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86

2019.04.26

제22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

“핵 보유는 더 나쁜 선택, 북한에 인식시켜야”

‘요동치는 북 · 미 비핵화 협상과 한반도’ - 조태용 전 외교부 차관

  • 윤융근 화정평화재단 · 21세기평화연구소 기자

    yunyk@donga.com

    입력2019-04-26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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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어느 나라도 완성된 핵을 포기하기는 힘들다. 북한 비핵화 협상 포인트는 핵 포기가 나쁜 선택이 아닐 뿐 아니라, 핵 보유가 더 나쁜 선택임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어야 한다.” 

    조태용 전 외교부 차관(사진)은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이사장 남시욱)가 4월 22일 ‘요동치는 북·미 비핵화 협상과 한반도’를 주제로 개최한 제22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전 차관은 “힘의 원리가 작동하는 한반도 안보 환경에서 대한민국은 중간에 설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라며 “중재자 역할보다 북한에 할 말을 하는 촉진자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조 전 차관의 주요 강연 내용.

    우리는 중재자 아닌 촉진자 역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오판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계산이 충돌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북한이 그동안 벌여왔던 ‘가짜 비핵화 놀음’이 끝났다. 북한은 대북제재 해제에 올인하다 제재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드러냈다. 미국은 이제 제재 카드로 북한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어떤 협상에서든 가장 큰 실수는 거래를 성사하고 싶은 마음을 상대방에게 들키는 것이다.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이 상황을 “당신이 협상에서 필사적이라는 모습을 보이면 상대방은 피 냄새를 맡게 되고, 당신은 죽음에 이른다”고 했다. 트럼프의 협상 전략에 김정은이 걸려들었다. 트럼프는 이제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 도발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말로만 ‘협상하자’고 하면서 북한의 손발을 묶었다. 

    김정은은 하노이 회담에서 ‘수령의 무오류성’을 스스로 훼손했다. 스몰딜 전략도 한계에 봉착했다. 벼랑 끝 전술을 선택하자니 트럼프의 군사옵션이 걱정이다. 경제제재 효과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면서 북한의 무역과 김정은의 통치 자금 금고까지 타격을 입고 있다. 김정은은 지금 결정을 주저하고 있다. 올해 말까지 미국에 공을 넘기고 시간을 버는 듯하지만 스스로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노이에서 입은 내상을 치료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정은은 현실적으로 ‘그럭저럭 버티기’로 나갈 테다. 여론전을 펴면서 저강도 위협과 도발, 자력갱생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올해는 큰 움직임 없이 버티면서 내년 미국 대선을 주시할 것이다. 트럼프의 재선 전망이 밝으면 북한은 얼른 협상으로 복귀할 개연성이 크다. 반대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새로운 인물이 당선되면 도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벼랑 끝 전략을 통해 협상 주도권을 잡으려 할 테다. 하지만 이러한 도발과 벼랑 끝 전략은 상당한 경제제재가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한이 이 전략을 사용하려면 북한 경제가 버텨줘야 한다. 



    어느 나라도 완성된 핵을 포기하기는 힘들다. 들어간 자원도 있고 국민의 사기 저하는 물론, 자신을 따르던 엘리트들을 끌고 나갈 지도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북핵은 내부에서 불안정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내·외부 세력을 막는 최후의 역할도 할 수 있다. 지금 같은 제재가 이어지면 북한은 내년 말까지 버티기 힘들 수도 있다. 김정은의 비밀 금고도 곧 바닥을 보일 것이다. 

    우리는 비핵화 협상 실패에도 대비해야 한다. 미국이 북한과 벌이는 핵협상은 미국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지만 우리 안보를 훼손하는 ‘나쁜 거래’가 될 위험성이 있다. 최대한 압박해 북한을 협상 무대로 복귀시키는 것이 최선이지만 제대로 되지 않으면 미국은 군사옵션을 검토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군사옵션을 검토할 때 사전에 긴밀한 공조를 통해 우리의 발언권을 확보해야 한다. 

    남북경협은 결코 서둘러선 안 된다. 북한이 최근 연이어 우리를 무시하고 깔보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오만함은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것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북·미 협상의 교착 상황은 우리보다 북한에게 더 답답하다. 우리는 비핵화 협상을 중재할 것이 아니라,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핵화 협상의 주안점은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더 큰일이 생기겠구나, 핵 포기가 나쁜 선택이 아니라 보유하는 게 더 나쁜 선택이구나’ 하는 점을 북한 측에 각인시키는 것이 돼야 한다. 

    국가 간 공조에는 신뢰가 필요한데, 지금처럼 북한 편과 미국 편을 동시에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신뢰가 생기기 어렵다. 북·미 관계에서 중재는 내용의 문제고, 촉진은 속도의 문제다. 우리가 중재자가 될 수는 없지만 촉진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북한이 한국을 중재자도, 촉진자도 아니라고 했는데 촉진자 역할까지 부인한다면 할 역할이 아무것도 없다.

    다양한 외교적 선택지 준비해야

    한 가지 강조할 점이 있다. 북한의 핵폐기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미동맹 파기, 주한미군 철수, 핵우산 제거, 한국의 자체 방위력 증강 계획 훼손 등이다. 북한 핵을 폐기한다고 우리까지 무장해제해서는 안 된다. 

    당분간 북·미 정상회담은 어려워 보인다. 서로의 카드를 다 봤기 때문에 비핵화에 대한 준비 없이 만나기는 쉽지 않다. 북한이 순순히 핵을 포기할 리 없고, 성과를 내야 하는 트럼프도 비핵화에 대한 완전한 합의문 서명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국제질서에서 힘이 있는 국가는 자국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힘이 없는 국가는 당해야 할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갈파했다. 앞으로 50년 후 한미동맹에 변화가 없으란 법이 없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지도 미리 따져봐야 한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의 능력과 의사를 점검하고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무엇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필요하면 중국, 일본과 연대도 필요하다. 

    38년간 외교 현장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느낀 것은 위기가 생기면 우방국이 많은 쪽이 이긴다는 점이었다.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나라를 적으로 만들지 말고, 적을 영원한 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영국 파머스턴 경이 말한 것처럼 ‘국가 간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고, 영원한 국익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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