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77

2019.02.22

권재현의 심중일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의 저자 엄기호

한국 사회가 고통의 콜로세움에서 벗어나려면

“누군가의 곁을 지켜주려 나서면 ‘독박’ 쓰는 구조 바꾸자”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2-25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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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중식 기자]

    [홍중식 기자]

    좀비영화나 드라마가 한국에서 유행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독립적 사유능력을 상실하고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자동화된 반응만 보이는 현대인에 대한 염증이 그 하나다. 좀비에는 모든 것을 성적과 돈으로 환산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타자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이런 좀비를 무차별적으로 쓸어버리는 액션 자체에 쾌감을 느끼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언젠가 나 자신이 좀비 같은 존재가 돼버릴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무자비하게 제거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잉여의 존재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호러영화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액션영화적 해석은 내 주변의 타자를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육해도 무방한 존재로 재구성해내는 비윤리적 상상력이 들어 있다. “죽여도 상관없어”라는 주술로 인간 내면의 폭력성에 살인면허를 부여한다. 호러영화적 해석 역시 스스로가 괴물로 변질되는 책임을 오로지 외부에 전가하는 비주체적 관점이 들어 있다. 거기엔 정상인 나와 비정상인 타자를 뚜렷이 가르는 차별의 간지(奸智)가 작동하고 있다. 

    서구에서 탄생한 좀비는 이렇게 ‘사물화한 인간’ ‘타자화한 인간’이란 불온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2017년 한국적 한(恨)의 문화로 변형시킨 좀비가 탄생했다. 연극 ‘비명자들 2’(이해성 작·연출)라는 창작극 속 비명자(悲鳴者)다. 

    비명자는 지극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배회하는 존재다. 영혼이 고통의 화마에 잡아먹힌 존재다. 여기에 독특한 극적 장치가 등장한다. 비명자가 출현하면 반경 4km 내에 있는 사람은 그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똑같이 느낀다. 심지어 비명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치명상을 입히면 반경 4km 내 사람들도 똑같은 상처를 입는다. 고통으로 인해 좀비가 돼 무차별적으로 그 고통에 감염되게 만드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서구적 좀비와 한국적 悲鳴者

    [제공 · 나무연필]

    [제공 · 나무연필]

    학교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한 아이, 일하러 나가며 집 안에 가뒀던 아이들을 화재로 잃은 엄마,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남편의 보상금 합의로 시체 팔이를 한다고 비난받던 아내…. 연극 속 비명자들이다. 당신이라면 이렇게 처절한 고통에 잡아먹힌 존재를 무차별적 피해를 야기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죄의식 없이 좀비처럼 제거할 수 있는가. 



    3월 22일 그 프리퀄에 해당하는 ‘비명자들 1’의 무대화를 앞두고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한국 사회를 응시한 책을 만났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다. 책은 ‘비명자들’의 연극적 상상력의 대척점에 선 듯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과연 고통은 말할 수 있는가. 그럼으로써 타자와 공유될 수 있는가.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국제인권단체에서 7년간 활동한 저자 엄기호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지극한 고통에 빠진 사람은 바깥세계가 붕괴하고 자기에게 함몰돼 있다는 점에서 ‘죽은 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고통 자신이라고까지 말한다. 즉 고통에 잡아먹힌 비명자와 같은 셈이다. 다만 연극적 상상력과 정반대로 그들은 고통을 타인과 나누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런 비명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도와야 할까. 이를 좀 더 구체적 육성으로 풀어내고자 2월 20일 서울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저자 엄기호(48) 씨를 만났다. 현실은 끊고(斷) 가상공간은 잇는(續) 단속이란 개념으로 한국사회를 포착한 ‘단속사회(2014)’의 저자이기도 하다. 

    “대학생 시절엔 국제가톨릭대학생운동에서 활동했고, 졸업 후엔 국제가톨릭지식인문화운동의 상근활동가로 동아시아 빈민과 난민을 돕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는데, 저희 딴에는 돕는다고 도왔음에도 결국 돌아온 답은 ‘너희는 내 고통을 모른다’였습니다. 당시 현장에선 인권피해자가 겪은 고통을 그분들로 하여금 증언하게 해야 한다는 ‘당사자주의’와 활동가들이 조리 있게 이를 대신 전달해야 한다는 ‘대리자주의’를 놓고 어떤 것이 옳은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이는 결국 고통은 말할 수 있는가, 또 고통받는 이들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의 역할은 무엇인가와 연결됩니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는 국제적 인권피해자가 아니다.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엄청난 채무를 뒤집어쓴 선아, 젊은 나이에 백혈병에 걸린 승우, 노년에 잦은 병치레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재희 어머니, 아내와 사별한 뒤 사이비종교에 빠진 덕룡 아버지, 교육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다 모든 게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대안학교 교사 태석….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법한 사람들이다. 

