년짜리라면 내가 죽고 나서야 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투자자들이 영구채를 구매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높은 금리가 등장한다. 이런 단점들을 상쇄하고 투자자를 끌어들이려면 이자율을 높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영구채는 대부분 이 정도로는 투자자를 유인하기에 부족하다. 금리를 올리는 데 한계가 있고, 역사가 100년 넘는 기업이 거의 없는 대한민국에서 만기가 예외적으로 긴 채권에 투자할 만한 사람도 거의 없다. 그래서 만기 자체는 길지만 중간에 영구채를 발행한 기업이 이를 회수할 가능성을 크게 높이는 조항을 덧붙인다. 이것이 바로 영구채를 문제아로 만드는 ‘스텝업(step-up)’ 조항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고서 발행자가 이를 회수하지 않으면 이자율이 높아진다. 두산인프라코어의 경우 발행일로부터 5년이 지나면 가산이자 5%p가 붙고 7년 후에는 여기에 추가로 2%p가 붙는다.
    본래 영구채는 은행이 자기자본비율 확충을 위해 고안한 것인데 은행이 발행한 영구채의 경우 발행일로부터 10년 후에 1%p 정도 가산금리를 적용하는 수준인 반면, 우리나라에서 비금융기업으로는 최초로 영구채를 발행한 두산인프라코어의 사례에서는 스텝업 조항의 가산금리가 너무 높다. 이 때문에 국내 회계 전문가들이 과연 두산인프라코어의 영구채를 진짜 ‘자본’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해왔다. 금융위원회 또한 두산인프라코어의 영구채가 후순위가 아니고 스텝업 조항도 과도해, 이는 사실상 5년 만기 회사채와 같다고 지적했다. 이 논쟁은 결국 국제회계기준위원회까지 올라갔으나 결국 자본으로 인정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과도한 가산금리, 한국 경제 뇌관 될 수도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2012년 10월   5일 당시 두산인프라코어와 KDB산업은행의 영구채 발행 협약식에서 “이번 영구채 발행은 (세계 경제의) 저성장 추세에 대응하기 위한 경영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두산인프라코어의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다. 투자자는 발행일로부터 5년이 되는 2017년 10월까지 두산인프라코어가 영구채 상환을 하지 않을 경우 KDB산업은행, 우리은행, KEB하나은행에게 이를 강제로 팔 수 있는 ‘풋옵션’을 갖고 있다. 이들 은행이 두산인프라코어에게 신용을 공여했기 때문. 영구채 특성상 투자자들은 두산인프라코어가 상환하지 못하면 십중팔구 풋옵션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이 또다시 대기업 부채와 다름없는 영구채의 부담을 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KDB산업은행 측은 “회사(두산인프라코어) 측도 구조조정과 사업부 매각, 밥캣(Bobcat) 상장 등으로 2017년까지 충분히 준비할 것이라 본다”며 “투자자들이 풋옵션을 행사하더라도 우리가 바로 상환해야 하는 게 아니라 채권자가 KDB산업은행, 우리은행, KEB하나은행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밝혔다.
    두산인프라코어가 국내 비금융기업으로는 최초로 발행한 영구채가 자본으로 인정받으면서 많은 회사가 영구채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항공의 경우 2015년 3분기 부채비율이 1051%에 달할 정도로 높은데 지난해 11월 3억 달러(약 3500억 원)의 영구채를 발행했다. 자체 신용도가 높지 않아 수출입은행의 보증까지 받아야 했다. 현재 금리는 2.5%가량이나 3년 후에는 4%p가 가산되며 5년 후에는 3%p가 추가로 더해진다.
    영구채 자체가 위험과 동의어인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영구채를 발행한 기업 가운데 스텝업을 감당할 만큼 재무구조가 좋은 기업이 별로 많지 않다는 데 있다. 이런 기업들에게 당장은 그리 높지 않은 금리에 재무상황까지 개선할 수 있는 영구채는 운동선수에게 스테로이드 투여 같은 유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도한 약물 사용은 선수 생명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영구채가 한국 경제의 심근경색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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