    “고통의 문제는 인권문제를 넘어 한국의 일상 문제와 똑같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겪는 고통의 사례를 모아 편집하고 가명을 썼습니다. 특히 재희 어머니의 경우 제 나이 또래라면 대부분 부모를 통해 겪는 문제입니다. 제 부모 세대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집단적으로 오래 사는 세대입니다. 그렇게 아픈 몸으로 오래 살아본 세대가 없다 보니 그 양반들도 당황스럽고 자식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파생적 고통이다. 그런데 이 고통이 사람을 침묵하게 만들고 사실상 죽음의 상태로 몰아넣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말의 가장 기능적이고 본질적 기능은 의미를 전달하고 자신의 체험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나눌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은 사람을 보면 자신의 상황을 말로 엄청 쏟아내다 갑자기 말을 멈추고 다시 말을 쏟아내다 또다시 멈춥니다. 자신의 체험을 전달하고 나누고 싶어 말을 쏟아내지만 말해봤자 아무 쓸모없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닫아버립니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음 체험과 같다”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절규(1893  ·  왼쪽)와 로마시대 콜로세움의 검투사와 관중을 그린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의 ‘폴리케 베르소(1872)’. 뭉크의 그림이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주제를 형상화했다면, 제롬의 그림은 관종(노예상인)에게 끌려와 누구의 고통이 더 끔찍한지 경쟁을 펼쳐야 하는 고통의 당사자(검투사), 그리고 이를 일상적 유희로 즐기는 관중(대중)으로 이뤄진 고통의 콜로세움을 형상화한다. 폴리케 베르소는 라틴어로 ‘뒤집힌 엄지’란 뜻으로 패배한 검투사를 죽이라는 의미다. [위키피디아]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절규(1893  ·  왼쪽)와 로마시대 콜로세움의 검투사와 관중을 그린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의 ‘폴리케 베르소(1872)’. 뭉크의 그림이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주제를 형상화했다면, 제롬의 그림은 관종(노예상인)에게 끌려와 누구의 고통이 더 끔찍한지 경쟁을 펼쳐야 하는 고통의 당사자(검투사), 그리고 이를 일상적 유희로 즐기는 관중(대중)으로 이뤄진 고통의 콜로세움을 형상화한다. 폴리케 베르소는 라틴어로 ‘뒤집힌 엄지’란 뜻으로 패배한 검투사를 죽이라는 의미다. [위키피디아]

    그는 고통의 피해자가 입을 닫아버리는 것은 곧 인간이기를 포기당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한자어 인간(人間)에 담긴 철학적 의미처럼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할 때 비로소 존재 의미를 획득한다. 인간은 ‘홀로’라는 단수로 존재할 수 없고 여럿으로 존재할 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독일 출신 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성격을 복수성(plurality)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은 독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독존할 수 있는 건 신 아니면 동물이죠. 고통을 나눌 수 없다고 깨달을 때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철저히 버림받은 느낌, 우주에 버려진 느낌입니다. 차갑고 깜깜하고 중력도 느껴지지 않고 방향 감각도 완전히 상실한, 그런 느낌입니다. 이것은 파생적 고통인데, 절대적 외로움의 체험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들은 가장 충격적 이야기는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조차 그 고통을 나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도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저도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제 자신이 심각한 고통에 빠졌습니다. 당시 상당수 교사가 비슷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만나면 동질감을 느끼고 위로도 받는 것 같았죠. 그런데 말을 나눌수록 그분들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르다는 것만 확인하게 됐습니다. 인권현장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다 나중에 엄청 싸우게 됩니다. 서로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너는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병을 앓는 환자 사회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됩니다. 서로 위로를 나누다가도 내 고통의 절대성에 딱 부딪히는 순간 ‘너는 나의 고통을 모른다’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선 다층적 접근이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고통은 다차원적이다. 사회적 차원, 관계적 차원, 실존적 차원에서 고통을 덜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사랑과 우정의 영역인 친밀성의 영역에서 의미를 찾는 욕망, 또 고독한 내면으로 침잠해 의미를 찾는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회적·관계적·실존적 존재감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거죠. 고통을 겪게 되면 이 존재감을 모두 상실합니다. 한국은 엄청나게 압축 성장을 하다 보니 고통에 직면했을 때 자판기만 누르면 나오는 만병통치약을 찾습니다. 3가지 차원의 문제를 단박에 해결하려는 거죠. 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종교는 흔히 내 고통에 우주론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렇다고 주변 사람과 관계의 문제까지 해소해주진 못합니다. 신흥종교가 가정 파괴를 가져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실 고통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장 취약한 차원이 친밀성 영역입니다.”

    고통의 ‘곁’이 무너지지 않게 지켜줘야

    그는 ‘비를 맞는 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같이 비를 맞아주는 사람’이란 표현이 이런 고통의 본질을 호도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싫어하기도 하는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비를 맞고 있으면 곁에서 같이 비를 맞아주는 감정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곁에서 비를 맞아주는 사람도 바라는 게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곁에서 같이 비를 맞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사람이 알아주고 위로받기를. 그런데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에 매몰돼 곁에서 누가 뭐를 하든 잘 인지하지를 못합니다. 자기 고통에만 함몰돼 내 곁에 누가 있다는 사실마저 까먹습니다.” 

    책에서 그가 강조한 점은 고통을 겪는 사람 못지않게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고통의 ‘곁’)이 무너지지 않게 사회가 도와주고 지원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에 함몰된 상태는 철학적으로 죽음의 상태와 같다. 바깥을 상실하고 외부와 연결망을 상실한 상태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바깥을 회복하면 고통에 함몰된 상태에서 벗어나 회복될 가능성이 생성된다.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누군가가 계속 붙어 있어줘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곁의 고통’을 정확히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곁의 고통은 자신이 있다는 것조차 알아주지 않는데, 존재감 없이 그 옆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렇게 고통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에게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사회적 존경이라도 받지만 요양사와 지역아동센터 아동복지교사 같은 분들은 뒤치다꺼리나 하는 1회용 단순노동자, ‘시다바리’로만 치부됩니다. 고통을 겪는 분들이 이미 무너진 상태라면 그 곁을 지키는 사람들까지 무너지지 않도록 지원하고 배려하는 ‘곁의 곁이 돼주는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합니다.” 

    책 내용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한국 사회의 공론장이 콜로세움화되고 있다는 후반부의 분석이다. 한국 사회에는 점차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고 그 약점을 폭로하기 바쁜 ‘관종’(타인으로부터 관심을 받고자 남들이 꺼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엄기호에 따르면 관종은 타인의 고통과 비참함을 전시함으로써 돈을 버는 고대 로마의 노예상인에 가깝다. 고통받는 존재는 그들의 놀림감 내지 먹잇감이 되고 있다. 관종에 의해 벌거벗겨지다시피 대중에게 던져진 그들은 서로 자신이 더 고통받는 존재임을 증명하도록 내몰렸다는 점에서 검투사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런 관종의 신상 털기(중국식 표현으로는 인육사냥)를 일상으로 소비하는 대중은 검투사의 대결을 구경하는 콜로세움의 관중이다. 이로 인해 고통과 비참이 해소되지는 못하고 끊임없이 소비되는 ‘고통의 올림픽’만 펼쳐지게 됐다는 것이다.

    ‘고통의 콜로세움’이 된 한국 사회

    [홍중식 기자]

    [홍중식 기자]

    “영어로 ‘attention seeker’라고 부르는 관종은 전 세계적 문제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 관계, 내면 3가지 차원에서 존재감을 획득해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 존재감을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 하는데 취업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그게 힘들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결이 다른 3가지 차원의 존재감을 획득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주목입니다. 유튜브 등을 통해 주목받는 존재가 되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친구들에게도 인정받는다는 ‘존재감의 고양’을 체험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를 놓치기 싫어 더 센 것,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겁니다.” 

    책에서 그는 기쁨과 재미를 구별하며 이를 설명한다. 기쁨은 어떤 사람 자체의 현존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재미는 그 사람이 가진 유용성에 따라 판가름 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 존재인가로 타인을 평가하는데, 소셜미디어 시대가 되면서 그것이 재미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통일됐다는 것이다. 그런 재미를 가져다줬을 때 비로소 주목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21세기의 비극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주목의 정치경제학에서 고통은 2가지 측면에서 아주 비극적으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의 당사자가 스스로 드라마를 만들어 비극적으로 재현해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넘쳐나다 보니 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이 ‘더 센 것’임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비극적이고, 더 선정적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 주목을 받으면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까먹게 돼 실존적 차원의 고통을 응시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회적·실존적 차원의 문제가 해소되지 못한 채 고통의 드라마를 둘러싼 암투와 돈벌이만 번성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한 작은 실천으로 그는 “누군가의 곁을 지켜주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독박’을 씌우는 것부터 멈추자”고 말했다. 치매에 걸리거나 중병에 걸린 부모를 모시겠다고 나서는 형제자매, 교실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를 보호하려고 나서는 친구가 있을 때 그들을 격려하는 것을 넘어 그들 대신 물질적·경제적 지원을 떠맡겠다고 나서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관종



    '다차원적 고통'



    '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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